[박헌정의 도전! 자유여행]
여유 있는 일정이 안전을 보장
증상 따라 휴식-약국-병원 적절히
의료비 폭탄 대비 여행보험 필수
돌발 상황 땐 중단하고 귀국해야
소화가 안 되고 배가 아파 응급실로 달려갔더니 담석증이란다. 코앞으로 다가온 히로시마 여행이 무산되면서 금전적 손실이 꽤 됐다. 마침 입원 기간에 스마트폰도 완전히 먹통이 되어 새것으로 바꾸었다. 만일 여행 중이었다면? 담석으로 데굴데굴 구르고, 스마트폰마저 안 되고··· 아찔하다. 여행 전에 발견한 게 천만다행이다.
여행의 3대 조건은 돈·시간·건강이다. 학생 때에는 시간은 많은데 돈이 없더니 직장 시절에는 시간에 쫓겼다. 이제는 건강이 최대 이슈다. 긴 일정이나 험한 곳은 버겁고, 뭘 한 것 같지도 않은데 몸은 처진다. 나만 그런 줄 알았다. 친구들도 그렇단다.
여행에서 가장 중요한 건 건강과 안전이다. 하지만 “차 접촉 사고 땐 이렇게 해!”라고 훈수하다가 정작 자신이 당하면 혼비백산하듯, 낯선 곳에서 탈 나거나 사고당하면 능숙히 대처하기가 쉽지 않다. 경험이 약(藥)이지만 많이 경험해 보라고 할 수도 없다. 그래서 암 치료 이후 후천적 약골이 된 나의 경험이라도 나눠볼까 한다.
오래전 헝가리에 갈 때였다. 공항에 늦게 도착했더니 창구는 이미 닫히고 한 직원이 남아있다가 도와주었다. 마음이 급해져 환전 등을 위해 바삐 뛰어다니는데 갑자기 종아리가 지끈했다. 지독한 근육경련이었다. 시작 전부터 불길한 징조 아닐까 싶었다. 근육이완제를 먹고 마사지도 해봤지만 며칠 동안 절뚝이며 돌아다녀야 했다. 신체적 핸디캡을 갖고 여행하는 게 얼마나 힘든지 생생하게 느껴보았다.
재작년 이스탄불에서는 쌀쌀한 날씨에 노천카페에서 차를 마시다가 목감기에 걸렸다. 자동차 매연에 담배 연기까지, 시내 공기가 안 좋아서인지 목에서 시작해 코, 기침, 가래로 퍼져 열흘 넘게 고생하다 보니 정상 컨디션으로 여행한 건 며칠 안 된다.
사실 여행에서 겪는 병고는 이 정도다. 이외에 물이나 음식 때문에 배탈 나거나, 무리하다 몸살이 오거나 환경이 바뀌어서 불면이나 변비로 고생할 수도 있다. 국내라면 아무것도 아니고 해외에서도 김이 조금 빠지고 불편할 뿐 결정적인 문제는 아니다. 곧 괜찮아질 것임을 알기 때문이다. 하지만 차원이 다른 사건도 있다.
여보, 눈이 안 보여!
코카서스 여행 때였다. 조지아 트빌리시에서 지내다가 비행기로 옆 나라 아제르바이잔 수도인 바쿠로 넘어가 며칠 구경하고 내륙을 통해 다시 조지아로 오는 길이었다. 바쿠 터미널에서 버스에 오르려는 순간, ‘어? 왜 눈이 안 보이지?’ 눈이 침침하거나 어두운 게 아니라 아예 안 보였다. 마치 망막에 하얀 대형 스크린을 찰싹 붙인 것처럼 앞이 새하얬다. 공포 그 자체다. “여보, 나 눈이 하나도 안 보여.” 아내 표정은 어땠을까?
잠시 후 흰 천막이 찢어지면서 서서히 보이기 시작했다. 일단 버스에 탔지만 머릿속이 복잡하다. 내륙 소도시에는 변변한 병원도 없을 텐데 이대로 가도 될까? 촌각을 다투는 일이라면? 자칫 실명하면? 다행히 셰키와 시그나기를 거쳐 사흘 만에 무사히 트빌리시로 돌아왔다.
며칠 후 북쪽의 카즈베기로 이동했다. 즐겁게 계곡 트레킹을 마친 다음 날, 마을 앞산의 게르게티 츠민다 사메바 교회에 올라갈 때 같은 증상이 나타났다. 나중에 사진을 보니 우리 부부의 얼굴은 흙빛이 되어 있었다. 트빌리시부터 함께 택시를 타고 온 분이 정신과 전문의였는데, 친구 의사들에게 이리저리 연락해 보더니 아무래도 귀국하는 게 좋겠다고 해서 남은 아르메니아, 튀르키예 일정은 포기했다. 귀국 후 정밀검사에서도 원인을 알 수 없었고 지금껏 아무 이상 없지만 공포스럽던 기억은 여전히 남아있다.
여행 중 아프지 않으려면
아프고 싶어 아픈 사람은 없다. 난데없이 찾아오는 병을 피할 방법도 없다. 하지만 안전할 확률을 높이고 위험을 줄일 수는 있다.
첫째는 몸 관리다. 여행 경험이 늘수록 여행이 결코 만만한 일이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사고와 범죄 위험뿐 아니라 안전한 상황에서도 내 몸이 감당해야 할 요소가 많다. 시차, 음식, 공기, 심지어 샤워하는 수돗물마저 내 몸에는 낯설다. 따라서 여행 전 컨디션이 중요하다. 술담배 줄이고 과도한 일 대신 적당한 운동으로 몸을 최고 상태로 만들어야 한다. 특히 중장년은 잘 먹고 잘 자야 면역력이 올라온다.
둘째, 일정을 여유롭게 하고, 그 일정에도 너무 얽매이지 말자. 젊을 때는 30분 단위로 쪼개서 한 곳이라도 더 찍고 다니려고 한다. 그런데 해외여행이야말로 한계효용체감의 법칙이 딱 들어맞는다. 첫날 도착하면 시간이 아까워 시차 안 맞고 피곤한데도 발발거리고 돌아다닌다. 그때가 가장 흥분되고 재미있다. 그러다가 열흘쯤 지나면 신기함이 지루함으로 바뀌고, 화창한 날 숙소에서 퍼져 잠만 잘 수도 있다.
한곳에서 10년을 산다 한들 거기를 전부 알 수 있을까? 뭐든 짧을수록 강렬한 법이니 너무 많은 계획보다 현지에서 가장 매력적인 게 뭔지 알아보고 그걸 찾고 즐기는 여행 습관이 필요하다. 양보다 질적인 여행이다. 그리고 늘 여유 있게 다녀야 한다. 시간에 쫓겨 헐레벌떡 다니다 보면 생각과 시야가 좁아지고, 그러면 질병뿐 아니라 사고 위험도 높아진다. 일정과 계획을 많이 만들지 말자. 그런 여행은 촌스럽다.
안전한 여행을 위협하는 최대의 적은 너무 많은 일정과 계획이다. 바쁘면 바쁠수록 시야가 좁아지고 행동은 급해져 질병뿐 아니라 범죄의 표적이 되기도 한다. /박헌정
셋째, 사후 대비책으로서 보험 가입이다. 국내든 해외든 응급실로 달려가면 죽게 놔두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건강보험이 없는 해외에서의 의료비용은 걷잡을 수 없으므로 해외여행 보험은 필수다.
특히 질병, 상해 같은 항목 외에 사고·조난 때 구조하는 비용과 사고 또는 병으로 국내 이송될 때의 비용이 포함되어야 한다. 만일 중환자가 되어 누워서 온다면? 기내에 좌석 여섯 개를 붙여 임시 병상을 만드는데, 그 비용을 ‘특가 할인 항공권’ 아닌 정가로 따져보자. 게다가 규정에 따라 동행하는 의사의 항공료, 보수, 출장비까지 최소 수천만원이다.
끝으로, 이러한 사전 대비책보다 더 중요한 건 여행 동반자다. 혼자 꼼짝없이 누워있을 때 옆에서 대책을 찾아줄 사람이 있고 없고는 하늘과 땅 차이다. 혼자 다니는 여행은 고수들 영역이다.
심상찮으면 여행 중단이 답이다
만일 직접적인 의료적 해법이 필요하다면 첫째는 약국이고, 둘째는 병원이다. 여행 전에 외국인을 진료할 수 있는 현지 병원을 파악해 두는 게 좋다. 급할 때는 호텔의 도움을 청하자. 컨시어지(Concierge)는 로비에서 가방만 맡아주는 사람이 아니라 긴급 상황 때 병원, 경찰서 등을 연결해 주는 ‘현지 해결사’다.
낯선 곳에서 병원 문턱이 높게 느껴질 수도 있지만 병원은 병원일 뿐이다. 번역 앱을 이용해서 증상을 차분히 설명한다. 여권을 챙겨서 가고 진료나 치료 후에는 영수증, 진단서나 소견서, 처방전 등을 (가능하면 영문으로) 챙겨야 보험금을 청구할 수 있다.
몸에 이상이 느껴질 때 참고 버티는 게 능사가 아니다. 가벼운 증상이라면 휴식과 약으로 회복되지만, 심상치 않다면 지체없이 병원을 찾아가야 한다. / 박헌정
약은 충분히 챙겨가자. 평소 복용하는 약부터 해열제, 소화제, 정장제, 종합감기약, 지사제, 변비약, 소염제, 근육이완제, 소독약(일회용 형태), 일회용 밴드가 기본이다. 특히 면역력이 약하면 체온계를 챙기고, 만일에 대비해 조제약은 처방전과 함께, 일반약품은 포장된 채로 가져가는 게 좋다.
이유 없이 기력이 달리고 맥이 풀릴 수도 있다. 컨디션 저하다. 이럴 때는 일정을 줄이거나 포기하고 숙소에서 약 먹고 푹 쉬면 웬만하면 좋아진다.
안전한 여행을 위해서는 미리 대비해야 하고, 무엇보다 많이 돌아보겠다는 욕심을 버려야 한다. 몸의 이상 신호가 느껴진다면 참고 버티는 게 능사가 아니다. 용기로 극복할 일도 아니다. 몸이 불편하면 마음이 불안해지고 그러면 여행도 재미없다. 그러니 때로는 미련 없이 여행을 접는 것도 현명하다. 여기가 달나라도, 에베레스트 정상도 아니고 다음에 또 오면 된다. 아니, 더 짜릿한 곳이 세상에 널려 있음을 믿자.
<건강한 여행을 위해>
△여행 중 몸의 이상은 용기로 해결될 게 아니다. 컨디션이 안 좋을 때는 휴식, 이상이 느껴지면 병원, 심각하면 일정을 중단하고 귀국해야 한다.
△여행 전에는 몸 상태를 최상으로 끌어올려야 한다. 낯선 환경 자체가 부담이므로 충분한 휴식과 기본 체력 관리가 필요하다.
△일정은 여유롭게 잡아야 한다. 무리하면 피로가 쌓여 사고와 질병 위험을 높이고 결국 여행 전체를 망칠 수 있다.
△위급 상황에서는 동행자나 호텔 측 도움을 받아 곧바로 병원 응급실로 가야 한다. 여행 전에 미리 큰 병원을 파악해 두자.
△여행보험은 일반 치료비 외에 구조·이송 비용 보장까지 포함해야 한다. 중증 상황에서는 엄청난 귀국 비용이 발생할 수 있다.
한계효용체감의 법칙
=어떤 재화의 소비를 늘릴 때 추가로 얻는 만족감이 점차 줄어든다는 경제학 원리다. 여행에서도 첫날의 감동은 크지만 일정이 길어질수록 새로운 풍경에 무덤덤해지는 현상을 설명할 때 쓰인다.
여성경제신문 박헌정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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