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직사회 새 바람
대구 달서구청 직원 15명이 활동하는 동아리 ‘달서AI연구소’는 인공지능(AI)에 관심 있는 직원들이 정보를 나누기 위해 만든 모임이다.
‘평생직장’의 안정성과 연금만으로는 젊은 공무원들의 기대를 채우기 어려워졌다. 대구에서는 지난 10년간 재직 기간 5년 미만 공무원 497명이 스스로 공직을 떠났다. 공직에 남은 이들도 퇴근 후 배움과 운동에서 삶의 만족을 찾으며 자신만의 미래를 준비하고 있다. 저연차 공무원의 이탈 현황과 퇴근 후 일상을 통해 달라진 공직관을 살펴보고 이들이 오래 머물고 싶은 공직사회의 조건을 짚어본다.
◇입직 5년도 안 돼 떠난 공무원, 대구서 10년간 497명
2일 대구신문 취재를 종합하면 2016년부터 지난해까지 10년간 대구에서 나온 재직 기간 5년 미만 의원면직자는 497명으로 집계됐다. 의원면직은 공무원이 본인의 의사로 사직을 신청해 공직을 떠나는 것을 뜻한다. 5년 이상 10년 미만인 124명까지 합하면 재직 10년 미만 퇴직자는 총 621명이다.
5년 미만 의원면직자는 2016년 43명에서 2021년 67명으로 늘었다. 이후 2022년 56명→2024년 48명으로 줄었으나 지난해 55명으로 다시 증가했다. 한 달에 4~5명꼴로 사직한 셈이다.
지난해 5년 미만 의원면직자는 달서구가 11명으로 가장 많았다. 이어 대구시와 북구가 8명, 수성구 7명, 동구·군위군 5명, 달성군 4명, 중구·서구 3명, 남구 1명 순이었다.
하위 직급에서는 퇴직자 10명 중 9명 이상의 사유가 의원면직으로 나타났다. 국가통계포털에 따르면 2024년 기준 대구 전체 8급 이하 일반직 공무원 퇴직자 71명 가운데 66명(92.9%)이 스스로 공직을 떠났다. 2016년에는 퇴직자 65명 중 49명, 2020년에는 41명 중 39명이 의원면직이었다.
전체 직급으로 범위를 넓혀도 의원면직 규모는 과거보다 커졌다. 대구 전체 공무원의 의원면직자는 2016년 92명→2022년 185명으로 늘었다.
한편 공직을 유지하며 외부 활동을 병행하는 겸직허가도 늘었다. 대구시 7급 이상 공무원의 겸직허가 건수는 2023년 26건에서 지난해 54건으로 약 2배 늘었다. 유형별로는 평가위원 등 기타 활동 28건, 기관·단체 임원 13건, 외부강의 12건, 인터넷 개인방송 1건이었다.
공무원들의 여가와 자기계발에 대한 관심은 통계에서도 엿볼 수 있다. 2023년 인사혁신처가 전국 공무원 95만610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공무원 총조사(복수응답)에 따르면 여가 활용 선호에서 영상시청이 20.4%로 가장 많았고 관광 19.5%, 스포츠 활동 16.3%, 문화 예술 관람·참여 14.8%, 자기계발 활동 8.4% 순이었다.
외국어를 이해할 수 있다고 답한 공무원은 전체 응답자의 70.6%로 나타났다. 언어별로 영어가 80.2%로 가장 많았고 일본어 10.3%, 중국어 4%, 프랑스어 2.2%, 독일어 1.5% 순이었다.
퇴직 후 희망하는 활동은 취미·여가활동이 44%로 가장 많았다. 재취업 28%, 창업 11.2%, 사회봉사활동 6.3% 등이 뒤를 이었다.
◇퇴근 후엔 AI 공부·테니스…배움과 운동으로 채우는 일상
공직에 남은 직원들은 배움과 운동으로 일상을 채우고 있다. 관심사가 같은 동료들과 새로운 기술을 익히거나 함께 땀을 흘리며 업무 밖에서 성장과 교류의 기회를 찾는다.
대구 달서구청 직원 15명이 활동하는 동아리 ‘달서AI연구소’는 인공지능(AI)에 관심 있는 직원들이 정보를 나누기 위해 만든 모임이다. 회원들은 매월 둘째·넷째 화요일 오후 6시 30분부터 약 1시간 30분 동안 모여 AI를 공부한다.
최신 AI 동향과 업무 활용법을 공유하고 AI에 원하는 기능을 설명해 코드를 만드는 ‘바이브코딩’으로 앱 제작에도 도전한다. 직접 만든 앱 가운데 업무에 도움이 될 만한 것은 선별해 다른 직원들과도 공유하고 있다.
동아리 회장인 신희섭 디지털정책팀장은 “AI를 이용하면 업무 효율성을 높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며 “관심 있는 직원들끼리 함께 공부하면 더 도움이 될 것 같아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고 말했다.
업무와 배움을 병행하는 일이 늘 순조로운 것은 아니다. 일이 몰리면 예정된 모임을 미루기도 한다. 회원들은 업무 여건에 맞춰 일정을 조정하며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신 팀장은 “자기계발과 개인 생활을 꾸준히 이어가려면 개인의 열정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며 “회원들이 달서구의 인공지능 전환에 주축이 돼 대구에서 AI를 가장 잘 활용하는 기초지자체가 되는 데 기여하고 싶다”고 말했다.
운동으로 활력을 얻는 직원들도 있다. 2016년 공직에 입문한 정하영 주무관은 2024년부터 북구청 공무원 26명이 소속된 테니스 동아리 ‘북구 테니스 클럽’에서 활동하고 있다. 최근 들어 5년차를 비롯한 저연차 공무원들의 가입도 늘고 있다.
회원들은 매주 일요일 오전 3시간가량 모여 운동한다. 기본기를 익혀야 랠리와 경기를 즐길 수 있는 만큼 평일 퇴근 후에도 개별적으로 강습을 받으며 실력을 키우고 있다.
정 주무관은 “회원들이 서로 부족한 부분을 알려주며 실력을 쌓고 운동을 매개로 다른 부서 직원들과도 친분을 형성하고 있다”며 “편하게 인사를 나누고 소통할 동료가 늘면서 직장에 대한 소속감과 만족도도 높아진 것 같다”고 말했다.
북구는 ‘직원취미클럽’ 제도로 직원들의 취미활동을 지원하고 있다. 테니스 클럽도 활동 지원금을 테니스장 임차료와 운동용품 구입 등에 활용해 회원들의 비용 부담을 덜고 있다.
대구, 10년간 10년 미만 621명 퇴직
N잡러 늘며 겸직허가 2년 새 2배
장기근속보다 ‘삶 균형’에 가치
북구청, 취미활동지원제도 호응
겉치레 행정 탈피·정당한 보상
악성 민원 보호 체계 구축 시급
정 주무관은 “일할 때는 책임감 있게 일하고 쉴 때는 충분히 쉴 수 있는 문화가 정착돼야 한다”며 “여가활동 지원으로 청년 공무원들이 취미와 자기계발을 이어간다면 더욱 만족스럽게 공직 생활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삶의 균형과 성장 중시…공직사회 조직문화도 바뀌어야
젊은 공무원들이 승진뿐 아니라 퇴근 후 생활과 자기계발에 가치를 두면서 공직사회의 조직문화도 달라져야 한다는 의견이 나온다. 정년과 연금 등 장기근속에 따른 보상과 함께 현재의 근무 여건과 개인의 성장 가능성을 살펴야 한다는 것이다. 공직에 오래 머무는 것 자체를 목표로 삼기보다 일과 생활의 균형을 유지하며 어떤 삶을 살 수 있는지가 중요해졌다는 분석이다.
김영진 대구공무원노동조합 위원장은 “젊은 공무원들은 정당한 대가와 권리가 보장돼야 하는 노동자라는 인식이 뚜렷하다”며 “퇴근 후 운동이나 외국어 공부에 몰두하는 현상을 단순한 유행이나 개인주의가 아닌 조직에 대한 불신과 불공정, 정당한 보상 체계의 미비 속에서 자신의 건강과 미래를 지키려는 선택일 수 있다”고 분석했다.
현장에서는 개인의 시간을 존중하는 문화뿐만 아니라 업무 방식을 개선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불필요한 자료 취합과 형식적인 보고서 작성, 보여주기식 행사 등에 근무 시간을 소모하는 대신 업무의 목적과 책임 범위를 명확히 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김 위원장은 “연가와 유연근무 등 제도를 확대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며 “제도가 있어도 상급자나 동료의 눈치를 보며 사용을 망설이는 상황을 줄이려면 인력 충원과 업무 분담 등 실제로 쉴 수 있는 여건을 함께 마련해야 한다”고 말했다.
악성 민원으로부터 직원을 보호하는 체계도 과제로 꼽힌다. 폭언, 협박 등 피해를 담당자 스스로 감내하거나 직접 대응하도록 두면 조직에 대한 신뢰가 떨어질 수 있다는 설명이다. 피해 발생 때 기관이 즉시 개입하고 법적 대응과 신상 보호 등을 지원해 직원이 혼자 문제를 떠안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게 노조의 입장이다.
김 위원장은 “젊은 공무원들이 일을 피하려는 것이 아니라 행정 내부의 비효율과 불합리한 관행을 거부하고 본연의 업무에 집중하려는 것”이라며 “사명감을 앞세워 무임금 노동과 희생을 요구하는 조직문화부터 바꿔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일한 만큼 정당한 보상을 받고 부당한 외압과 폭력으로부터 조직의 보호를 받으며 퇴근 이후에는 자신의 삶을 누릴 수 있다는 믿음이 있어야 젊은 공무원들이 공직에 오래 머물 수 있다”고 말했다.
김유빈·한정웅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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