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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기고]울산 사람 외솔 최현배의 애향가

일반적으로 나라의 큰일을 한 사람은 고향을 위해 힘을 써 줄지언정 계속 애정을 가지고 발걸음하기란 어려운 법이다. 고려 김취려 장군, 조선 이예 선생은 각자 조정에서 고관을 지냈지만, 울산에 대해 남긴 글은 없는 듯하다.

[기고]울산 사람 외솔 최현배의 애향가

▲ 김상육 울산 중구 부구청장

일반적으로 나라의 큰일을 한 사람은 고향을 위해 힘을 써 줄지언정 계속 애정을 가지고 발걸음하기란 어려운 법이다. 고려 김취려 장군, 조선 이예 선생은 각자 조정에서 고관을 지냈지만, 울산에 대해 남긴 글은 없는 듯하다. 최현배(1894~1970) 선생과 함께 울산의 근현대 인물을 대표하는 박상진(1884~1921) 의사는 너무 젊은 시절 희생되는 바람에 고향 일에 참여할 시간을 갖지 못했다. 독립운동의 방향이 달라 누가 더 위대했는가를 비교할 수는 없다. 하지만 지금 상황에서 보면 외솔이 남긴 방대한 저서들의 영향력이 더욱 크다고 볼 수 있다.

선생의 3대 저작으로는 <조선민족갱생의 도> <우리말본> <한글갈>을 꼽는다.

하지만 철학, 문학, 역사 등 다른 인문학 분야에도 고루 능했다. 그리고 서울에서 독립운동을 하고, 해방 후 사회활동을 하면서도 고향과의 끈을 놓지 않았다.

그 배경에는 가족사가 있는 듯하다. 선생 부처가 모두 작고한 직후 소개된 <주간여성> 기사에 따르면 선생은 15세에 4살 연상의 경상도 아내, 이장련 여사와 결혼했다. 아마 울산이나 경주, 또는 언양 출신이었을 듯하다. 어쨌든 선생은 결혼 후 어머니 봉양을 아내에게 맡기고 상경해 신학문을 배웠다. 이후 히로시마와 교토에서 유학했기 때문에 신여성을 만날 기회가 있었을 텐데, 선생은 여사와 끝까지 가정을 지켰다. 그 결과 화목한 가정이 유지되었고, 지금까지 후손들이 외솔회와 세종대왕기념사업회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하는 등 사회적으로 모범을 보여주고 있다.

해방 후 선생은 한글 정책을 더 힘 있게 펼치고자 1950년 국회의원 선거에서 울산 지역구에 무소속으로 도전했으나 낙선했다. 하지만 학자로서의 길을 계속 걸어가면서 이룬 성과를 생각하면 이 일도 새옹지마다. 국회의원으로 밀어 주지는 않았지만, 고향 울산은 현안이 있을 때마다 선생에게 이런저런 부탁을 했다. 선생의 권위가 필요할 때면 중요한 글을 부탁했다. 1960년에는 보도연맹사건 희생자를 위한 글을 썼다. 이 글은 현재 약사동 한국전쟁민간인희생자위령탑 <6·25사변당시민간인희생자합동묘비>에 새겨져 있다. 1964년에는 <고향의 노래>라는 시조를 지었다. 17세에 고향을 떠나 70세에 다시 돌아와 허물어진 동문루와 망월루를 보며 회상에 잠기는 내용이다. 1967년에는 병영 삼일사(三一祠)의 <삼일충혼비> 비문을 썼고, 또 <삼일사의 노래>를 지었다.

선생의 울산 사랑을 가장 잘 표현한 글은 2000여 글자 길이의 <내 고장의 자랑(울산풍물)>이다. "동대산, 무룡산의 준령이 동병(東屛)이 되고 운문산, 석남산의 고맥(高脈)이 멀리 서병(西屛)이 되어, 그 안에 동천, 태화강의 이대천류(二大川流)를 포용하니"로 글을 열고 "오늘의 번영이 인구는 자꾸자꾸 늘어가고 물산은 더욱더욱 불어가며 문화의 기회는 날로 늘고 교통도 해로 열리니 그 장래의 발전은 가히 앉아서 볼 것이다"라는 희망으로 마무리했다. 1941년 <춘추>에 처음 게재됐고, 이후 더 다듬은 유고를 남겼는데, 1983년 울산문화원 <울산문화> 창간호에 실렸다.

선생에 대한 평가와 재조명은 계속될 것이다.

고향 울산이 먼저 호응했다. 주시경 선생에 대한 기념관이 없는 상황에서 한글학자를 기리는 기념관은 외솔기념관이 최초이다. 선생 자신이 한글을 있게 한 선조들을 기리는 데 앞장섰다. 선생은 생전 세종대왕기념관을 짓기 위해 노력했고 소천 직전 착공을 할 수 있었다. 또한 1960년 스승 주시경 선생의 묘를 이장하며 묘비명을 썼다. 지금 그 묘비는 세종대왕기념관 뜰에 있다.

일본에서도 선생은 연구 대상이다. 조선통신사 한일우정걷기 사절단에 참여하는 일본인들이 병영을 지날 때면 외솔기념관에 들러 선생의 업적에 많은 관심을 기울인다. 선생은 교토제국대에서 철학과 교육학을 공부했는데, 그래서 선생이 교토학파의 영향을 받았다고 보는 시각도 있다. 하지만 선생은 서양사상을 극복하는 동아시아의 근대성이라는 논리 이전에, 스스로 말했듯이 천상 조선인 울산 병영 사람이었다. 한류와 함께 한글이 세계의 주목을 받고 있다. 한글과 울산의 오늘을 만든 인물들에 대해 보다 많은 관심이 필요하다.

김상육 울산 중구 부구청장

경상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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