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글로벌 인공지능(AI) 및 반도체 시장을 둘러싸고 2가지 의미심장한 이슈가 대두되었다. 첫째는 구글의 새로운 데이터 압축 기술인 '터보퀀트(TurboQuant)' 발표이다. 둘째는 월가의 대표적 큰손인 캐시 우드의 빅테크 주식 매도 소식이다. 이 두 가지가 맞물리면서 시장 일각에서는 'AI 거품론'까지 조심스럽게 제기되는 분위기이다.
하지만 터보퀀트 기술이 과대평가되었다는 지적과 함께 이같은 이슈를 단순한 위기로 단정 짓기보다는 산업이 성숙해 가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과도기적 현상으로 보아야 한다는 반론도 만만치 않다.
AI 산업계의 뜨거운 감자로 떠오른 구글의 '터보퀀트'는 대규모 언어모델(LLM)이 대화를 처리할 때 임시로 저장하는 데이터(KV 캐시)를 극단적으로 압축하는 알고리즘이다. 품질 저하 없이 메모리 사용량을 최소 6분의 1 수준으로 줄일 수 있다는 것이 구글의 발표 내용이다.
같은 AI 성능을 구현하는 데 필요한 메모리 용량이 6분의 1로 줄면 반도체 수퍼사이클이 꺾일 수 있다는 ‘터보퀀트 쇼크’가 시장에 심리적 충격을 줬다. 일부 전문가는 AI 붐으로 인해 고대역폭메모리(HBM)를 덜 써도 같은 성능을 낸다면 반도체 수요 감소로 이어질 것으로 경고 목소리를 내기도 했다. 이는 시장에 ‘수요 파괴’의 공포를 불러왔고, 메모리 반도체 기업의 주가를 끌어내렸다.
그간 AI의 고사양화로 '다다익램(메모리는 많을수록 좋다)' 특수를 누리던 반도체 생태계에 직격탄이 될 것이라는 우려를 낳았다. 실제로 구글의 발표 직후 삼성전자(4.7% 하락)와 SK하이닉스(6.2% 급락)를 비롯해 미국의 마이크론, 샌디스크(웨스턴 디지털) 등 국내외 주요 메모리 기업들의 주가가 일제히 폭락하며 투자 심리가 급격히 얼어붙었다.
하지만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이 기술의 파급력이 다소 과대평가되었다는 지적도 제기되고 있다. 이 기술의 기반이 되는 논문은 이미 지난해 논문 사전 공개 사이트(arXiv)에 등록되어 학계 일부에는 알려져 있었다.
그런데 구글이 지난 25일(현지시간) 공식 블로그를 통해 이를 대대적으로 발표하고, 오는 4월 열리는 세계적 AI 학술대회 'ICLR 2026'에서 정식 발표를 예고하면서 시장의 이목이 쏠린 것이다.
발표 직후 시장은 이 기술을 "메모리 수요 파괴자"로 인식하며 공포에 빠졌다. 하지만 현업 전문가들과 학계에서는 이를 치명적인 오해라고 지적한다. 소프트웨어적 압축 기술로 단기적인 메모리 병목 현상을 해소할 수는 있어도, 장기적으로 고용량 메모리를 요구하는 AI 산업의 흐름('다다익램') 자체를 꺾을 수는 없다는 것이다.
자산운용사 퀼터셰비엇의 벤 배링어 테크리서치 헤드는 “터보퀀트 기술은 혁명적인 것이 아닌 진화적인 것”이라며 “메모리 업계의 장기 수요 전망을 바꾸지 않는다”고 했다.
게다가 초기 발표에서는 연산 처리 속도가 최대 8배까지 빨라질 수 있다고 알려졌으나, 실제 복잡한 구동 환경에서는 그 절반인 4배 수준의 향상에 그칠 것이라는 관측도 나온다. 무엇보다 이 알고리즘이 범용적인 AI 서비스에 오류 없이 완벽하게 적용될 수 있을지, 실제 상용화 단계에서 어떤 기술적 변수가 발생할지는 아직 미지수로 남아있다. 신기술에 대한 기대감이 섣부른 공포로 이어졌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는 이유이다.
하지만 터보퀀트의 등장이 오히려 메모리 반도체의 장기적 호황을 이끌 것이라는 반론도 존재한다. 19세기 산업혁명 당시 증기기관의 효율이 높아지자 석탄 소비량이 폭발적으로 증가했던 '제본스의 역설(Jevons Paradox)'이 반도체에도 적용될 수 있다는 예상이다.
AI 구동에 필요한 메모리 비용이 저렴해지면 스마트폰, 가전 등 '온디바이스 AI' 시장이 만개하여 결과적으로 전체 메모리 반도체의 총수요는 훨씬 더 커질 것이라는 논리이다. 김동원 KB증권 리서치센터장은 28일 최근 보고서에서 "터보퀀트 우려는 기우에 불과하다"며, 터보퀀트가 오히려 메모리 반도체 기업에 호재일 수 있다는 분석을 제기했다. 김 센터장은 터보퀀트를 딥시크와 비슷한 사례로 분류했다. 지난해 1월 딥시크 공개 이후 엔비디아 주가가 단기간에 급락했으나, 한 달 내로 빠르게 회복됐기 때문이다.
김 센터장은 "터보퀀트와 딥시크는 모두 저비용·고효율 AI 구현을 위한 소프트웨어 최적화 기술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있으나, 향후 5년간 예상되는 AI 데이터센터 투자 확대 속도를 고려할 때 이러한 기술만으로 폭증하는 AI 수요를 감당하기에는 현실적 한계가 존재한다"고 설명했다.
그는 또 "터보퀀트와 같은 기술은 더 많은 사용자를 AI 환경으로 유입시키고, 개발자와 서비스가 구글 스택 내에 정착하도록 유도하는 역할을 해 결국 AI 사용량을 폭발적으로 증가시킨다"라고 전망했다.
따라서 구글 터보퀀트 최종 승자는 오히려 메모리 반도체라는 것이 김 센터장의 의견이다. 그는 다양한 저비용 AI 기술은 AI 사용 장벽을 낮추고 수요를 확대한다며, "이는 곧 연산량 증가와 메모리 탑재량 확대로 직결되고, AI 생태계 확장 경쟁의 최대 수혜는 메모리 반도체 업체가 될 전망"이라고 주장했다. 메모리 업체 중 최선호주로는 삼성전자, SK하이닉스, 마이크론이 꼽혔다.
하지만 이러한 낙관론에도 맹점은 있다. 19세기의 단순 에너지원이었던 '석탄'과 21세기 초정밀 하이테크 집약체인 '메모리 반도체'의 복잡한 가치를 동일선상에서 단순 비교하는 것이 과연 타당한가에 대해서는 회의적인 시각이 적지 않다. 효율성 증가가 반드시 폭발적인 신규 수요 창출로 직접 이어질 것이라 장담하기엔 거시 경제의 불확실성이 너무 크기 때문이다.
이같은 기술적 불확실성 속에서 시장의 불안감을 증폭시킨 것은 아크 인베스트의 캐시 우드 최고경영자(CEO)의 노골적인 엑소더스 행보다. 27일(현지시간) 미국 경제 매체 벤징가(Benzinga) 등에 따르면 아크 인베스트는 ARK 블록체인 & 핀테크 이노베이션 ETF, ARK 이노베이션 ETF, ARK 차세대 인터넷 ETF 등 주요 액티브 운용 ETF 3종에 걸쳐 주요 기술주 수백만 달러어치를 일제히 처분했다.
그 중에서도 매도 규모가 가장 큰 종목은 메타 플랫폼스다. 아크 인베스트는 메타 주식 7만6622주를 매도했다. 종가 547.54달러 기준으로 약 4200만달러(약 614억원) 규모다. 엔비디아는 15만4441주를 팔아치웠다. 종가 171.24달러 기준 총 매도액은 약 2660만달러(약 389억원)에 달한다. AI 혁신에 가장 공격적으로 베팅해 온 대표적인 큰손이 이 시점에 거액을 현금화했다는 사실은 시장에 묵직한 파장을 던졌다.
이를 두고 AI 산업의 밸류에이션이 단기 고점에 달했다는 'AI 거품론'이 힘을 얻는 분위기이다. 한 국내 증권사 반도체 전문 애널리스트는 "최근 빅테크들의 효율화 시도와 기관들의 차익 실현 매물이 맞물리면서 AI 섹터 전반에 껴있던 맹목적인 프리미엄이 걷히고 있는 구간"이라며, "이제는 단순히 AI 타이틀만으로 주가가 오르던 시기는 지났고, 기업들이 실질적인 수익 창출 능력을 증명해야 하는 냉혹한 시험대에 올랐다"고 분석했다.
터보퀀트가 진정한 혁신일지 혹은 딥시크처럼 찻잔 속의 태풍에 그칠지, 당분간 시장은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기보다는 신중한 관망세를 유지할 가능성이 높을 것으로 전망된다.
양준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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