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혜의 숲을 찾아서㊲]
노란 의자가 이끈 바다로의 여행
노란 의자 앞으로 망망대해의 바다가 펼쳐진 사진 한 장이 나를 인천으로 이끌었다. 서울에서 인천은 가깝고도 먼 곳처럼 느껴진다. 멀지 않지만 쉽게 가지지 않고, 가더라도 잠시 머물다 오는 곳. 업무로 인천이나 송도에 방문할 때면 미팅을 마치고 식사를 하고 그냥 집으로 돌아오곤 했다.
그런 날이 있다. 그냥 바다가 보고 싶어지는 날. 그래서 바다를 보기 위해 훌쩍 떠나고픈 날. 대학 시절, 바다를 보고 싶을 때면 친구들과, 후배들과 신촌에서 버스를 타고 월미도로 가곤 했다. 40년이 흐른 지금도 바다가 이끄는 대로 발길을 옮기는 그 마음은 변함이 없는 것 같다.
노란 의자에 앉아 바다를 보는 사진은 누군가 찍은 인천국제해양박물관 2층에 자리한 도서관의 한 장면이었다. 이곳은 오래전 대학생 때 오곤 했던 월미도 공원과 연결된 바닷가에 자리 잡고 있었다.
인천해양박물관 도서관 방문객들이 바다를 향해 있는 노란 의자에 앉아 책을 읽고 있다. (사진=고규영)
바다 위를 유영하는 독서
노란 의자에 앉아 바다를 보면서 가벼운 예술 잡지를 펼쳤다가 눈을 들어 바다를 본다. 노란 의자에 앉아 바다를 유영하며 바다 위에서 책을 읽는 느낌이라고나 할까.
유홍준의 '나의 문화유산답사기(서울편4)'와 일본 문화 관련 책, 한겨레 수상작 소설 '말뚝들' 등 여러 권의 책을 골라 바다가 앞으로 펼쳐진 서가 근처 책상으로 자리를 옮겼다.
오전에는 볼 수 없었던 강물 위의 윤슬 같은 따스한 햇살이 바다 위 물결에서 넘실댄다. 그 바다 위로 갈매기도 날고, 고깃배도 지나가고 큰 선박들도 떠있다. 그 망망대해의 바다를 쳐다보다가 또 책을 보다가를 반복한다.
나무처럼, 바다처럼
유홍준의 봉은사 답사기를 읽다가 그가 노목 옆에서 떠올린 시구가 마음으로 들어왔다.
[나무 1:지리산에서-신경림]
나무를 길러본 사람만이 안다
반듯하게 잘 자란 나무는
제대로 열매를 맺지 못한다는 것을
너무 잘나고 큰 나무는
제 치레하느라 오히려
좋은 열매를 갖지 못한다는 것을
한 군데쯤 부러졌거나 가지를 친 나무에
또는 못나고 볼품없이 자란 나무에
보다 실하고 단단한 열매가 맺힌다는 것을
나무를 길러본 사람만이 안다
우쭐대며 웃자란 나무는
이웃 나무가 자라는 것을 가로막는다는 것을
햇빛과 바람을 독차지해서
동무 나무가 꽃 피고 열매 맺는 것을
훼방한다는 것을
그래서 뽑거나 베어버릴 수밖에 없다는 것을
사람이 사는 일이 어찌 꼭 이와 같을까만
앞으로 펼쳐진 넓은 바다 위로 마음으로 이 시구를 띄워본다. 그래, 같이 살아가야 하는 세상임을. 그래서 같이 열매 맺고 꽃피우는 삶을 살아가야 함을. 같이 흐르고 흘러서 더 넓은 바다로 나아가는 바다를 바라보면서 이 시구가 더 마음을 터치하는 것 같다.
국립인천해양박물관 도서관 내부 (사진=고규영)
고요한 축복의 시간
이 인천국제해양박물관 도서관은 너무나 고요하다. 2024년 11월에 개관하여 2년이 채 되지 않아 아직 존재 자체가 잘 알려지지 않았거나, 박물관을 방문하는 많은 이들이 관람을 마치고 도서관까지 오지 않아서 그런 건지 고요하다.
봄을 알리는 햇빛이 바다 위에서 반짝이는 황홀한 모습을 본다는 건 혼자 누리기에는 너무 큰 선물을 받은 느낌이다.
땅 위에 올려진 건물이지만 땅이 아닌 바다 위에 부유하는 어느 배에 올라탄 것 같다. 배가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내가 배를 타고 움직이는 것처럼, 바다와 내가 함께 호흡하는 것 같다.
큰 유리창 너머로 펼쳐진 서해 바다는 끝이 보이지 않는다. 노란 의자들이 일렬로 놓인 창가에 앉으면, 마치 배의 갑판에 앉아 망망대해를 바라보는 듯한 착각이 든다. 책장을 넘기다 고개를 들면 바다가, 다시 책을 보다 눈을 들면 또 바다가 그곳에 있다.
도서관의 노란 의자에 앉아 책을 읽다가 바다를 보고, 바다를 보다가 다시 책을 보는 이 반복 속에서 시간이 천천히 흐른다. 이것이 진정한 쉼이 아닐까. 바쁜 일상에서 벗어나 바다와 책 사이를 오가며 마음의 파도를 잠재우는 시간.
평화를 위한 기도
봄바람이, 봄 햇빛이 주는 축복의 시간을 누리는 이 순간에 감사할 뿐이다.
창밖으로는 서해의 바다가 끝없이 펼쳐진다. 저 바다 너머 어디쯤, 지구 반대편에서는 여전히 전쟁이 벌어지고 있다. 전쟁으로 고통받는 사람들에게, 그리고 전쟁을 일으킨 사람들에게도 이 햇빛과 봄바람을 보내주고 싶다. 이 봄바람과 햇빛이 그 사람들의 마음에 전해져서 전쟁이 그치고 평화로운 세상이 어서 오기를, 이 바다 위 봄빛을 바라보며 기도해 본다.
바다는 모든 것을 품는다. 크고 작은 강물들이 흘러들어도, 거센 파도가 일어도, 결국 다시 고요해지며 모든 것을 받아들인다. 나무처럼, 바다처럼 살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서로를 가로막지 않고 함께 자라는 나무처럼, 모든 강물을 품어 안으며 끊임없이 흐르는 바다처럼.
국립인천해양박물관 도서관에서 바라본 서해 바다. (사진=고규영)
추억의 시간 속으로
도서관을 나서며 박물관 건물을 바라보았다. 유려한 곡선을 그리며 바다를 향해 뻗어 있는 현대적 건축물. 그 너머로 월미도 회전 풍차가 보였다. 오래전 대학생 시절 친구들과 타던 그 회전 풍차. 40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풍차는 여전히 그곳에서 천천히 돌고 있었다.
서울로 돌아가기 위해 인천역으로 향했다. 역 앞 차이나타운의 붉은 건물들이 봄 햇살 아래 눈부시게 빛났다. 화려한 붉은색과 노란색으로 채색된 패루(牌樓)를 지나 골목을 걷는다. 어릴 적 기억 속 풍경이 겹쳐진다. 작은 중국 음식점에 들어가 짜장면을 주문했다. 달콤하면서도 구수한 그 맛이 오래된 추억을 소환했다.
바다 위 도서관에서 시작된 이 짧은 여행은, 회전 풍차와 차이나타운을 거쳐 내 가슴속 먼 추억의 시간으로 나를 데려갔다. 봄바람과 봄 햇빛이 준 축복 같은 하루였다. 전쟁의 혼란 속에서 우리의 마음과 몸을 쉬어가게 하는 이런 시간이, 전쟁 가운데 있는 사람들에게도 전해져 평화가 오기를 다시 한번 간구해 본다.
인천해양박물관 도서관 전경. (사진=고규영)
당신을 위한 초대
멀리 떠날 수 없지만 바다를 보고 싶은 당신, 이곳 인천 바다 위 지혜의 곳간에서 봄맞이를 해보지 않겠는가?
월미도 문화의거리에서 시작해 월미공원을 거쳐 해안 산책로를 따라 걸으면, 바다와 함께 호흡하며 이 도서관에 도착할 수 있다. 도서관에서 책과 바다를 만나고, 박물관을 나서 회전 풍차의 추억을 떠올리고, 인천역 차이나타운에서 오래된 시간을 소환하는 여정. 아스라하고 아련한, 그러나 분명히 우리 곁에 있는 이 장소들이 당신을 기다리고 있다.
인천역 차이나타운. (사진=고규영)
노란 의자에 몸을 맡기고, 바다 위 봄빛의 축복을 누리며 봄을 맞아보지 않겠는가? 책과 바다가 만나는 이곳에서, 당신만의 고요한 시간을 선물하시길.
고규영
은 글로벌 마케팅전략 컨설턴트다. LG전자, LG필립스-디스플레이, LG디스플레이에서 마케팅 임원으로 일했다. 지난 30년간 B2B와 B2C 시장을 아우르며 시장, 고객, 회사의 마케팅 전략 수립과, 글로벌 영화사, 유명아티스트, 메가인플루언서, 글로벌 유통 등과의 마케팅 협업을 해왔다. 기업 퇴임후엔 전문직 공무원으로 봉직하며 기업 홍보경험을 정부기관에 접목하는 시도를 했다. 현재는 기업 및 공공기관 대상으로 마케팅과 AI 관련 강의를 하며, 뉴스버스 객원기자로도 활동 하고 있다. 공저로 <인생후반전, AI와 동행> 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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