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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굿모닝 예향] 그 곳에 앉으면 역사가 생생

지금은 기차가 다니지 않는 옛 나주역. 흰 벽에 옅은 민트색 창틀을 두른 낮은 건물이 한눈에도 오래된 역임을 말해준다. ‘나주역’이라 적힌 간판 아래로 들어서면 낡은 매표창구와 운임표, 긴 나무의자가 놓인 대합실이 옛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굿모닝 예향] 그 곳에 앉으면 역사가 생생

[굿모닝 예향] 그 곳에 앉으면 역사가 생생

남도 체험로드 나주 컬처-전국적 항일운동 횃불 밝힌 저항 현장

마한 문화의 젖줄, 영산강…문명 꽃피운 고대인의 자취

2026년 09월 28일(월) 15:20

나주 반남고분군 가운데 하나인 덕산리 고분군.

◇나주학생독립운동기념관

지금은 기차가 다니지 않는 옛 나주역. 흰 벽에 옅은 민트색 창틀을 두른 낮은 건물이 한눈에도 오래된 역임을 말해준다. ‘나주역’이라 적힌 간판 아래로 들어서면 낡은 매표창구와 운임표, 긴 나무의자가 놓인 대합실이 옛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1920년대 후반 나주에서 광주로 통학하는 학생들. 당시 나주에는 중등교육기관이 많지 않아 적지 않은 학생들이 기차를 타고 광주로 학교를 다녔다. 아침이면 나주역에서 광주행 통학열차를 타고, 수업을 마치면 다시 열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왔다. 조선인 학생과 일본인 학생이 같은 열차를 이용했지만 객차는 달랐고, 때로는 한 객차에 섞여 타기도 했다. 식민지 조선의 차별과 갈등도 작은 열차 안에 함께 실려 있었다.

국립나주박물관에 전시된 대형 옹관. 영산강 유역에서 발달한 독특한 옹관묘 문화를 보여준다.

역사의 한 장면은 1929년 10월 30일 이곳에서 시작됐다. 오후 4시께 나주역에서 광주로 통학하던 조선인 학생과 일본인 학생 사이에 충돌이 벌어졌다. 일본인 남학생이 조선인 여학생을 희롱한 데 항의하면서 벌어진 이른바 ‘나주역 사건’이다.

하지만 단순한 학생들 간의 다툼만은 아니었다. 일제강점기 학교 안팎에서 쌓여온 민족 차별과 억압에 대한 분노가 그 밑바닥에 있었다. 나주역에서 벌어진 충돌은 이튿날 통학열차 안으로 이어졌고, 11월 1일에는 광주역에서 다시 양측 학생들이 충돌했다. 작은 역에서 시작된 불씨가 철길을 따라 광주로 향했다.

그리고 11월 3일. 광주의 학생들이 거리로 나섰다. 이날은 일제가 메이지 천황의 생일을 기념하던 명치절이었다. 광주고등보통학교 학생들을 중심으로 시작된 시위에는 다른 학교 학생들도 가세했다. 학생들은 일제의 식민지 교육과 민족 차별에 항의하며 거리로 뛰쳐나왔다. 그 대열에는 나주에서 기차를 타고 광주로 학교를 다니던 학생들도 있었다.

국립나주박물관 어린이박물관 내부. 마한의 역사와 문화를 놀이와 체험을 통해 접할 수 있도록 꾸며졌다.

구 나주역 바로 옆에 자리한 나주학생독립운동기념관은 당시의 이야기를 자세하게 들려준다. 전시실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통학열차’가 눈길을 끈다. 당시 객차를 재현한 공간과 함께 나주 학생들이 광주로 통학했던 상황이 소개돼 있다. 아침과 저녁, 나주와 광주를 오가던 평범한 통학길이 어느 순간 역사의 무대가 됐다.

기념관은 단순히 나주역 사건만을 알려주지 않는다. 학생들이 광주학생독립운동에 나서기 전 어떤 생각을 나누었고 어떻게 조직됐는지, 11월 3일과 12일 광주에서 벌어진 시위가 어떻게 이어졌는지를 보여준다.

탄압도 거셌다. 나주에서 광주로 통학하던 학생 30여 명은 퇴학당했고 많은 학생이 검거되거나 구속됐다. 기념관 한쪽을 채운 학생들의 이름과 얼굴, 당시 신문과 재판 관련 자료를 마주하면 교과서 속 몇 줄의 역사 이야기가 아닌 그 시대를 살아낸 한 사람 한 사람의 이야기로 다가온다.

1929년 늦가을 시작된 움직임은 이듬해까지 이어졌다. 3·1운동, 6·10만세운동과 함께 일제강점기 3대 독립운동 가운데 하나로 평가받는 광주학생독립운동은 그렇게 지역 학생들의 저항에서 전국적인 항일운동으로 확산됐다.

기념관을 둘러보고 다시 구 나주역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화려한 전시물이 아닌, 오래된 매표창구와 대합실, 창문과 나무의자가 자리를 지키고 있을 뿐이다. 1913년 호남선 개통과 함께 영업을 시작한 나주역사는 이후 일부 변화를 거쳤지만 기본 구조와 골조, 목재 등은 초기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현재는 전남도 기념물로 지정돼 보존되고 있다.

나주역에서 일어난 한·일 학생 간 충돌이 광주학생독립운동의 도화선이 됐다. 당시 나주역 개찰구 모습.

◇고분군과 국립나주박물관

영산강을 빼놓고 나주의 고대사를 이야기하기는 어렵다. 담양 병풍산에서 발원해 전남 서남부를 가로지르는 강은 사람을 불러 모았고 일대 넓은 들은 삶의 터전이 됐다.

나주를 가로질러 흐르는 영산강 주변에는 유난히 크고 작은 고분이 많다. 나주 반남과 복암리 일대에 남아 있는 고분군은 오래전 이 땅에 자리 잡았던 세력의 흔적이기도 하다. 특히 반남 고분군에서 발견된 거대한 독널과 금동관, 금동신발, 옥 장신구 등은 영산강 유역에서 독자적인 문화를 꽃피웠던 고대인들의 삶을 보여준다. 그 역사의 중심에 마한이 있다.

마한은 백제·신라처럼 하나의 왕이 다스린 단일 국가가 아니라 여러 소국이 모인 연맹체였다. 삼국시대 이전부터 한반도에 있던 삼한(三韓) 중 가장 큰 정치 집단으로, 54개 소국이 있었다고 전한다. 한반도 중서부와 서남부의 넓은 지역에 자리했던 마한의 여러 세력 가운데 영산강 유역에서는 다른 지역과 구별되는 독특한 문화가 오랫동안 이어졌다.

광주학생독립운동의 발단이 된 현장인 옛 나주역. 1929년 당시 역사의 흔적을 간직하고 있다.

그 흔적을 가장 뚜렷하게 보여주는 것이 독널무덤이다. 사람의 시신을 커다란 항아리 두 개를 맞붙여 만든 관에 안치하는 장례 방식으로, 특히 나주 반남 일대에서는 거대한 봉분 안에 여러 개의 독널을 함께 묻은 고분들이 발견됐다. 신촌리 9호분에서는 금동관과 금동신발 등 화려한 유물도 출토됐다.

지역의 고분문화가 영산강 유역에서 발달한 데에는 강을 빼놓을 수 없다. 영산강은 사람들에게 먹을거리와 비옥한 삶의 터전을 내어준 동시에 사람과 물자가 오가는 길이었다. 강을 따라 마을이 생겨나고 넓은 들에서 농사를 지었으며, 물길을 통해 다른 지역의 문물도 오갔다. 영산강은 단순한 자연경관이 아니라 이곳에 자리 잡은 고대 세력의 삶과 성장을 가능하게 한 기반이었다.

2000년 전 마한을 찾아가는 발걸음이 설렌다. 나주에서 마한을 만난다는 것은 박물관 진열장 속 유물을 보러가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고분이 남아 있는 땅을 걷고 그 곁을 흐르는 영산강을 떠올리며, 이곳에서 실제 살아갔던 사람들의 흔적을 만나는 일에 가깝다.

나주시 반남면 신촌리 고분군 곁에 자리한 박물관은 영산강 유역 고대문화, 그중에서도 마한과 고분문화를 집중적으로 보여주는 곳이다. 박물관 자체가 고분군 한가운데 들어서 있어 전시실 안과 밖의 풍경이 따로 떨어지지 않는다. 진열장속에서 보았던 유물이 어디에서 나왔는지, 그 유물을 남긴 사람들이 어떤 땅에서 살았는지를 함께 엿볼 수 있다.

상설전시는 영산강 유역에 사람들이 터를 잡기 시작한 선사시대부터 마한의 성장과 독특한 고분문화, 다른 지역과의 교류까지 시간의 흐름을 따라 펼쳐진다. 돌도끼와 토기 같은 생활도구에서 시작해 마한의 토기와 옥 장신구, 거대한 독널과 무덤에서 나온 화려한 부장품으로 이어진다. 하나씩 따라가다 보면 막연했던 ‘마한’이라는 이름이 조금씩 머릿속에 새겨진다.

나주학생독립운동기념관 상설전시실. 1929년 학생독립운동의 전개 과정과 관련 자료를 소개한다.

본관에서 유물을 통해 만난 마한 사람들의 삶은 지난 3월 새롭게 문을 연 어린이박물관 ‘안녕, 마한! 우리 마을 이야기’에서 놀이와 체험으로 이어진다.

국립나주박물관이 개관 10주년을 맞아 새로 건립한 복합문화관에 마련한 공간으로, 시범운영을 거쳐 지난 3월 정식 개관했다. 고대 영산강 유역에 살았던 마한 사람들의 생활과 독특한 고분문화를 어린이 눈높이에 맞춰 디지털과 아날로그 체험으로 풀어냈다.

어린이박물관에서 놓치기 아까운 ‘전시물’은 건물 밖에 있다. 통유리창 너머로 커다란 봉분이 들어온다. 나주 신촌리 고분이다. 어린이박물관이 들어선 복합문화관은 신촌리 고분을 한눈에 바라볼 수 있도록 조성됐다.

/이보람·김민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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