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헌욱 한국부동산원장
좋은 도시는 설계의 결과다. 항공기가 요구 성능을 내려면 그에 맞는 사양이 필요하듯 도시도 시민이 요구하는 품질을 만족시키려면 그에 맞는 요소를 갖춰야 한다. 어떤 도시가 좋은 도시인지는 혁신성과 삶의 질이라는 두 범주로 결정된다. 도시의 혁신성은 밀도와 인재 네트워크에서 나온다. 지식산업 시대는 제조업 시대보다 훨씬 높은 인재 밀도를 요구하며 혁신성이 높은 도시는 곧 혁신적인 인재를 만날 기회가 많은 도시다. 유엔 해비타트는 지속 가능한 근린주구의 설계 원칙으로 ㎢당 1만 5000명 이상의 밀도를 제시한다.
만남의 빈도를 결정하는 두 번째 변수는 시간이다. 마르케티 상수에 따르면 이동 수단이 발전해도 사람의 하루 평균 이동 시간 예산은 한 시간 안팎이다. 이 시간 예산을 통근에 배분하면 도시 설계의 기준선이 드러난다. 편도 15분, 즉 왕복 30분으로 통근이 해결되면 하루 이동 시간 예산의 절반이 남는다. 이 여백이 회의와 모임, 우연한 마주침 같은 재량적 이동에 쓰인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15분을 고정 상수로 두는 설계다. 시간을 15분에 묶고 수단을 겹겹이 쌓아 도달 범위를 넓히면 시간 예산을 절감할 수 있다. 가까운 거리는 도보와 자전거로, 생활권 도시는 지하철과 트램으로, 도시 간 이동은 광역급행철도와 고속철도로 각각 15분을 보장한다. 그러면 도시 안의 위계와 도시 사이의 위계가 함께 완화되고 어디에 살든 15분이라는 같은 시간 안에서 도시를 쓸 수 있게 된다.
이제 크기를 계산할 수 있다. 도시철도의 실효 속도를 고려할 때 중심 1개와 부심 4~6개를 두고 도시교통을 치밀하게 설계하면 100㎢까지는 15분 이동권을 보장하는 도시로 만들 수 있다. 밀도는 두 층으로 설계한다. 총면적 100㎢ 가운데 60㎢를 시가화 면적으로 삼아 인구 150만 명을 배치하면 시가화 면적 밀도는 ㎢당 2만 5000명이다. 나머지 40㎢는 녹지와 수변, 장래를 위한 유보지로 남긴다. 도시 전체를 기준으로 한 밀도는 ㎢당 1만 5000명이다. 혁신이 요구하는 고밀은 시가화 면적에서 확보하고 삶의 질이 요구하는 여백은 도시 전체의 밀도에서 확보한다.
이렇게 설계된 생활권 도시는 광역 경제권과 이어지면서 완성된다. 도시의 품질은 개별 도시의 완결성과 함께 인근 도시와의 연결성에서도 나온다. 150만 명 규모의 생활권 도시 여러 개를 광역급행철도로 15분 시간거리로 연결한다. 도시 사이의 이동이 도시 안의 이동과 같은 시간거리로 해결되면 여러 도시의 인재와 기업은 하나의 상호작용 권역으로 묶인다. 이렇게 여러 도시를 하나의 대도시권처럼 작동하게 하면 500만 명과 1000만 명 규모의 대도시권이 누리는 연결의 이익도 함께 얻을 수 있다. 동시에 각 도시는 100㎢의 15분 격자와 적정 밀도를 유지하므로 대도시가 감당하는 혼잡과 주거비 부담은 여러 도시로 분산된다. 연결로 이익을 키우고 분산으로 비용을 나누는 구조가 광역 경제권 성공의 비결이다.
크기와 밀도와 연결이 도시의 골격이라면 품질은 도시의 내용이다. 필자는 7개 영역을 좋은 도시가 갖춰야 할 최소 기능의 집합으로 제안한다. 주거와 교통, 교육과 인재 육성, 산업과 일자리, 금융과 투자, 문화·예술, 소비와 일상생활, 의료와 돌봄 서비스다. 좋은 학교와 일자리는 충분한 주거와 교통 위에서 사람을 정착시키고 문화와 의료·소비는 산업과 인재가 만드는 소득 위에서 지탱된다. 도시 서비스는 그 자체로 종합예술이다. 적정한 크기와 밀도 위에 7개 영역의 품질이 겹겹이 쌓일 때 비로소 혁신적이면서 살기 좋은 도시가 만들어진다. 세계 최고 수준의 혁신성과 삶의 질을 갖춘 생활권 도시를 전국 곳곳에 만들 때 도시 공간의 희소성과 국토 불균형이 함께 풀린다.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