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사회

[박윤정의 위클리투어] 치앙마이 '란나의 숲'서 얻은 인문학적 위안

여행은 풍경을 소비하는 일이 아니라, 한 도시가 품은 시간을 천천히 읽어가는 일이다 이번 치앙마이 여행은 그 사실을 다시 깨닫게 한다. 오랫동안 태국은 세계 여행자들에게 ‘미소의 나라’이자 가장 부담 없이 떠날 수 있는 휴양지였다.

[박윤정의 위클리투어] 치앙마이 '란나의 숲'서 얻은 인문학적 위안

도이수텝 산자락에 자리한 알린타 리트리트 치앙마이. 사진=박윤정 민트투어 대표

여행은 풍경을 소비하는 일이 아니라, 한 도시가 품은 시간을 천천히 읽어가는 일이다 이번 치앙마이 여행은 그 사실을 다시 깨닫게 한다. 오랫동안 태국은 세계 여행자들에게 ‘미소의 나라’이자 가장 부담 없이 떠날 수 있는 휴양지였다. 방콕의 밤거리를 가득 메운 열대 과일 향, 푸껫의 눈부신 바다, 따뜻한 사람들과 저렴한 물가만으로도 이유는 충분했다.

그러나 최근 태국 관광 환경은 조금씩 바뀌었다. 바트화 강세와 높아진 물가, 중화권을 중심으로 확산된 치안 불안, 베트남을 비롯한 주변 국가들의 약진, 여기에 정치적 불안정까지 겹치며 여행자들의 선택이 조금씩 바뀌었다. 북부의 대표 도시 치앙마이도 예외는 아니다. ‘한 달 살기’의 성지, 감성 카페의 도시라는 수식어 뒤에는 매년 반복되는 버닝 시즌이 문제로 남아 있다.

2월 말부터 4월까지 이어지는 화전 농법과 산불은 도시를 잿빛 스모그로 뒤덮는다. 분지 지형인 치앙마이는 연기가 쉽게 빠져나가지 못해 초미세먼지 농도가 세계 최악 수준까지 이르렀다. 그래서 이 도시를 가장 아름답게 만날 수 있는 계절은 공기가 맑고 하늘이 높아지는 11월부터 1월까지라고 한다. 이번 여행은 아쉽게도 그 시기를 놓쳐 때때로 희뿌연 하늘 아래 도시를 걷기도 했지만, 치앙마이의 진짜 매력은 맑은 풍경보다 사람들의 삶 속에 스며들어 있었다.

◇ 양귀비 피던 산…커피 향 피어나다

이른 아침, 님만해민 골목으로 들어서자 사원의 종소리가 새벽 공기 속으로 잔잔하게 퍼진다. 승려들은 탁발을 위해 천천히 길을 걸었고, 골목마다 갓 볶은 원두 향이 서서히 번진다. 문을 연 지 얼마 되지 않은 카페에서는 바리스타가 분주하게 에스프레소를 내리고, 노트북을 펼친 여행자들은 하루를 시작한다. 님만해민에서 올드시티까지 걷는 동안 도시 전체가 하나의 거대한 로스터리처럼 느껴졌다.

치앙마이가 오늘날 동남아시아 스페셜티 커피의 중심지가 된 것은 단순한 유행이 아니다. 도이수텝과 도이인타논을 비롯한 해발 1000m 안팎 고산지대는 아라비카 커피가 자라기에 이상적인 환경을 갖추고 있다. 그러나 이 변화를 만든 것은 자연보다. 사람이다. 1969년 푸미폰 아둔야뎃 국왕은 북부 산악지대의 빈곤을 해결하기 위해 '로열 프로젝트'를 시작했다고 한다.

당시 북부 ‘골든트라이앵글’ 일대 소수민족들은 마약 원료인 양귀비를 재배하며 가난과 범죄의 굴레에 갇혀 있었다. 국왕은 이들의 빈곤을 해결하고 마약 재배를 퇴치하기 위해 양귀비 대신 커피와 과수, 채소를 심도록 지원했고 정부와 연구기관은 수십 년 동안 재배 기술과 유통망을 함께 만들어 갔다.

그 결과, 양귀비가 피던 산은 세계적인 스페셜티 커피 산지로 탈바꿈했다. 카페에서 마신 한 잔의 싱글 오리진은 단순히 좋은 원두의 맛이 아니라, 한 나라가 마약 재배를 줄이고 공동체의 삶을 바꾸어 온 시간까지 함께 녹아 있었다. 그래서 치앙마이 커피는 향보다 이야기가 먼저 기억에 남는다.

세계 각국에서 모여든 디지털 노마드들도 도시의 풍경을 바꾼다. 스타벅스보다 Graph, Ristr8to 같은 로컬 로스터리가 더 사랑받고, 카페는 단순히 커피를 마시는 공간이 아니라 일하고 토론하며 새로운 문화를 만들어 가는 공동체의 거실이 됐다.

핑강 변의 라야 헤리티지. 사진=박윤정 민트투어 대표

◇ 자연 소비하지 않는 럭셔리

이번 여행은 화려한 리조트보다 자연을 존중하는 공간을 선택했다. 도이수텝 산자락에 자리한 알린타 리트리트 치앙마이는 숲속으로 조용히 스며든다. 오래된 티크 목재를 재활용한 건물은 숲의 풍경을 방해하지 않았고, 객실 안에서는 일회용 플라스틱을 찾아볼 수 없다. 아침 식탁에는 지역 농가에서 가져온 유기농 식재료가 오르고, 요가와 명상 프로그램은 여행의 속도를 자연스럽게 늦춘다.

이른 아침, 식당에서 바라보니 주황색 가사를 두른 승려들이 묵묵히 탁발을 위해 지나간다. 누구도 서두르지 않고 목소리도 높이지 않는다. 새소리만 숲속을 메웠다. 그 짧은 풍경으로 치앙마이라는 도시가 왜 ‘느림’을 이야기하는지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었다. 머무는 공간의 럭셔리는 화려한 샹들리에나 대리석 욕실이 아니었다. 자연을 해치지 않는 절제와 지역 공동체를 존중하는 태도야말로 가장 품격 있는 환대였다.

며칠 뒤 머문 또 다른 호텔, 핑강 변의 라야 헤리티지는 다른 방식으로 마음을 움직였다. 북부 란나 왕국의 건축미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이 리조트는 화려함보다 여백으로 편안함을 선사한다. 객실 곳곳의 직물과 도자기, 지역 장인들과의 오랜 협업으로 만들어진 목공예품이 눈길을 이끈다.

레스토랑에서 제공되는 메뉴들, 지역 농가의 식재료들을 중심으로 한 현지 음식들이 또 다른 여행의 묘미를 느끼게 한다. 아침의 요가, 산책길에서 만난 꿀벌통과 나무를 위해 기르는 벌레들. 모두가 낯설고 신선하다.

천천히 테라스에 앉아 핑강을 바라본다. 강물은 서두르지 않고, 바람은 나무 사이를 조용히 지나갔다. 관광객을 위한 이벤트도, 화려한 음악도 없었다. 대신 물 흐르는 소리와 새소리만이 시간을 채운다. 그 고요함 속에서 문득 란나 문화가 지금도 살아 있다는 사실을 실감한다. 전통은 박물관 안에 보존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의 일상 속에서 이어질 때 비로소 생명력을 얻는다. 라야 헤리티지는 그 사실을 말없이 보여주고 있었다.

치앙마이 푸드 거리. 사진=박윤정 민트투어 대표

◇ 여행, 결국 사람 배우는 일

치앙마이는 지금도 충분히 아름답다. 다만 그 아름다움은 사진 속 푸른 하늘만으로 완성되지 않는다. 계절을 이해하고, 자연을 존중하며, 이 땅의 역사와 사람들의 삶을 함께 바라볼 때 비로소 진짜 치앙마이가 모습을 드러낸다. 스모그 너머 란나의 숲에서 마신 한 잔의 커피, 그리고 지속가능한 철학을 품은 두 호텔에서의 경험은 여행이 소비가 아니라 공존의 방식이 될 수 있음을 조용히 일깨워 줬다.

치앙마이는 화려한 관광지가 아니라 자연과 문화, 그리고 사람이 서로를 지키며 살아가는 법을 보여주는 거대한 인문학의 숲이었다. 커피 향이 번지던 골목과 핑강 위를 천천히 스쳐 가던 바람의 속도, 그 느린 리듬은 여행이 끝난 뒤에도 오래도록 이어지고 있다.

박윤정 민트투어 대표 pyj@minttour.co.kr

이 기사 공유하기
페이스북X

이 기사를 추천합니다

i

댓글

0

후 댓글을 작성할 수 있습니다.

아직 댓글이 없습니다 이 기사에 첫 의견을 남겨보세요.

댓글 수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