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연예

극적인 삶 [이대한의 낭만연구실]

아직까지 남아 있는 내 유년 시절의 강렬한 기억 중 하나는 처음으로 연극에 참여한 일이다. 초등학교 2학년 때 학예회 무대에서 나는 친구들과 함께 물고기가 되었다.

이십대 청년이 먼저 읽고 그리다. 김예원

광고

이대한 | 성균관대 생명과학과 교수

아직까지 남아 있는 내 유년 시절의 강렬한 기억 중 하나는 처음으로 연극에 참여한 일이다. 초등학교 2학년 때 학예회 무대에서 나는 친구들과 함께 물고기가 되었다. 처음으로 분장이라는 것을 하고, 큰 강당을 메운 학부모들 앞에서 열심히 외운 대사를 읊을 때 떨리던 마음이 30년이 지난 아직도 선명하다.

그 강렬한 기억 때문인지 나는 늘 연극에 대한 동경이 있었다. 대학교 입학하고 첫 학기에 수강했던 수업 중 하나가 연극을 직접 관람하는 수업이었고, 캠퍼스를 걷다가 바닥에 떨어진 ‘총연극회’의 부원 모집 홍보 전단을 보고 한참을 고민하기도 했다. 총연극회에 들어가면 모든 대학생활이 그곳에 블랙홀처럼 빨려 들어갈 것 같은 예감에 주저하다가 결국 연극의 꿈은 실현되지 못했지만 말이다.

광고

그 이후로도 종종 연극을 보러 가곤 했었는데, 조금 더 연극과 가까워지게 된 것은 우연한 계기로 배우이자 연출을 하는 친구가 생기면서부터였다. 몇번 만나지 않고도 나와 그는 서로 마음이 깊이 통하는 사이가 되었고, 나는 자연스레 연극에 대해 더 많이 생각하게 되었다.

그 친구와 막 친해졌을 무렵, 전문연구요원으로 복무 중이던 나는 기초군사훈련을 받으러 논산훈련소에 입소하게 되었다. 당시 전체 중대가 모두 전문연구요원들이었고, 대부분 나처럼 대학에서 연구를 진행하고 있거나 산업체에서 복무하고 있던, 주로 20대 후반의 ‘먹물’들이었다. 나처럼 박사과정을 수료한 사람들이 상당수였고, 우리 분대에는 아예 미국 칼텍에서 박사학위를 마치고 고등과학원에서 연구하고 있던 ‘박사님’도 계셨다.

광고

광고

매일 연구실에서 실험 벤치 앞에 앉아 피펫(액체 이동기)을 쥐고 실험하다가, 하루아침에 머리를 빡빡 밀고 훈련을 받던 중 문득 실소가 터졌다. 갑자기 모든 상황이 ‘극적’으로 느껴졌기 때문이다. 어딘가에서 연구를 하던 가방끈 긴 사람들이 갑자기 논산이라는 무대로 불려와 ‘훈련병’이라는 새로운 배역을 부여받고, 그 역할을 잘 연기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리고 그날 이후로 나는 삶의 극적인 차원을 자주 생각하게 되었다.

이제 나는 학교라는 무대에 오르면 교수라는 배역을 연기하고, 학회라는 무대에서는 연구자의 배역을, 집으로 돌아와서는 남편이자 아빠라는 배역을 연기한다. 간만에 부모님을 만나면 아들을 연기하고, 장인 장모님을 만나면 사위를 연기한다. 각 배역에 맞는 적절한 말과 행동이 있고, 나는 그것을 충실히 따르려고 노력한다.

광고

삶이 본질적으로 연극과 다를 바 없다는 것은 삶이 가식적이라거나 수동적이라는 이야기는 아니다. 오히려 나는 삶의 이러한 극적인 차원이 ‘인간성’의 핵심을 이룬다고 믿는다. 우리는 눈앞에 주어진 자극에 그때그때 반사적으로 반응하는 존재를 넘어, 스스로에게 새로운 배역을 부여하고, 그 배역을 충실히 소화해 내기 위해 애쓸 수 있는 존재이다. 인간이 꾸어온 수많은 꿈은 그렇게 아직 존재하지 않는 것을 먼저 상상하고 그것을 실현하기 위해 애쓰는, 즉 ‘액팅’(acting)을 통해 조금씩 현실이 되어 왔다.

‘극적인 삶’을 받아들이기 전, 나는 진정한 내가 누구인지를 강박적으로 따지고 들었던 것 같다. 하지만 균질한, 본질적인 나라는 것은 없으며, 나는 내가 수행하는 수많은 역할로 구성된 비균질적인 존재임을 받아들이면서 실천적인 삶, 즉 ‘액팅’하는 삶으로 나아갈 수 있게 되었다. 나는 내가 활동하고 싶은 무대들을 선택할 수 있고, 그 무대들 위에서 어떤 배역을 수행할지 선택할 수 있다. 그리고 그 역할들이 나를 구성한다. 나를 구성하는 좋은 배역들이 많으면, 나는 더 좋은 사람이 된다. 내가 좋은 스승, 좋은 과학자, 혹은 좋은 아빠를 연기하겠다고 결심하면, 그 배역이 내 삶의 구체적인 실천을 안내한다.

삶의 극적인 차원에 대해 생각할 때, 늘 떠오르는 말이 있다. 배우 최민수씨가 연기에 뜻을 비친 아들에게 건넨 조언이다. “진짜 액팅(연기)이 뭔지 알아? 액팅을 안 하는 게 진짜 리얼 액팅이야.” 삶과 극을 진짜와 가짜로 구분하는 것은 별 의미가 없다. 진짜 극은 진짜 삶과 구분되지 않는다는 최민수 배우의 말을 뒤집어보면, 진짜 삶은 진짜 극과 구분되지 않는다. 달리 말해, 액팅의 완성은 ‘비잉’(being)이다.

나는 종종 번잡한 삶의 무대에서 잠시 내려와 홀로 산책을 하며 스스로에게 묻는다. 나는 어떤 무대 위에 있는가? 그 무대 위에서 나는 어떤 꿈을 꾸는가? 그 꿈은 나에게 어떤 역할을 부여하는가? 그 역할은 나를 어떤 존재로, 나의 삶을 어떤 실천으로 이끄는가?

이 기사 공유하기
페이스북X

이 기사를 추천합니다

i

댓글

0

후 댓글을 작성할 수 있습니다.

아직 댓글이 없습니다 이 기사에 첫 의견을 남겨보세요.

댓글 수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