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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기고]정원을 가꾸듯, 외교를 가꾸며

1994년, 설레는 마음으로 외교부에 첫발을 내디뎠을 때 우리 사회의 시대정신은 ‘세계화’였다. 국력은 지금보다 약했지만 외교관들의 가슴속엔 세계를 향한 부국의 꿈과 희망이 가득했다. 드넓은 세계무대에서 대한민국이 뻗어나갈 길을 찾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뛰던 시절이었다.

[기고]정원을 가꾸듯, 외교를 가꾸며

◇권세중 전 트리니다드토바고 대사·위싱턴총영사

1994년, 설레는 마음으로 외교부에 첫발을 내디뎠을 때 우리 사회의 시대정신은 ‘세계화’였다. 국력은 지금보다 약했지만 외교관들의 가슴속엔 세계를 향한 부국의 꿈과 희망이 가득했다. 드넓은 세계무대에서 대한민국이 뻗어나갈 길을 찾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뛰던 시절이었다.

30여 년이 흐른 지금, 세계는 완전히 달라졌다. 자유무역과 국제협력을 이끌었던 세계화의 시대는 멀어지고, 냉혹한 각자도생의 시대가 열렸다. 미·중 전략경쟁과 지정학적 위기, 공급망 재편 속에서 AI와 첨단기술은 국가 경쟁력의 지도마저 바꾸고 있다. 이제 외교는 단순한 국익 확보를 넘어 국가의 생존전략이 되었다.

대한민국 역시 원조를 받던 나라에서 글로벌 규범을 선도하는 중견국으로 우뚝 섰다. 그러나 ‘외교의 중요성이 커진 만큼 외교부의 역할도 그에 걸맞게 성장했는가’라는 질문 앞에서는 여전히 마음이 무겁다. 외교는 이제 외교부만의 전유물이 아니다. 산업과 정부 부처, 지방정부와 기업, 시민사회가 모두 의미있는 주체다. 그렇기에 외교부는 가능한 최대한의 결과를 도출하기 위해 국가의 모든 역량을 하나로 모으고 다듬는 통합과 조정의 중심, 즉 국가경영(Statecraft)의 진정한 전략본부가 되어야 한다.

외교 현장에는 “외교는 정원을 가꾸는 일과 같다”는 오랜 격언이 있다. 정원은 하루아침에 만들어지지 않는다. 계절의 변화에 맞춰 물을 주고, 가지를 다듬고, 잡초를 뽑아내는 지난한 수고가 더해질 때 비로소 꽃을 피운다. 화려한 정상회담보다 중요한 것은 눈에 띄지 않는 곳에서 쌓아가는 신뢰의 씨앗이다.

이 정원사의 마음은 국가외교를 수행하는 최전선인 재외공관이라는 조직을 이끌 때도 마찬가지였다. 최근 재외공관은 수평적 소통과 개인의 존엄을 중시하는 건강한 조직문화로 나아가는 전환기를 맞고 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발생하는 다양한 갈등과 진통 역시 외면할 수 없는 불편한 현실이다. 얽힌 타래를 푸는 해법은 처벌을 늘리는 데에만 있지 않다. 공관장의 리더십과 관리역량을 세심하게 가꾸고, 공정한 조정 시스템을 구축하며, 소양과 역량 있는 직원 선발과 함께 세대 간의 신뢰를 회복하는 데 있다. 잡초를 솎아내듯 갈등을 대화로 풀어낼 때 조직은 비로소 건강한 숲을 이룬다. AI 기술이 아무리 눈부시게 발전해도, 상대를 설득하고 신뢰를 가꾸는 일은 오직 온기를 가진 ‘사람’만이 할 수 있기 때문이다.

타향과 국경을 넘어 세계 곳곳을 누비는 동안에도 내 마음의 남향(南向) 창문은 언제나 고향 강원도를 향해 있었다. 태백산맥의 웅장함과 동해의 푸른 바다는 타국에서 외로울 때마다 내가 누구인지 알려주는 정체성의 이정표였다.

사람들은 흔히 강원도를 변방이라 부르지만, 외교관의 눈으로 바라본 강원도는 언제나 한반도의 미래를 가장 먼저 마주하는 곳이었다. 분단과 평화가 공존하는 접경지역이자 동북아 협력의 문턱이기 때문이다. 2018년 평창동계올림픽은 그 위대한 가능성을 전 세계에 증명해 보인 순간이었다. 비록 그 온기가 항구적 평화로 온전히 이어지지 못한 아쉬움은 깊이 남아도, 평창이 뿌린 평화의 씨앗까지 사라진 것은 아니다. 정원사가 그러하듯, 씨앗을 심는 사람과 열매를 거두는 사람은 다를 수 있다.

앞으로 강원도가 접경지역이라는 운명을 불안이 아닌 기회로 바꿔가길 소망한다. 산림과 환경, 기후변화, 문화와 청년교류처럼 긴장이 낮은 곳부터 차근차근 협력의 토양을 만들어가야 한다. 지방정부 또한 글로벌 감각을 갖춘 공공외교의 주체로서 독자적인 국제협력 모델을 가꾸어 나가야 할 때다.

평생을 바친 정든 일터를 떠나며 두 가지 작은 소망을 품어본다. 대한민국 외교부가 모든 국력을 지혜롭게 모아내는 든든한 버팀목이 되는 것, 그리고 내 고향 강원도가 한반도 평화의 씨앗을 뿌리고 그 싹을 온화하게 보듬고 열매를 맺을 수 있도록 관리해 나가는 세계 일류 정원사가 되는 것이다.

정원은 한 세대가 심고, 다음 세대가 가꾼다고 한다. 오늘 우리가 심는 신뢰와 평화의 씨앗이 내일 당장 만개하지 않을지라도, 누군가는 먼저 일어나 흙을 만지고 묵묵하게 정원을 가꾸어야 한다. 그것이 외교이고, 내가 강원도의 아들로 태어나 32년 외교관의 길을 걸으며 얻은 가장 소중한 교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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