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옥포엔 ‘존타입 필 댐’ 저수지 옥연지(玉淵池)가 있다
옥연지가 있는 옥포읍 기세리
열부 이야기 기록에 남아있어
강유곤 딸이자 석귀홍의 아내
남편 죽자 며칠만에 따라 죽어
주민들 힘 모아 비석 세워 추모
비슬산 자락에 자리한 용연사
신라 914년 보양화상이 창건
수계의식 행하던 ‘금강계단’
부처님 사리 모신 ‘적멸보궁’
효심에 감동한 황금잉어가 헌신하여 병치유를 결심하고 얼음을 깨고 뛰어오르는 순간. 생성형 AI 생성 이미지
운무(雲霧)속의 신비 비슬산 스케치.
◇핍박 속 눈물로 피운 ‘희생의 꽃’ 열부(烈婦)
조선 시대의 여성(女性)은 9겹의 도덕적 굴레와 남존여비(男尊女卑, 혹은 男命女伏)의 핍박 속에서도 많은 눈물을 흘리면서 인고(忍苦)한 결과물이 열부(烈婦)라는 칭호 하나 정려(旌閭) 받는 걸 가문(家門)의 영광으로 삼았다. 솔직히 말하면, “자기 가문의 딸”이라면 그렇게 할 명문가의 희생물이 되기를 과연 바랐을까? 오늘날 가치관이 아닌 당시의 윤리관에서는 존경의 대상이었다. 남존여비(男尊女卑)의 기반 위에 관존민비(官尊民卑)의 기풍을 마련하여 위정자(爲政者)로 군림(君臨)하고자 했기 때문이다.
삼강오륜(三綱五倫)의 잣대로 삼았던 열부(烈婦)에 대해서 언급하면, i) 기세리(寄世里) 진주강씨(晉州姜氏) 은열공(殷烈公) 강민첨(姜民瞻)의 후예이며, 강유곤(姜裕昆)의 딸인 열부가 있었다. 임진왜란 때 1592년 4월 인산공(仁山公) 석언우(石彦佑)를 입향조(入鄕祖)로 하는 기세리(寄世里) 충주석씨 집성촌에 석귀홍(石龜泓)의 아내였다. 나이 19세에 혼인한 뒤 3개월 만에 남편이 죽자,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예로써 지성을 다했다. 장례를 다 치르고 음식을 끊고 며칠 만에 남편을 따라 죽었다. 지역 주민들은 십시일반(十匙一飯)으로 갹출하여 비석을 세웠고, 1871년 “영남읍지(嶺南邑誌)”에 실렸다. ii) 교항리(橋項里) 밀양박씨(密陽朴氏) 박부만(朴富萬)의 딸이며, 성주이씨(星州李氏) 이광호(李光浩)의 아내였다. 본래 성품이 바르고 한결같으며 정성스럽고, 예의범절(禮儀凡節)이 엄정했다. 남편이 병들어 여러 달을 끌자, 백방으로 살피고 치료하였다. 끝내 상을 당하자, 소리 내어 통곡한 뒤에 따라 저승길을 동행했다. 1871년 ‘영남읍지(嶺南邑誌)’를 저본(底本)으로 해 1930년 청주정씨(淸州鄭氏) 정구(鄭逑)의 후손 정원호(鄭源鎬)가 증보·첨삭하여 1940년에 간행한“교남지(嶠南誌: 一名 嶠岳嶺南誌)”에 게재되었다.
◇발품 팔아 “백옥같은 진가(白玉眞價)”를 확인하라
불교신자가 아니더라도 용연사길 260번지에 있는 보물 제539호 ‘용연사 금강계단(龍淵寺 金剛戒壇)’에서 불교 수계의식(授戒儀式)을 행하는 신성한 땅에 발을 들어놓는다는 게 안양(安養, 安養淨土 혹은 西方淨土)의 첫걸음이다. 물론 용연사(龍淵寺) 경내다. 목천상씨(木川尙氏) 상희구 시인의 ‘용연사 야단법석’에서 “옥포 용연사 경내에서 야단법석(野壇法席)의 법회가 열렸는데, 오늘의 설자(說者)로는 오만가지 꽃들이 나섰다. 오늘 법회(法會)의 청중으로는 시큰둥한 뿌연 낮달과 산들산들 불어오는 산들바람과 유유히 흐르는 구름이었다. 모란(牡丹)은 화엄경(華嚴經)을 설하고, 작약(芍藥)은 금강경(金剛經)을 설하고, 금낭화(錦囊花)는 미륵삼부경(彌勒三部經)을…”
침묵 속에 소란한 법회가 열린다. 신라 914(경덕왕 3)년에 보양화상(寶壤和尙)이 동화사(桐華寺) 말사로 비슬산(毗瑟山·琵瑟山 조선왕조실록에선 비슬산(毗瑟山)이라고, 2번이나 기록되었음.) 기슭에 불교 도량을 창건했다. 1419(세종 1)년에 천일(天日) 스님이 중건했으나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다. 1603(선조 36)년에 사명대사(四溟大師)의 지원으로 탄옥(坦玉)과 경천(敬天) 스님이 중창했던 당우(堂宇)로는 극락전(極樂殿), 적멸보궁(寂滅寶宮) 그리고 나한전(羅漢殿) 등이다.
자장율사(慈藏律師)가 석가세존의 진신사리(眞身舍利)를 봉안한 석조계단(石造戒壇) 위에 수계의식(授戒儀式)을 행했던 곳이 금강계단(金剛戒壇)이다. 오늘날 금강계단(金剛戒壇)이 있었던 그 자리엔 보광루(普光樓)가 세워져 있다. 지난해 초 용연사(龍淵寺) 현장답사 메모를 보면, 용연사의 입구 산세가 개울 양 섶으로 사찰의 당우가 들어섰으며, 적별보궁 앞에는 금강계단이 있었다. 금강계단은 수계의식을 했던 곳으로 현재는 보광루(普光樓) 건물로 사용되고 있었다. 부처님의 육신과 다름없는 전신사리를 모시는 곳을 적멸보궁(寂滅寶宮)이라고 한다. 신사시대 자장율사가 중국 오대산에서 기도하신 가피력(加被力)으로 금란가사와 사리(舍利)를 모시고 돌아와서 설악산 봉정암, 영축산(양산) 통도사, 태백산 정암사, 오대산 월정사, 사자산 법흥사에다가 사리를 봉안하여 이를 5대 적멸보궁(寂滅寶宮)이라고 한다. 강원도 건봉사, 선산의 도리사와 더불어 이곳 용연사의 적멸보궁은 우리나라 8대 보궁 가운데 영남지방에 영험한 기도 도량으로 부처님의 훈향(薰香)을 느낄 수 있는 성지다. 용연사 보궁은 사명대사(四溟大師)의 제자 정진(精進) 스님이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왜적을 피해 부처님의 진심사리를 통도사에서 금강산으로 모셔 가던 중 사리 일과(一顆)를 용연사(龍淵寺)에 봉안하여 그 역사적 가치가 더 큰 곳이다(대한불교 조계종 용연사 적멸보궁 안내판).
‘하늘의 길(天道)’을 닦는 제례를 ‘천도제(天道祭)’라고 하고, 유교에서 죽은 사람의 공업(功業)을 살아있는 사람들에게 알리고자 비석을 새기는 것을 ‘신도비(神道碑)’ 라고 했다. 신도비를 세우는 것은, 중국에서 5세기 초 진송(晉宋)에서 시작해서 천자와 제후들이 신도비를 세웠다. ‘아무 황제(某帝)’ 혹은 ‘무슨 벼슬을 하신 분(某官)’신도비(神道碑)라고 새겼다. 감여가(堪輿家, 일명 風水地理家)들은 묘지 동남쪽이 ‘신도(神道, 저승으로 향하는 길)’이기에 묘지 동남쪽에 세웠다. 후한(後漢) 때는 묘 앞에 길을 트고 석주(石柱)를 세워 신도(神道)라고 했다.
조선 시대에 태조 이성계(李成桂, 1335~ 1408)의 건원릉신도비(建元陵神道碑), 세종의 영릉신도비(英陵神道碑)가 있다. 경국대전(經國大典)에 관직으로 정2품 이상을 허용했으나 오늘날 현존하는 신도비는 헤아릴 수도 없이 많다.
강림리 731의 1번지에는 이철견(李鐵堅, 1435~ 1496)의 무공을 기리는 신도비(神道碑)가 있다. 이철견 신도비(李鐵堅 神道碑)는 조선 세종 17(1435)년에 출생하여 연산군 2(1496)년에 세상을 떠난 이철견(李鐵堅)의 무공을 기리는 비석이다. 그는 본관이 경주이며, 세조6(1460)년에 무과급제, 1466년 등준시(登俊試) 합격, 훈련원 도정, 1468년 예종 즉위로 평안도절도사, 성종 즉위 후(1470년) 동지중추부사를 역임하였다. 경상도관찰사, 대사헌, 판의금부사, 도체찰사 및 도총관을 역임했다. 1493년 척신의 대간 탄핵을 받기도 했으며, 1495년 지의금부사(知義禁府事)에 복직되었다. 묘 앞에 세웠던 신도비(神道碑) 는 “양평이공신도비명(襄平李公神道碑銘)”을 홍귀달(洪貴達)이 짓고, 안침(安琛)이 전자(篆字)로 비석제목과 본문을 썼다. 연산군 2(1597)년에 관악구 봉천동 산 72번지에다가 설립하였으나, 1969년 도시계획사업으로 철거하게 되어 현존위치로 이전했다. 1995년 5월 12일에 대구유형문화재 제38호로 지정하였다. 비좌(碑座)는 화강석이고 비신과 이수는 일체인 대리석이며, 쌍용모양의 이수는 보개형(寶蓋型)으로 조선전기의 전형적인 금석자료임을 보여주고 있다.
이외에도 기세리 714(도로 기준 지번으로 옥포로 1114길 93)에 소계(小溪) 석재준(石載俊, 1866~1945)을 기리기 위해 함영계(含英契)까지 조직해 1923년 소계정(小溪亭)이라는 정자를 세웠다. 1991년에 개보수했고, 1995년 5월13일 대구시 문화재 제31호로 지정되었다. 그리고 기세리 306번지에는 14만 5,373㎥의 존타입 필 댐(John-type Fill Dam)으로 된 저수지 옥연지(玉淵池)가 있다.
‘옥포 용연사 못(玉浦龍淵寺池)’를 줄여서 옥연지(玉淵池)로 호칭했다. 1942년 4월 10일 필 댐(Fill Dam)으로 확정해 공사를 시작했으나 1945년 8월 15일 해방 이후 무정부 상태로 중단, 6·25전쟁 이후에 재개해 1964년 12월 30일에 준공했다. 당시까지 총사업비는 3천417만9천 원이었다.
“송해 국민 오빠”의 인기를 등에 업고, 6·25전쟁 때 통신병으로 근무했던 송해(宋海, 1927~ 2022)와 기세리(奇世里) 출신 석옥이(石玉伊) 씨가 결혼한 인연으로, 1983년 옥연지(玉淵池)가 보이는 곳에 미리 장지(葬地)를 마련했다. 이런 사연으로 ‘송해공원(宋海公園)’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글·그림=이대영 코리아미래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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