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일 오후 ‘스타벅스 응원 구호’로 물의를 빚은 서울 배재고등학교 학생들이 사과를 위해 광주제일고등학교를 방문한 뒤 곧바로 국립5·18민주묘지를 찾아 오월 영령들에게 헌화했다. /윤태민 기자 ytm@namdonews.com
"마음에 큰 상처를 입으신 광주시민과 광주일고에 진심으로 사과드린다."(서울 배재고 야구부 주장)
"고개 들고 어깨 펴라. 여러분의 미래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이규연 광주제일고 교장)
6일 오후 3시께 전남광주 북구 광주일고 대강당. 사과문을 읽던 배재고 야구부 주장의 목소리가 몇 차례 떨렸다. 준비해 온 종이를 두 손으로 꼭 쥔 채 고개를 숙인 선수는 "꿈과 희망이 담겨야 할 야구장에서 저희의 부적절한 언행으로 광주제일고 선수들과 학부모, 광주시민에게 큰 상처를 드렸다"며 연신 "죄송하다"라는 말을 반복했다.
일주일 전 전국을 뒤흔든 ‘5·18 민주화운동 조롱 응원’ 파문 이후 처음으로 광주를 찾은 자리였다.
사과문이 끝난 뒤에도 배재고 선수들은 쉽게 고개를 들지 못했다. 경기장의 승패를 넘어 역사와 지역사회의 아름을 건드린 행동이었다는 사실을 뒤늦게 마주한 듯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배재고 선수단은 "이번 일을 통해 야구보다 더 중요한 것이 인성과 태도라는 사실을 깨달았다"며 "같은 선수로서 결코 있어서는 안될 행동이었다. 평생 반성하는 마음으로 살아가겠다"고 밝혔다.
6일 배재고등학교 야구부가 광주제일고등학교를 찾아 사과를 한 가운데 이효준 배제고 교장이 사과의 말을 전하던 중 눈물을 훔치고 있다. /광주전남공동취재단
지도자의 책임도 뒤따랐다.
배재고 야구부 감독은 "학생들을 제대로 가르치지 못한 책임은 지도자인 제게 있다"며 "승패에만 집중한 나머지 잘못된 응원 구호를 즉시 제지하지 못했다는 어떤 설명도 변명이 될 수 없다"고 말했다.
이어 "학생들의 잘못 이전에 지도자로서의 제 역할을 다하지 못했다"며 "교육자로서 져야 할 책임을 끝까지 감당하겠다"고 거듭 사죄했다.
이효준 배재고 교장도 "광주학생독립운동과 5·18 정신을 잊지 않고 교육해 왔지만 이번 일로 많은 분께 상처를 드렸다"며 "깊이 사과드리며, 아픔을 씻고 통합과 화합의 미래로 나아가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고 말하며 끝내 울먹였다.
사과를 들은 광주일고는 질책 대신 용서를 건넸다.
조윤채 광주일고 야구부 감독은 "사람은 누구나 실수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잘못을 인정하고 반성하는 것"이라며 "앞으로 그라운드에서 다시 만나더라도 정정당당하게 승부하며 서로 존중하는 모습으로 성장해 주길 바란다"고 말했다.
이어 마이크를 잡은 이규연 광주일고 교장은 고개를 숙인 채 서 있는 배재고 학생들을 바라보며 조용히 말했다.
"이제 고개를 드십시오."
순간 대강당은 적막에 휩싸였다.
이 교장은 "다음에 광주일고 학생들과 다시 만나면 정정당당하게 멋진 승부를 펼치는 것이 여러분이 보여줄 가장 큰 사과"라며 "이번 일을 계기로 두 학교가 더욱 성장하고 화합하는 계기가 됐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배재고등학교 야구부 선수단이 6일 오후 광주 국립 5.18민주묘역을 방문해 참배하고 있는 모습. /윤태민 기자 ytm@namdonews.com
이날 사과 자리에는 정근식 서울시교육감도 함께했다.
정근식 교육감은 "이번 일로 상처받은 모든 분께 서울교육을 대표해 깊이 사과드린다"며 "오늘의 사과가 끝이 아니라 학생들이 민주주의와 인권의 가치를 배우고 올바른 시민으로 성장하는 교육적 회복의 출발점이 되도록 하겠다"고 밝혔다.
이어 "학교 스포츠는 승패만 겨루는 공간이 아니라 서로를 존중하고 책임을 배우는 교육의 장"이라며 "학생들이 자신의 행동이 타인에게 얼마나 큰 상처를 줄 수 있는지 깊이 성찰하도록 지도하고, 공정과 존중이 살아 있는 학교 스포츠 문화를 만들어 가겠다"고 강조했다.
광주일고 방문을 마친 배재고 선수단과 학부모, 학교 관계자들은 곧바로 국립5·18민주묘지를 찾았다.
하얀 긴팔 교복을 입은 학생들은 묵묵히 국화를 받아 들고 묘역으로 향했다. 영령들이 잠든 묘비 앞에 꽃을 내려놓은 뒤 한동안 고개를 숙인 채 말을 잇지 못했다. 묘역을 감싼 고요함 속에서 학생들은 자신들의 행동이 남긴 상처와 역사의 무게를 되새기는 듯했다.
참배를 마친 정 교육감은 이번 방문이 단순한 사과를 넘어 교육적 성찰의 출발점이 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정 교육감은 "학생들이 민주주의와 인권, 상생의 가치가 깃든 이곳에서 역사의 무게를 느끼며 자신의 행동이 타인에게 준 상처를 깊이 성찰하는 시간을 가졌다"며 "부끄러움을 알고 잘못을 뉘우치는 것에서 진정한 배움과 성장이 시작된다"고 말했다.
이어 "광주일고를 직접 찾아 진심으로 사과하고 이를 포용해 준 모습은 우리 교육에서 매우 뜻깊은 장면이었다"며 "잘못을 인정하는 용기와 이를 품어주는 연대의 정신이야말로 학생들이 평생 간직해야 할 민주시민의 가치"라고 강조했다.
배재고와 서울시교육청 관계자들이 광주일고 관계자들에게 사과의 뜻을 전하며 악수하고 있다. /윤태민 기자 ytm@namdonews.com
이에 김대중 전남광주통합교육감은 "학생은 배우는 존재인 만큼 이번 일을 계기로 역사교육과 민주시민교육을 더욱 강화하겠다"며 "2029년 광주학생독립운동 100주년을 앞두고 배재고와 광주일고가 다시 만나 야구를 비롯한 스포츠 교류를 통해 화합의 장을 만들었으면 한다"고 제안했다.
김 교육감은 "오늘의 사과와 화해가 두 학교만의 일이 아니라 대한민국 학생들에게 큰 울림을 주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며 "같은 잘못이 반복되지 않도록 함께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한편, 이번 광주 방문은 지난달 청룡기 전국고교야구대회 경기에서 배재고 응원석 일부 학생들이 ‘탱크데이’ 등 5·18을 연상시키는 구호를 외쳐 거센 비판을 받은 지 일주일 만에 이뤄졌다.
/윤태민 기자·서강원 수습기자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