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박물관 발굴조사 50돌 특별전
CT 등 활용, 작업자들 이름 확인
창건기와 중수기 각각 봉안 밝혀
‘황룡사 찰주본기’가 새겨진 금동 사리함(복원품)과 사리장엄구. 국립경주박물관 제공
신라인들이 불국토의 염원을 담아 세운 황룡사 9층 목탑의 가장 깊은 곳에는 부처의 몸으로 여겨진 사리를 모셨다. 사찰의 중심인 목탑 한가운데 기둥인 심주를 받치는 돌 아래 사리를 모시는 공간인 사리공을 마련하고, 여러 유물들을 함께 묻었다. 이 사리장엄구가 1964년 도굴됐다가 2년 뒤 회수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 유물 중에는 황룡사의 내력이 적힌 ‘황룡사 찰주본기’를 비롯해 금·은제 그릇, 유리구슬 등이 있었다. 하지만 한꺼번에 회수되다 보니 원래 모습을 알 수 없었고, 이후 1970년대 정밀조사에서 발견된 것들도 상태가 좋지 않아 당시 봉안된 모습을 추정할 뿐이었다.
도굴·파손을 겪으면서 훼손된 황룡사 사리장엄구의 원래 모습의 실마리가 연구·복원을 통해 풀렸다. 사리장엄구가 목탑 창건기와 중수기에 각각 봉안됐다는 사실이 처음 확인됐다. 그동안 외함과 내함처럼 한 벌로 여겨졌던 것이 실제로는 선덕여왕 때인 646년 목탑을 세우며 사리공 전체를 금동판으로 장엄하고, 경문왕 중수기(872년)에 ‘황룡사 찰주본기’가 새겨진 금동 사리함을 새로 넣은 구조였다는 것이다.
국립경주박물관은 황룡사지 발굴조사 50주년 특별전 ‘황룡사, 부처의 사리를 모시다’에서 이 같은 연구 성과를 공개한다. 전시에는 황룡사 사리장엄구 등을 포함해 117건 322점의 유물이 나온다. 새로운 발견은 컴퓨터단층촬영(CT)과 X선 촬영, 3차원 스캔 같은 최신 과학 기법 덕분에 가능했다. 녹과 파손으로 식별이 어려웠던 문양과 글자를 확인하고, 흩어진 금동판 조각들의 원래 위치와 결합 방식을 추정해 복원한 것이다.
창건기의 핵심은 사리공 전체를 하나의 사리함처럼 꾸몄다는 점이다. 황룡사 목탑 심초석에 가로·세로 약 31㎝, 깊이 약 26㎝의 네모난 사리공이 마련됐다. 조사 결과 사리공의 벽면과 바닥, 이를 덮은 돌뚜껑 안쪽까지 금동판으로 장엄한 사실이 확인됐다. 사리공 내부 각 판에는 사리를 수호하듯 칼·창·활 등을 든 수호신(신장)을 두 명씩 새겼다.
경문왕은 목탑을 고쳐 세우면서 사리공을 열어 창건 당시 사리장엄을 확인하고 금동 사리함을 새로 넣었다. 이 사리함은 네 장의 금동판을 연결해 만든 상자 모양으로, 여닫을 수 있는 문도 달았다. 바깥면에는 금강역사상, 안쪽면에는 신장상을 새겨 사리를 지키는 의미를 담았다. 보상화무늬 등을 정교하게 새긴 뚜껑으로 덮었다. 이때 기존 사리를 그대로 봉안하면서 새롭게 사리 100과와 법사리 2종을 추가했다.
이러한 내용은 금동 사리함 안팎에 새겨진 900여자의 명문인 ‘황룡사 찰주본기’를 통해 확인된다. 관료, 승려들의 소속과 역할까지 자세히 기록하고 있다. 이번 조사에선 글자 24자와 인명 12명이 새로 확인됐다. 특히 김충·연장·청선·연창 등 작업자의 것으로 추정되는 이름을 통해 왕실뿐 아니라 수많은 기술자와 장인이 함께 참여한 국가 사업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또한 사리유리병을 안치한 ‘금은고좌’의 실체로 추정되던 금은제 연꽃 모양 받침도 성분 분석을 통해 확인할 수 있었다.
전시에선 황룡사 사리장엄구의 새로운 면모와 함께 이후 통일신라 사리장엄의 변화 양상까지 조망한다. 윤상덕 국립경주박물관장은 “당시 찰주본기는 목탑의 내력을 후대에 전하기 위해 남긴 기록이었다”며 “여러 차례의 재건과 도굴, 파손으로 흩어진 유물과 기록을 퍼즐 맞추듯 다시 읽어냈다”고 말했다. 전시는 10월11일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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