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화숙 대한가정학회장·울산대 디자인융합학부 교수
화창한 봄날이다. 이맘때면 경남 양산 원동 매화마을은 흐드러진 분홍빛 꽃잎의 달콤한 매화향이 그득하다. 길을 나섰다. 운전석에 앉아 ‘자동적으로’ 티맵(TMAP) 앱을 켰다. 도착지를 입력하면서 ‘여러 번 가 본 곳인데 티맵 없이 간다면 잘 찾아갈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꽃구경을 하고 출출해 휴대폰으로 맛집을 검색했다. 검색창에서 안내하는 여러 곳의 맛집 중 한 곳에서 식사를 했다.
이처럼 우리 일상 전반에 AI가 자리하고 있다. 이제 AI는 인공지능이라고 하는 기술의 한 분야로서가 아니라, 우리 생활을 지배하고 있는 ‘통치자’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진화했다. 기업에서는 알고리즘이 직원을 평가하고, 플랫폼이 살 물건을 추천하며, 작곡도 하고 그림도 그려준다. AI에 의해 인간 삶의 많은 영역이 자동화되고, 결국 인간은 점점 ‘데이터 객체’로 취급될 위험에 처해 있다. 이와 같은 AI 사회에서 인간이 인간다움을 지켜낼 수 있는 공간은 어디일까? 그곳은 바로 ‘가정’이다.
지난 21일은 ‘세계 가정학의 날’이다. 국제가정학회(IFHE) 및 아시아가정학회(ARAHE)가 1982년 제정했다. 인간의 일상생활과 삶의 질을 다루는 학문인 가정학(Home Economics)의 사회적 의미를 되새겨 건강한 가정을 만드는 데 기여하겠다는 취지다. 지금은 ‘생활과학대학’이라고 명칭이 바뀐 ‘가정대학’에서 공부한 필자에게 가정학은 학문의 뿌리라는 생각에 애착이 간다. 그러면서 AI와 디지털 기술이 세상을 바꾸고 있는 오늘날, ‘가정과 가정(생활과학)학은 어떤 의미가 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AI는 인간의 능력을 확장하고 효율성을 중시한다. 이에 반해 가정은 가족 구성원이 실패해도 비난하지 않고, 생산성과 효율을 고려하지 않으며, 인간을 인간으로 받아들인다. 이런 의미에서 가정은 AI 사회에서 인간성을 지키는 최후의 보루이다.
AI는 철저하게 합리적이고 계산적이다. 그러나 인간의 삶에는 비합리적이고 계산할 수 없는 것들이 많다. 피곤해도 늦게 귀가하는 식구를 기다린다거나, 자녀의 의미 없는 낙서를 보존하기도 하고, 배고파도 배부르다고 거짓말을 하기도 한다. 이는 비합리적이며, 계산적인 행동이 아니다. 오히려 인간의 삶을 더 인간답게 만드는 요소이다. 가정은 이렇게 합리적이지 않은 사랑과 헌신이 존재하는 공간이다. 점점 개인화되고 공동체가 약화되는 AI시대에 이런 비합리성은 오히려 더 의미 있고 중요해진다.
아주 오래전에는 집과 일터가 분리되지 않은 채 가까운 곳에 위치했으나, 산업화 시대에 들어서면서 직장과 집은 분리돼 직장은 일터, 집은 휴식 공간으로 구분됐다. 그런데 AI시대가 되면서 재택근무, 온라인을 통한 교육과 쇼핑 등이 확산돼 산업화 이전 시대와 비슷한 상황이 되고 있다. 집이 다시 생활의 중심 공간으로 되면서 가정도 다시 인간 삶의 중심이 되고 있다.
AI는 계산과 자동화를 통해 효율을 높이지만, 인간의 생활은 효율성만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AI가 세상을 바꿀수록 인간의 삶을 지탱하는 것은 기술이 아니고 생활이며, 그 생활의 중심에는 ‘가정’이 자리 잡고 있다. 이러한 ‘가정’을 연구 주제로 다루는 학문이 ‘가정학’이다.
AI와 디지털 기술이 생활 전반에 영향을 미치면서 삶의 방식이 변하고 있는 지금의 기술 중심 사회에서 기술이 생활에 어떻게 영향을 미치는지, 그리고 그것이 삶의 질을 어떻게 향상시키는지를 이해하려면 인간의 생활구조를 연구하는 학문이 필요하다. 이때 가정학은 기술 중심이 아니라 생활 중심에서 기술을 바라보는 관점을 제공한다.기술과 생활의 관계, 디지털 환경 속에서 가족 관계 등을 연구함으로써 인간다운 삶의 균형을 유지하는 방향을 제시한다.
AI가 세상을 바꿀 수는 있지만 인간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결정할 수는 없다. AI가 세상을 점점 예측 가능한 것으로 만들고 있지만 인간의 삶은 여전히 예측 불가능하다. 이러한 인간 삶의 특성이 가장 강하게 남아 있는 곳이 바로 ‘가정’이다. 결국 AI시대에 가장 AI적이지 않은 공간으로, AI에 의해 설명되지 않는 복잡한 시스템은 ‘가정’이 될 것이고, 따라서 이를 연구하는 ‘가정학’은 이런 측면에서 매우 중요한 학문이라고 판단된다.
AI시대에도 가정은 여전히 중요한 사회적 기반이며, 기술을 올바르게 활용할 수 있는 인간적 가치와 판단력을 길러주는 교육의 장으로서, 특히 인간 중심 가치 형성, 기술과 삶의 균형 유지, 공동체적 관계 유지, 새로운 생활 문화 창출이라는 역할을 수행할 것이다. 그래서 ‘가정’과 ‘가정학’은 AI시대에 AI가 할 수 없는 일들을 해낼 수 있을 것이다. AI시대가 고도화될수록 우리 인류 삶의 바탕인 가정을 건강하게 만드는 ‘가정학’에 관심이 필요하다. 유화숙 대한가정학회장·울산대 디자인융합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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