뿌리 깊은 나무는 흔들리지 않는다. 가지와 잎은 바뀐다. 때로는 더 화려한 종이 그 자리를 대신한다. 그러나 숲을 지탱하는 힘은 보이지 않는 곳에 있다. 산업도 같다. 전면에서 물러난 것처럼 보여도 기반까지 사라지지는 않는다. 한국 경제에서 조선과 전력, 원전이 그런 산업이다.
데이터센터 투자가 급증하면서 그 기반이 다시 드러난다. 인공지능(AI)과 클라우드는 서버의 문제가 아니다. 전력, 전력망, 물류, 입지가 결합된 인프라 문제다. 전력망이 핵심이다. 생산보다 전달이 중요해졌다. 전기를 만들고도 보내지 못하면 아무 의미가 없다. 경쟁의 축이 바뀌고 있다.
조선업은 그 변화를 따라간다. 선박 엔진과 발전 기술은 이미 축적돼 있다. 이를 육상 전력 인프라로 확장하고 있다. HD현대중공업의 684메가와트(MW) 설비 공급이 단적인 사례다. 조선은 더 이상 선박에 머물지 않는다. 에너지와 전력을 이동시키는 산업으로 범위를 넓히고 있다.
전력망에서는 전력기기 산업이 전면에 나온다. LS일렉트릭 등이 대표적이다. 초고압 변압기, 스위치기어, 전력 제어 시스템 등이 데이터센터의 핵심 설비로 자리 잡고 있다. 데이터센터는 전력을 많이 쓰는 산업이 아니다. 전력 품질에 좌우되는 산업이다. 순간의 변동도 허용되지 않는다. 결국 제어 기술이 경쟁력이다.
원전도 다시 언급된다. 중심은 소형모듈원자로(SMR)다. 전력 수요는 빠르게 늘지만 송전망은 따라가지 못한다. 재생에너지는 한계가 분명하다. SMR은 현실적인 대안이다. 안정성과 탄소 문제를 동시에 풀 수 있다. 두산에너빌리티는 SMR 핵심 기자재 공급망에서 존재감을 키우고 있다. 글로벌 프로젝트 참여를 확대하며 산업 생태계의 축으로 올라서고 있다. 글로벌 빅테크가 장기 전력 계약에 나서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발전과 전력망은 분리되지 않는다.
이 변화는 부활이 아닌 구조 전환이다. 과거에는 국가가 공급을 주도했다. 지금은 수요, 자본, 기술 표준이 결합된 시장이다. 같은 산업이라도 작동 방식이 달라졌다.
시사점은 명확하다. 반도체, 배터리, 플랫폼만으로는 부족하다. 전력망이 막히면 생산도 멈춘다. 데이터도 흐르지 않는다. 성장 산업과 기반 산업은 분리할 수 없다. 하나의 체계다.
리스크는 여전하다. 조선은 경기 변동에 민감하다. 원전은 정책과 수용성의 영향을 받는다. 전력망은 투자와 규제, 지역 갈등이 뒤따른다. 필요가 곧 실행으로 이어지지는 않는다.
결국은 재설계다. 조선은 해양 기반 전력 플랫폼으로 원전은 기저전력 자산이다. 전력기기는 전력망 제어의 핵심으로 재정의돼야 한다. 정책과 금융, 기술이 동시에 움직여야 한다.
디지털 전환은 겉으로는 기술 경쟁이다. 실제로는 인프라 경쟁이다. 기술은 따라잡을 수 있다. 전력망은 다르다. 축적의 시간이다. 한국은 이미 그 기반을 갖고 있다.
지금의 경쟁은 IT산업 내부의 문제가 아니다. 전력과 인프라를 둘러싼 국가 간 경쟁이다. 중심에는 전력망이 있다.
결론은 단순하다. 전기를 만들고, 보내고, 통제하는 능력이 경쟁력을 가른다.
이 기준에서 보면 방향은 분명해진다. 한국의 전력과 전력망을 배제한 채 유럽과 미국이 초대형 AI 데이터센터를 안정적으로 구축하기는 쉽지 않다. 승부는 이미 기반에서 갈리고 있다.
신종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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