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 지방선거 투표용지 부족 사태를 규탄하며 재선거를 요구하는 ‘잠실 개표소 봉쇄 시위’가 계속되고 있는 8일 서울 송파구 올림픽공원 핸드볼경기장 출입구 앞에서 참가자들이 구호를 외치고 있다. /연합뉴스
막을 내린 6·3 지방선거의 후폭풍이 거세다. 전국 수십 곳 투표소에서 발생한 투표용지 부족 사태를 두고 대학가가 연일 규탄 성명을 내고 있기 때문이다. 표면적으론 선거 관리 부실에 대한 분노이지만, 본질은 청년층의 최우선 가치인 ‘공정’이 훼손됐기 때문이라는 시각도 적잖다. 수년간 이어진 ‘2030 보수화’와 무관치 않다는 해석도 내놓고 있다.
◇들끓는 대학가…‘공정’이 훼손됐다
청년들이 들고 일어섰다. 지난 4일부터 송파구 잠실7동 투표소의 투표함이 이송된 올림픽공원 개표소 근처에선 6·3 지방선거 참정권 침해에 항의하는 집회가 이어지고 있다. 집회는 20·30대 청년들이 주도하고 있다.
대자보(大字報)도 잇따라 나오고 있다. 웹 사이트 ‘한 표의 기록’에 따르면 이날 기준 전국 206개 대학에서 성명 또는 시국선언을 냈다. 전남대와 조선대, 국립목포대 등 광주·전남 대학들도 다수 이름을 올렸다.
이들이 행동에 나선 이유는 청년층이 가장 중요시 여기는 ‘공정’의 가치가 훼손됐기 때문이다. 선관위 잘못으로 모든 유권자가 동등한 투표 기회를 보장받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이른바 ‘부정선거 논란’이나 정쟁 확산에는 분명히 선을 긋고 있다. 자칫 정치적 색깔이나 이념에 본인들의 순수한 의도가 오염될 수 있다는 우려로 읽힌다.
신율 명지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선거라는 가장 기본적인 주권 행사 과정에서 발생한 행정 실패"라며 "공정을 최우선 가치로 꼽는 미래세대의 역린을 건드린 꼴"이라고 평가했다.
청년 세대가 이토록 ‘공정’에 민감해진 이유는 처한 현실과 무관하지 않다는 분석이다. 대학 입시부터 취업, 주거까지 삶의 모든 영역에서 경쟁이 치열해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노력만으로 삶이 나아질 것이라는 기대는 점점 희미해지고 있고, 취업난은 여전하며 집값은 치솟고 있다. 국민연금 고갈이나 지방소멸에 대한 불안도 커지고 있다. 더 나은 삶을 향한 사다리가 걷어 차여질 불안감이 커지고 있다는 얘기다.
결국 청년들은 최소 경쟁만큼은 공정해야 한다고 요구하는 것이다. 정치권의 특혜 의혹이나 ‘내로남불’ 논란에 유독 민감하게 반응하는 이유도 같은 맥락에서다.
◇지선 투표율에서도 드러난 ‘공정’의 가치
청년층의 공정함을 향한 민감한 반응은 최근 선거 결과에서도 드러난다. 정치권은 이를 ‘2030 보수화’로 해석하지만, 청년층 입장에서는 공정과 기회, 보상을 기준으로 정치권을 평가한 결과에 가깝다는 분석도 나온다.
2018년 지방선거만 해도 민주당은 청년층의 압도적인 지지를 받았었다. 당시 민주당 광역단체장 당선자들은 20대에서 평균 73.1%, 30대에서 78%의 지지를 얻었다. 지금의 2030세대는 원래부터 보수 정당을 지지했던 세대가 아니라, 민주당에도 큰 기대를 걸었던 세대라는 의미다.
그러나 2020년을 전후해 분위기가 달라졌다. 이른바 ‘조국 사태’와 ‘LH 사태’ 등이 대표적인 계기로 꼽힌다. 청년층에게는 모두 공정이 훼손된 사건으로 받아들여졌기 때문이다. 이후 부동산 문제와 취업난, 성별 갈등 이슈 등이 겹치며 실망감이 누적됐다는 분석이 나온다. 최근 증시 호황이나 민생 경제 회복 정책 등에도 청년층 민심이 쉽게 움직이지 않는 배경으로도 거론된다.
이 같은 흐름은 최근 선거에서도 확인됐다. 이번 지방선거 출구조사에서 오세훈 서울시장은 20대 이하 여성에게서 41.4%, 30대 여성에게서 53.6%의 지지를 얻었다. 과거처럼 2030 남성만이 아니라 여성 표심까지 이동했다는 점에서 정치권에도 적지 않은 충격을 안겼다.
청년층이 더 이상 전통적인 진보·보수 이념 구도가 아니라 주거와 일자리, 복지 등 자신의 삶에 직접 영향을 미치는 ‘실용적 가치’ 중심으로 정치권을 평가하고 있다는 해석도 가능하기 때문이다.
올해 선거 과정에서 불거진 스타벅스 불매운동 논란 역시 비슷한 맥락으로 읽힌다. 기업에 대한 비판은 가능하지만 정부와 정치권이 사기업을 압박하는 모습에는 거부감을 느끼는 청년층이 적지 않았다는 것이다. 여기에 특검 추진 논란과 정치권의 강경 발언 등도 일방적 국정 운영에 대한 반감을 자극했다는 평가가 나온다. 후보 등록 마감 직전까지는 민주당 압승 전망이 우세했지만, 선거 막판 분위기가 달라진 배경으로도 이러한 정서가 거론된다.
한국사회여론연구소(KSOI) 관계자는 "20대는 더 이상 이념에 따라 움직이는 세대가 아니라 자신의 이해관계와 현실 문제를 중심으로 판단하는 세대"라며 "청년층이 보수 성향으로 굳어졌다기보다 이념보다 실용에 따라 움직이는 스윙보터 성향이 강해졌다고 보는 것이 더 정확하다"고 분석했다.
◇"왜 또 우리를 혼내려 하나"…갈길 먼 인식
문제는 이런 청년층의 변화를 바라보는 정치권의 시선이 여전히 틀에 박혀 있다는 점이다. 청년들은 공정과 기회의 문제를 이야기하는데 정치권은 이를 보수화 또는 극우화라는 틀로 해석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는 것이다.
최근 친민주당 성향 유튜브 방송인 ‘매불쇼’에서 2030 보수화 현상을 다루며 나온 일부 발언이 논란이 된 것도 같은 맥락에서다. 방송에서는 인터넷상 특정 극우 집단을 향해 강경 대응이 필요하다는 취지의 발언이 이어졌고, 일부 출연자는 사실상 ‘박멸’ 수준의 대응을 언급하기도 했다.
발언 자체는 특정 극우 커뮤니티 이용자만을 한정해 이뤄진 것이긴 했으나, 온라인에서는 "이해보다 훈육하려 한다"는 반발이 이어졌다. 청년층의 선택 이유를 분석하기보다 교정과 계도의 대상으로 바라본다는 비판이다.
정치 성향이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보수 유권자들이 ‘일베’ 등으로 낙인찍혔던 경험이 누적된 것도 이런 반응에 영향을 미쳤다는 분석이 나온다.
결국 투표용지 논란에서 터져 나온 대학가의 분노는 단순한 선거 관리 부실 항의만은 아니라는 해석이 나온다. 왜 청년 세대가 공정에 민감하게 반응하는지, 왜 기존 정치권에 실망했는지, 왜 최근 표심 변화가 나타나는지를 보여주는 수많은 단면 중 하나라는 것이다.
안일원 리서치뷰 대표는 "현재의 청년들은 어린 시절 광우병 쇠고기, 세월호·촛불혁명을 경험하며 정치적 효능감을 얻은 세대"라며 "그러나 2018년 민주당 정권에 상당한 기대를 걸고 압도적 지지를 보냈음에도 철저한 배신감으로 바뀌면서 돌아선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어 "지금의 변화를 단순히 보수화로 규정할 것이 아니라 왜 기대했던 세대가 등을 돌리게 됐는지를 먼저 살펴봐야 한다"고 말했다.
/임지섭 기자 ljs@namdo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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