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사모신용 시장에서 촉발된 유동성 경색 조짐이 한국 금융시장에도 적지 않은 파장을 예고하고 있다. 글로벌 자금 흐름이 위축될 경우 국내 증시는 외국인 자금 이탈 압력에 직면할 수 있고, 기업 자금조달 환경 역시 빠르게 경색될 가능성이 크다.
특히 은행권과 보험·연기금의 해외 대체투자 비중이 높은 상황에서, 사모신용 부실이 현실화될 경우 평가손실과 투자심리 위축이 동시에 발생할 수 있다는 점에서 한국 금융시장도 결코 안전지대가 아니라는 분석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실제로 올해 들어 미국 금융시장의 가장 큰 불안 요인은 금리도, 이란전쟁도 아닌 ‘사모신용(private credit) 펀드’에서 시작되고 있다는 외신 보도가 많아지고 있다. 월가를 대표하는 대형 운용사들이 일제히 투자자 환매 요청 급증이라는 공통된 문제에 직면하면서, 사실상 ‘유동성 경색’이 현실화되는 양상이다.
지난 23일(현지시간) 로이터통신의 ‘아폴로 사모펀드, 투자자 인출 요청 급증에 따라 인출 한도 제한’ 기사에 따르면, 250억 달러 규모의 사모신용 펀드인 아폴로 데트 솔루션(ADS)은 이날 투자자들이 전체 주식의 약 11.2%를 인출하려 하자 환매 규모를 5%로 제한하는 조치를 취했다. 투자자들은 요청한 자금의 절반에도 못 미치는 약 45%만 돌려받는 상황이다.
이로 인해 사모 대출에 대한 신뢰도 균열이 확대되고 있다. 펀드 측은 투자자들이 요구한 것보다 적은 금액을 되사기로 한 결정은 유동성 확보, 즉 자산 가치를 손상시키지 않고 지급 의무를 이행할 수 있는 능력이라는 목표와 일치한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이같은 펀드 측의 성명 발표 후, 9,300억 달러 이상을 운용하는 아폴로의 주가는 시간외 거래에서 2.6% 이상 하락했다. 이 주식은 다른 대체 자산 운용사들의 하락세와 유사하게 올해 들어 23일 현재까지 23% 이상 하락했다.
지난 6일(현지시간) 주요 외신에 의하면, 세계 최대 자산운용사인 블랙록(BlackRock) 역시 대표 사모신용 펀드인 HPS 기업 대출 펀드(HLEND)에서 12억 달러 규모의 환매 요청이 몰리자 지급액을 절반 수준으로 제한했다.
HLEND는 1분기에 12억 달러 규모의 환매 요청을 받았는데, 이는 순자산 가치의 약 9.3%에 해당한다. 펀드 측은 분기별 환매 프로그램에 따라 6억 2천만 달러를 분배할 것이라고 투자자들에게 알렸다. 운용사가 추가 환매를 제한할 수 있는 5% 한도에 도달한 것이다.
HLEND는 5% 제한 조치가 "투자자 자본과 HLEND가 투자하는 사모대출의 예상 만기 사이의 구조적 불일치를 방지한다"고 해명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날 블랙록 주가는 뉴욕 증시에서 6.7% 하락했다. 이는 예상보다 저조한 미국 고용 지표와 미국과 이스라엘 간의 이란 전쟁 격화로 인한 시장 전반의 매도세에 따른 것이라는 분석을 낳았다.
하지만 최근 몇 달 동안 사모대출에 대한 투자 심리가 악화됐다는 사실에 주목하는 의견도 만만치 않다. 부유한 개인을 대상으로 설계된 블랙록의 260억 달러 규모 HPS 기업 대출 펀드(HLEND)와 같은 펀드에서 투자금 환수를 요구하는 사례가 늘고 있다는 지적이다.
Ares Management, Morgan Stanley 등도 유사하게 11% 안팎의 환매 요청을 받았지만 실제 지급은 5% 수준으로 제한했다.
지난 17일(현지시간) 로이터 등의 보도에 따르면, 사모대출 시장의 긴장감은 월가에 확산되고 있다. 이로 인해 일부 주요 미국 은행들은 대출 기준을 강화했고, 펀드들은 자금 인출을 제한했다. 기업들은 리스크에 대비하고 있다.
무디스 자료에 의하면, 미국 은행들은 2025년 6월 기준 민간 신용 제공업체에 약 3천억 달러의 대출 잔액을 보유하고 있었고, 사모펀드에는 추가로 2천850억 달러를 대출했다.
그런데 대체 자산 운용사들의 주가는 올해 들어 하방 압력을 받고 있다. 인공지능(AI)의 급속한 발전이 전통적인 비즈니스 모델을 뒤흔들 위협이 되면서 이들이 소유하거나 자금을 지원하는 소프트웨어 회사의 가치 평가에 대한 우려가 커지고 있기 때문이라는 분석이다.
26일(현지시간) 블룸버그 통신과 로버트 A. 스탠저 앤 컴퍼니의 자료에 따르면, 이번 분기 들어 투자자들은 12개 이상의 펀드에서 약 130억달러를 인출하려고 시도했다. 이들 펀드들의 순 자산은 총 1330억달러에 달한다. 그 중 약 10%에 달하는 환매 요청이 발생한 셈이다. 그러나 해당 상품들은 분기당 순자산의 5%까지만 인출할 수 있다.
미 금융감독청(FSB)은 최근 소프트웨어 기업을 둘러싼 시장 혼란의 영향을 검토한 후 일부 사모펀드에 대한 대출 규모를 축소한 것으로 최근 알려졌다.
사모펀드 회사인 블루 아울 캐피털은 지난 2월 19일(현지시간) 투자자들에게 자본을 환원하고 부채를 상환하기 위해 세 개의 신용 펀드에서 14억 달러 규모의 자산을 매각하고, 그중 한 펀드의 환매를 영구적으로 중단한다고 발표했다. 블루 아울이 판매하는 채권은 27개 산업 분야의 128개 포트폴리오 기업에 분산되어 있지만, 가장 큰 비중인 13%는 침체된 소프트웨어 및 서비스 부문에 집중되어 있다는 게 회사 측 설명이다.
AI 대전환이 기존 소프트웨어 기업의 수익 모델을 압박하면서, 사모신용 펀드가 집중 투자한 자산의 건전성에 대한 의구심이 커지고 있고, 이는 뉴욕 금융시장에 새로운 리스크 요인으로 부상하고 있는 것이다.
즉 이번 사태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한 펀드의 실패’가 아니라는 점이다. 주요 사모펀드들에서 유사한 현상이 동시다발적으로 발생하고 있다. 사모신용이라는 자산군 전체의 구조적 취약성이 드러나고 있다.
문제는 ‘유동성 착각’이다. 투자자들은 언제든 환매가 가능하다고 생각했지만, 실제 자산은 장기 대출 형태로 묶여 있어 즉각 현금화가 불가능하다. 이 구조는 2008년 금융위기의 핵심이었던 ‘유동성 환상(liquidity illusion)’과 매우 유사하다는 지적이 제기되고 있다.
다만 차이점도 있다. 은행 시스템과의 직접 연결은 과거보다 약해 전면적 금융위기로 확산될 가능성은 제한적이라는 분석도 만만치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7일(현지시간) 미국 뉴욕 증시의 하락 배경에는 이란 전쟁의 불확실성 요인 못지 않게 ‘사모펀드 유동성 경색’이라는 새로운 금융 리스크가 자리잡고 있다는 분석이 유력하다.
도이체방크는 사모신용 시장을 둘러싼 긴장이 과장됐다는 업계의 시각을 반박하기도 했다. 호주파이낸셜리뷰(AFR)에 따르면 도이체방크의 오잔 타르만 글로벌 매크로 부문 부회장은 26일(현지시간) 한 팟캐스트에 출연해 "중동 전쟁이 없었다면 인공지능(AI)과 함께 사모신용 부문의 구조적 위험이 투자자들의 가장 큰 고민거리였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제이미 다이먼 JP모건체이스 최고경영자(CEO)가 지난해 10월 실적 발표 자리에서 ‘바퀴벌레 이론’을 언급했다. 사모대출(Private debt) 관련 사기 행위 적발에 대해서 “바퀴벌레 한 마리가 보였다면, 아마 더 숨어 있을 가능성이 높다(When you see one cockroach, there are probably more).”고 말했다.
“한 마리 바퀴벌레만 있는 경우란 없다”는 수사학을 동원, 사모펀드 리스크를 제기한 것이다.
이 발언은 수개월이 지난 뒤 사모펀드 유동성 경색이 심화되면서 예언적 전망으로 소환되고 있다.
양준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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