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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그놈의 실존주의 쉽게 이해하기

네이버 국어사전을 찾아보면, 본질주의는 본디 가지고 있는 사물 자체의 성질이나 모습, 또는 실존에 상대되는 말로 어떤 존재에 관해 그 무엇이라고 정의할 수 있는 성질이라고 풀이해 놓았다. 1945년 사르트르는...

그놈의 실존주의 쉽게 이해하기

백남경 인제대 미래교육원 글쓰기교실 강사

실존주의와 본질주의는 인간의 본질에 관한 철학 사조다. 네이버 국어사전을 찾아보면, 본질주의는 본디 가지고 있는 사물 자체의 성질이나 모습, 또는 실존에 상대되는 말로 어떤 존재에 관해 그 무엇이라고 정의할 수 있는 성질이라고 풀이해 놓았다.

1945년 사르트르는 '실존주의는 인문주의일까'라는 강연에서 처음으로 다음과 같은 말을 사용했다. 그는 "인간의 본질은 실존에 선행하지 않는다",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는 말을 그 자리에서 했다. 인간의 본질을 바라보는 기존의 관점을 뒤집은 것이었다. 갑남을녀인 우리가 이 말을 이해하기란 쉽지 않다. 그러나 이해 못 할 것도 아니다.

여기서 본질은 목적을 가진 존재를 말하며, 실존은 있는 그대로의 존재를 의미한다. 사물의 존재를 생각해 보자. 예컨대 책상과 걸상은 처음부터 받치고 앉을 목적으로 만들어진다. 휴대폰은 소통과 정보검색을 목적으로 만들어진다. 그러다 고장이 나면 쓸모가 없어져서 버려지게 된다.

인간은 어떤가. 필자의 경우 기자를 하였고 지금은 대학에서 글쓰기 강의를 한다. 신(GOD)의 뜻에 따라 그 목적이 정해져서 그 목적을 수행하기 위해 태어났고 할 수 있는가. 기자와 글쓰기 강의를 하며 살아가는 목적으로 태어났다고 할 수 있는가. 그렇다고 본다면, 그것은 본질주의의 관점에 해당한다.

이와는 반대로 그렇게 보지 않는다면 그건 실존주의의 관점이다. 그런 게 아니고 우연히 세상에 태어났고, 살다 보니 직업을 기자로 선택하였고, 퇴직 후 글쓰기 강의를 하게 되었고, 그에 따른 책임을 지며 살아가는 것으로 보는 게 실존주의이다.

다시 말해 세상에 던져지듯이 태어난 '기투존재'로 살아가면서 무엇을 할지 고민하다가 선택한 직업이 기자였고, 그런 선택에 대해 책임을 지며 살아가는 존재라는 것이다. 신이 어떤 목적을 가지고, 필자를 이 세상에 태어나게 한 것과는 무관하다고 보는 것이다.

본질주의는 어떤 존재가 고정된, 정해진 본질에 따라 역할과 목적이 정해져 있다고 본다. 본질주의는 기존의 서구철학과 신학에 근거한다. 필자가 이 세상에 태어나고 기자를 하고 수필강의를 하는 것은, 신의 뜻에 의한 것이란 관점이다. 우리는 흔히 "이건 내 천직이야"라고 말한다. 하늘이 준 직업을 우리는 천직(天職, calling)이라 한다. 하늘이 주신 직업, 신이 주신 사명을 수행한다는 것이다.

지금은 폐지되었지만, 필자가 학창 시절 달달 외웠던 "우리는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났다"라고 시작하는 '국민교육헌장'이 대표적인 본질주의(목적주의)적인 문장이다.

이와 반대로 실존주의를 잘 표현한 문학작품은 카뮈의 '이방인'과 사르트르의 '구토'다. 이방인에서 주인공 뫼르소는 의미 없는 세계에서 살아가는 한 인간의 태도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구토에서 다음과 같은 문장들이 나오는데, 글 쓰는 작가에게 아주 유용한 영감을 준다.

"나는 의자에 손을 놓는다. 그것은 존재하기 때문이다. 내가 그 위에 앉아 있는 물건, 내가 그 위에 손을 얹은 물건의 이름은 의자다. 사람들은 우리가 거기에 앉을 수 있도록 서둘러 그것을 만들었다. …나는 중얼댄다. 이것은 의자다. 그 물건은 있는 그대로이다. …사물들은 명명된 그들의 이름으로부터 해방되었다. 사물은 그로테스크하고 고집이 세고 거인같이 거기에 있다. 그것들을 의자라고 부른다든가 또는 무엇이든 그것에 대하여 이름을 붙이려는 짓은 바보짓일 것이다. 나는 이름 붙일 수 없는 사물들의 한복판에 있다. 혼자서 말없이 아무 방비 없는 나를 둘러싸고 있다. 밑에서 뒤에서 위에서 나를 에워싸고 있다. 사물들은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는다. 거기에 있을 뿐이다." 위 문장들은 사물들로부터 인간이 부여한 의미를 제거하고 단지 존재 자체로서 사물을 바라봄을 알 수 있다. 여기서 놓쳐서는 안 되는 포인트는, 문예 창작에서 형상화에 대해 감을 잡을 수 있는 절묘한 힌트가 들어있다는 사실이다.

삶에는 정답이 없다. 열심히 사는 만큼 소득이 올라가는 것도 아니다. 정직하고 정의롭게 살아도 행복이 보장되는 것도 아니다. 남을 속이거나 잔꾀를 부리는 자가 더 잘 사는 경우도 많다. 하여, 세상은 부조리하다. 우리가 정의와 공정에 목말라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종합하면 본인의 삶은 본인 스스로 만들어가는 것이라고, 실존주의가 시사해 준다고 보아도 무방하다. 사르트르는 실존주의자이지 허무주의자가 아니다. 신을 부정하지도 않았다. 본질이냐, 실존이냐의 관점은 각자의 가치관에 달려있다. 다만 글쓰기에서는 소재와 주제의 성격에 따라 다르게 드러낼 문제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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