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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국내 유일·최대 자랑했던 마산 한일합섬 역사 [언니야 보고싶다]

2006년 마산 한일합섬에 남았던 마지막 굴뚝이 철거된 뒤 어느덧 20년이 흘렀다. 창원시 마산회원구 양덕동 일대 8만 9000여 평을 가득 채웠던 한일합섬은 마치 하나의 도시와도 같았다.

국내 유일·최대 자랑했던 마산 한일합섬 역사 [언니야 보고싶다]

■마산 한일합섬 기억 찾기-언니야 보고 싶다 (2) 한일합섬 역사 살펴보기

옛 마산 양덕동 반냇들 일대

1967년 36동 방직공장 들어서

전국 각지서 모인 여성 노동자

지역 산업체 학교 등 발자취

1970~1980년대 산업화 이끌어

1998년 영업부진·외환위기로 부도

2007년 회사정리절차 마무리

구술·연구로 역사 잇기 노력

2006년 마산 한일합섬에 남았던 마지막 굴뚝이 철거된 뒤 어느덧 20년이 흘렀다. 창원시 마산회원구 양덕동 일대 8만 9000여 평을 가득 채웠던 한일합섬은 마치 하나의 도시와도 같았다. 공장과 더불어 한일여자실업고등학교, 열 동이 넘는 기숙사가 함께 자리하며 마산의 풍경과 삶을 이루고 있었다. 그곳에는 전국 각지에서 모여든 어린 여성들이 있었다. 낮에는 방직공장에서 일하고, 틈틈이 배움을 이어가던 이들이다. 그들이 벌어 보낸 돈은 고향의 살림을 지탱했고, 그 손길은 1970~80년대 한국 산업화의 밑바탕이 되었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그러나 이들의 이야기는 또렷이 남아 있지 않다. 한일합섬 사보와 수출탑, 기념사진이 남아 당시의 성과를 말해주지만, 그 안에서 삶을 버텨낸 소녀들의 얼굴은 좀처럼 드러나지 않는다. 한 시대를 떠받친 구체적인 삶이 기록의 바깥에 머물러 있는 셈이다. 학교에서는 친구로, 공장에서는 언니와 동생으로 서로를 불렀던 이들. 그들이 건네던 ‘언니야’라는 이름은 이제 어디에 닿아 있을까. 2023년 경남여성가족재단이 구술 기록으로 그 기억을 책으로 남겼고, 이후 영화와 전시, 연구로 이어지는 움직임도 조금씩 쌓이고 있다. 이 기획 연재는 그 흐름 위에 서 있다. 흩어진 목소리를 다시 불러 모아, 이름 없이 지나간 ‘언니야’들의 삶을 한 번 더 세상 앞으로 불러내려는 작은 시도다.

옛 한일합섬 모습. /경남도민일보DB

한일합섬 기억을 찾으려면 한일합섬과 마산 한일여자실업고등학교-한일여자고등학교-한일전산여자고등학교-한일여자고등학교의 50년 넘는 역사를 한 번쯤은 되짚어볼 필요가 있다. 마침 2024년 3월 마산 한일여고와 한일여고 총동문회가 합심해 학교 내에 50년관을 세웠다. 이 곳에 전시된 자료로 1970~1980년대 전성기였던 한일합섬과 한일여실고의 성과를 살펴볼 수 있었다. 이외에도 <마산시사>, 마산상공회의소가 1987년에 발간한 <마산상공회의소 70년사>가 좋은 참고가 됐다.

국내 최대, 국내 유일 수식어 붙은 한일합섬

<마산상공회의소 70년사>에는 한일합성섬유공업㈜이 설립된 과정이 적혀 있다. 책은 한일합섬을 ‘국내 최대 규모의 화학사 생산업체’라고 표현했다. 1966년 1월 15일 마산시(현 창원시 마산회원구) 양덕동 222번지, 마산의 곡창이었던 반냇들 일대에 기공해 만 1년 만인 1967년 1월 25일에 공장이 완성됐다. 1만 8000평에 36동 공장 건물, 기능공업양성소, 각종 후생시설 건물이 있었다. 공장건설에는 외화 644만 1000달러, 내화 10억 1000만 원이 들었다.

한일여자고등학교 50년관에 들어서기 전 왼쪽에는 수출의 날에 받은 상패가 전시돼있다. 가장 크고 높은 상패는 1973년 10회 수출의 날에 받은 ‘국내 최초 1억 불 수출의 탑’ 상패다. 단일기업체로서는 국내 처음으로 1억 달러 수출을 돌파했다. 1973년 당시 환율을 1달러 당 400원으로 계산했을 때, 한화 400억 원 수출을 기록한 것이었다. 1977년 12월 14회 수출의 날에는 최초 ‘2억 불 수출의 탑’을 받았다. 수출 우선 정책이 펼쳐지던 1979년에 수출 실적은 4억 529만 달러였다. 또다시 국내 최초로 ‘4억 불 수출의 탑’을 수상했다.

창원 한일여자고등학교 안에 있는 50년관 내부. /주성희 기자

창원 한일여자고등학교 안에 있는 50년관 내부. /주성희 기자

창원 영화 동아리 빛공방이 한일합섬에 다녔던 여성 노동자 이야기를 소재로 만든 다큐멘터리 영화 <다시 부르는 소년들의 이름> 한 장면. /빛공방

창원 영화 동아리 빛공방이 한일합섬에 다녔던 여성 노동자 이야기를 소재로 만든 다큐멘터리 영화 <다시 부르는 소년들의 이름> 한 장면. /빛공방

창원 영화 동아리 빛공방이 한일합섬에 다녔던 여성 노동자 이야기를 소재로 만든 다큐멘터리 영화 <다시 부르는 소년들의 이름> 한 장면. /빛공방

창원 영화 동아리 빛공방이 한일합섬에 다녔던 여성 노동자 이야기를 소재로 만든 다큐멘터리 영화 <다시 부르는 소년들의 이름> 한 장면. /빛공방

당시 정부가 상업에서 공업 중심 경제 구조로 바꾸려는 ‘1차 경제개발 5개년’에 기조를 같이 한 셈이었다. 기계 시설은 일본 신호철강 회사의 것을 본떴다. 생산기술로 중합시설, 방사·원액 준비시설 방사선정 및 연신 시설, 후처리시설, 회수시설, 보일러·발전 시설 등 그 밖에 일체 부대시설등이 있었다. 총 공정거리는 375m였다.

1966년에 고용한 인원은 2430명(남자1130명, 여자 1300명), 1970년에는 8760명(남자 3650명, 여자 5110명)이라 기록돼있다. 다만 <마산상공회의소 70년사>에서는 여자 노동자가 더 많은 이유를 알 수 없었고, 한일여실고 관련 기록도 없었다.

학교법인 한효학원이 밝힌 연혁에서 종업원수를 살펴보면 1969년에 1만 명 이상, 1973년에 2만 명을 넘겼다. 이 중 여성 비율은 70%를 넘겼다.

설립자 김한수 이사장

학교법인 한효학원은 1974년 1월 5일에 설립이 인가됐다. 김한수 초대 이사장과 이균자 초대 교장이 취임했다. 그해 2월 28일 마산 한일여자실업학교가 인가를 받았다. 당시 방직과에 69개 학급이 있었다. 1회 입학식 때 신입생은 1680명이었다.

1977년은 1회 입학생 1100명이 졸업한 해며 한일여자실업학교가 한일여자실업고등학교로 바뀌던 되던 해이기도 하다. 이해 2월에 김해한일여자실업고등학교도 설립이 인가됐는데 방적과 24학급 규모였다. 이 학교는 1991년에 김해한일여자상업고등학교로 바뀌었다가 1999년 김해한일여자고등학교로 교명이 바뀌었다.

창원 한일여자고등학교에 있는 김한수 학교법인 한효학원 초대 이사장 동상. /주성희 기자

창원 한일여자고등학교 정문에는 개교 때 지은 교훈이 새겨져 있다. /주성희 기자

당시 한일여실고 교정 모습. /박금자

김한수 이사장은 1982년 작고했다. 그해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받았다. 국민훈장은 경제, 사회, 교육, 학술 분야에서 공을 세워 국민의 복지 향상과 국가 발전에 기여한 공적이 뚜렷한 사람에게 준다. 무궁화장은 가장 높은 등급으로 그가 높은 수출 기록보다 산업체학교를 세워 우리나라 여성 교육에 큰 족적을 남겼다는 점을 높이 샀다.

김 이사장은 김해 출생으로 마산 성호공립보통학교에서 공부했다. 1956년 경남모직주식회사를 설립하고, 1962년에 중앙합성섬유주식회사, 1964년에 한일합성섬유주식회사를 세웠다.

한효학원의 초대 이사장인 그는 교훈 ‘어떠한 시련과 곤궁도 이를 극복할 수 있는 소녀 이외에는 이 교문을 들어설 수 없다’를 지었다고 알려져있다. 이 교훈은 일본 혼성학원 정문에 쓰인 “괴로움과 고달픔을 참고 스스로 나아가 단련의 길을 택할 기력이 있는 소년, 소녀 외에는 이 문을 들어서면 안된다”는 글귀에서 가져온 것이라고 알려져있다.

문경희 국립창원대학교 교수는 한일여고 내 50년관과 사보, 구술집 자료를 토대로 <마산 한일여고 ‘여고생’들에 대한 서사와 기억의 정치>(2025)를 발표했다. 문 교수는 한일여고 내 김한수 이사장의 흉상과 송덕불망비가 1997년 5월 8일에 세워진 점을 두고 “총동창회 구성원들에게 김한수 이사장은 어버이와 같은 존재로 인식되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고 서술했다.

역사 속으로 사라지다

마산 향토기업으로 마산 경제를 일으켰다는 평가를 받은 한일합섬은 왜 흔적도 없이 사라졌을까?

향토기업있던 한일합섬이 1998년에 부도로 회사정리절차(법정관리)를 받을 때부터 동양그룹으로 인수 됐다. 한일합섬이었던 터가 두 건설사에 매입되기까지 지역 언론 보도를 통해 살펴보자.

1990년대 초 섬유산업이 국외에서 성행하면서 공장들이 이전하면서 국내에서 영향력이 약해지고 있었다. 영업 부진을 이어가던 한일합섬은 1997년 외환위기 때 부도를 면치 못했다.

1998년 7월 30일 경남도의회는 대정부 건의안에서 한일합섬이 회사정리절차에 들어가야 한다고 호소했다. 한일합섬 부도로 지역경제에 올 타격을 우려해서였다. 이 건의안을 보면 한일합섬은 7월 3일 회사정리절차를 신청하고 대대적인 구조조정으로 회생을 도모하고 있다고 했다. 자체 인력과 중소협력업체 2000여 곳에서 일하는 종업원 등 약 20만 명이 실직하게 되면 지역 경제 위기가 우려된다는 취지였다. 한일합섬은 이에 앞서 1990년 대 초부터 7년 여에 거쳐 노동조합 협조하에 구조조정을 해왔고, 2만 명이던 종업원이 1500여 명으로 줄었다는 내용도 포함됐다.

이러한 지역과 시민사회의 노력으로 한일합섬은 회사정리절차(법정관리)를 밟으며 영업을 이어갔다. 그 노력에 찬물을 끼얹는 사건도 있었다. 당시 김인규 마산시장이 김원중 한일합섬 대표이사에게서 한일합섬 공장부지 용도 변경과 관련해 5000만 원을 받은 것이 드러난 것이다.

뇌물이냐, 선거자금이냐는 공방이 대법원까지 이어져 2001년 3월 13일에 돼서야 뇌물로 마무리 지어졌다. 그해는 회사정리절차상 공장을 이전해야 했던 시점이기도 했는데 마산에서 이전 부지를 찾지 못했다. 다만 한일건설 아파트 사업은 날이 갈수록 번창했고, 공장과 기숙사였던 터는 한일 1차, 2차 아파트로 바뀌었다.

회사정리절차 속 공장 내 일자리가 사라진 것은 물론, 공장과 하천을 따라 생겼던 식당과 상가들도 활기를 잃었다. 영업을 이어가려는 의지를 보였던 모습과 다르게 한일합섬은 2006년 마지막 남긴 굴뚝을 부수면서 완전히 생산을 중단하게 됐다.

창원 영화 동아리 빛공방이 마산 한일합섬에 다녔던 여성 노동자 이야기를 소재로 만든 다큐멘터리 영화 <다시 부르는 소년들의 이름> 첫 장면. 2006년 한일합섬 공장 마지막 굴뚝이 철거된 모습이 담긴 모습으로 이윤기 마산 YMCA 총장이 제공한 영상이다. /빛공방

마산 한일합섬 터를 매각하는 과정 또한 지난했다. 유적이 있을 수 있다는 말에 주민공청회가 열리기도 했지만, 유적은 없었던 것으로 밝혀졌다.

창원지법은 2004년 한일합섬 터를 매각하기로 결정했다. 그해 9월 태양·한림건설 컨소시엄이 한일합섬 터 8만 7000여 평을 2580억 원에 매입했다. 그렇게 세워진 아파트가 지금의 양덕동 메트로시티1·2차다.

2007년 2월 동양그룹에 인수 합병되면서 한일합섬은 부도 9년 만에 회사정리절차를 마무리 지었다. 한일합섬은 전문경영인 체제로 전환하면서도 향토기업으로써 마산에 돌아오겠노라 했지만 2016년에 유진그룹으로 인수됐다. 현재 서울에 본사를 둔 유진한일합섬의 전신이 마산 한일합성섬유공업㈜다.

기억으로 채워야 할 남은 이야기

지역사 연구자들의 노력으로 한일합섬 관련 1960~1970년대 자료 자체는 조금씩 드러나고 있다. 한일합섬이 지어진 1960년대부터 호황을 누린 1970년대, 1980년대까지는 한일합섬 사보나 자료가 있다. 또 2023년 경남여성가족재단이 발표한 <한일합섬, 일하고 공부하고 꿈꾸다>에는 특히 초창기 졸업생들의 구술이 담겨 당시 상황을 그려내듯 상상하고 소환할 수 있다. 경남여성가족재단 이정희 연구원이 쓴 내용을 보태면 1980년대 후반부터 섬유산업이 사양산업으로 들어섰고, 한일여실고도 이에 맞춰서 전산, 기계 분야로 학생들을 양성했다.

하지만 학생들이 어느 시점부터 한일합섬에서 일하지 않게 됐는지, 명확히 하는 자료를 확보하지 못했다. 이 또한 언니야들 기억으로 채워나가야 할 부분이다. 다만 시점을 유추할 수는 있다. 1984년 3월 7일에 교내에 전산실이 열리고 1989년 10월 12일에는 한일여자고등학교로 학교명이 바뀌었다. 전신계산기과 24학급으로 만들어 한일전산여자고등학교 인가가 된 것은 1992년 12월 23일이다. 이때 산업체 부설 학교에서 정규 고등학교로 전환했다. 주간 36학급, 야간 6학급으로 학칙이 바뀐 건 1997년 8월 26일이라고 한일여고는 누리집에 기록하고 있다.

그럼에도 도내에서 산업체 성격을 띤 학교로 가장 오래 명맥을 유지한 곳이 마산 한일전산여고임은 확실해 보인다. 2001년에 나온 기사를 통해 분석해 보면 도내 산업체 특별 학급은 마산 한일전산여고, 도내 산업체 학교는 양산 태창정보고 각 1곳이었다. 이때 마산 한일전산여고의 2학급 60여 명은 낮엔 의령 공장에서 일하고 밤엔 학교서 공부했다고 적혀있다.

2024년 한일여자고등학교 개교 50주년을 맞아 문연 ‘50년관’에서 김선흥 교장이 보관할 자료를 살펴보고 있다. /이동욱 기자

창원 한일여자고등학교에 있는 ‘팔도잔디’ 광장. /주성희 기자

한일합섬과 한일여실고는 서로 다른 법인이었기 때문에 하향하는 섬유산업이 학교 존폐에 큰 영향을 미치지 않았던 모양이다. 산업체 학교에서 전산 실업 고등학교로 전환했다. 이후로 한일여고도 산업구조 변화, 시대 상황에 발맞춰 학과·학칙을 변경하며 적응해갔다.

전산 분야로 바뀌고 야간·주간반 제도가 없어지면서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학교에서 공부하는 생활은 사라진 것으로 보인다. 이후 한일전산여자고등학교는 2011년에 웹솔루션과, 컴퓨터정보기술과, 컴퓨터응용디자인과로 개편했다.

지금의 한일여자고등학교로 학교 명칭이 다시 돌아오게 된 시기는 2015년 7월이다. 현재 마산 한일여고는 미디어콘텐츠과, 스마트디자인과, AI소프트웨어과, 3D융합디자인과, 공공사무행정과가 있는 특성화고등학교다. 지난 1월 기준 졸업생은 4만 6456명이다.

마산 한일여고는 여전히 산업체 학교 시절의 기억과 정체성을 잃지 않으려 애쓰고 있다. 2024년 50년관을 설립한 것도 그렇고, 언니야들이 고향에서 갖고 와 조성한 ‘팔도잔디’도 그대로 남겨두고 이를 현판으로 기록해 두고 있다.

김선흥 마산 한일여고 교장은 재학생에게 선배들의 열정과 노력을 전한다. 그때 언니야들의 노고는 지금의 마산, 한일여고, 더 나아가 그들 자신을 가장 단단하게 만들어주는 뿌리였다고.

/주성희 기자

※ 한일합섬·한일여실고 언니야들을 더 만나고 싶습니다.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 주고 싶으신 분은 주성희 기자(010-9211-4818·hear@idomin.com)에게 연락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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