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묵’은 내가 쓰는 칼럼난의 제목이고 8년 전 펴낸 책 제목이기도 하다. 희망 때문에 하는 일이 절망에 얼마나 취약한지를 실감한 뒤 붙잡은 말이었다. 희망도, 절망도 없이 그냥 걸어갈 수는 없을까. 묵묵은 인문학에 대단한 희망을 품고서 현장인문학에 뛰어들었던 나 자신에 대한 반성이었다. 내가 버려야 할 것은 인문학도 현장도 아닌, 희망이었다. 인문학(최소한 ‘나의 인문학’)이 있어야 할 곳이 현장이라는 생각과 여기서 공부할 때 느끼는 기쁨이면 됐지, 미래 성과에 대한 기대를 공부의 이유로 삼을 것은 아니었다.
며칠 전 출간된 네덜란드 작가 토미 비링하의 <희망 없는 낙관주의>(어크로스)는 현장인문학 활동에 대한 내 오랜 반성을 되새김질할 기회를 주었다. 비링하가 “지극히 현실적인”, 그래서 매우 “어두운” 소설을 펴냈을 때 사람들은 자주 물었다고 한다. ‘희망은 어디에 있는가’. 하지만 그는 희망에 대해 생각해본 적이 없다고 했다. 무엇보다 기후위기에 대한 엄청난 양의 과학 문서를 읽고 나서는 희망이란 개념 자체를 떠올릴 수 없게 되었다고 했다.
기후위기·민주주의 위기의 시대
희망은 절망의 골짜기만 깊게 해
우리가 살고 싶은 삶, 세상을 위해
묵묵히 해야 할 일 하자, 기대 없이
인류는 미래가 암울했던 때를 여러 차례 겪어왔다. 핵전쟁 위협에 시달리던 냉전시대에도 “미래 위에는 밤이 드리워져” 있었다. 그러나 핵전쟁의 위협과 기후위기에는 중요한 차이가 있다. 핵전쟁과 달리 기후위기는 일어나버렸다. 미래가 암울하다고 말하는 시대는 그래도 희망의 거처인 미래가 존재하는 시대였다. 지금은 미래 자체가 사라지는 중이다.
이제 기후위기를 ‘지어낸 문제’라고 말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다만 위기를 부정했던 사람들 상당수가 ‘조치’를 불신하는 사람들로 바뀌었을 뿐이다. 위기의 대책들이 “너무 비싸고 번거롭다”는 것이다. 어떤 이들은 비링하가 ‘도발적 상대주의’라고 부르는 길을 택한다. 생물종이 일부 사라진다고 해도 인류 생존에는 별문제가 없다는 식이다. 어떤 이들은 기술이 문제를 해결해줄 것이라고 믿는다. 그러나 빅테크들이 보여주는 것처럼 기술은 기후위기나 민주주의 위기에 대한 해법이기는커녕, 권력과 부를 소수에게 집중시키고 타자에 대한 증오를 양산하는 알고리즘을 만들어냈을 뿐이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이런 현실에 절망한 채 그냥 살아간다.
미래 상실에 대한 이 모든 반응의 공통점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 점에서는 권력자나 부자들도 마찬가지다. 이 책에 소개된 미디어 이론가 리시코프의 일화는 자못 충격적이다. 그는 ‘슈퍼 리치들’인 빅테크 기업가들의 모임에 초대받았다고 한다. 그런데 그들이 그에게 물었던 것은 기술의 미래가 아니라 종말에 대한 것이었다. 파국을 막을 방법이 아니라, 파국이 닥쳤을 때 생존에 유리한 곳은 어디이고 사람들을 어떻게 통제해야 하는지를 궁금해했다. 파국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 이들은 다만 마르크스가 ‘모든 자본가의 표어’라고 말했던바 “대홍수가 닥치겠지만 그건 뒷일이지!”의 정신으로 살고 있었다.
어쩌면 우리는 아무 일도 하지 않는 게 아니라 아무 일이나 저지르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희망과 공포는 반대말이지만 둘은 종종 가면을 바꾸어 쓴다. 주식에 희망을 거는 사람은 현실에 공포와 절망을 느끼는 사람일 수 있다. 어떤 때는 희망 자체가 공포로 다가오기도 한다. 수천조원을 인공지능(AI) 산업에 퍼붓고, 생태적 우려가 큰 데이터센터를 곳곳에 짓겠다는 현 정부의 포부가 내게는 그렇다. 이럴 때는 비링하가 인용한 아렌트의 말이 옳아 보인다. “위기의 순간 최악의 사람들은 두려움을 잃고, 최선의 사람들은 희망을 잃는다.”
그래서 희망을 갖자고? 희망으로 무언가를 시도할 수는 있다. 그러나 희망 때문에 하는 일들은 지속이 어렵고 그만큼 절망에 더 취약하다. 희망이 밀어올린 환상의 높이는 그대로 절망으로 추락할 때의 깊이가 된다. 이 점에서 나는 ‘희망 없는 낙관주의’가 낫다는 비링하의 말에 공감한다.
미래를 걱정하는 아버지들은 언제나 자식들에게 물어왔다. ‘그대들, 무엇을 할 것인가’. 그러나 이것은 아버지들 스스로에게 던져야 할 물음이다. 미래 상실은 지금 일어나는 일이기 때문이다. 비링하는 미래를 지키기 위해 ‘나무를 심겠다’고 말한다. 세상일에 관심 끄고 개인 일에 몰두하겠다는 뜻이 아니다. 내 생각에 그의 답변은 희망 없이, 그저 자신이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겠다는 다짐이다. 이것은 희망 없이 꿈을 꾸는 것과 같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우리가 살고 싶은 삶, 우리가 살고 싶은 세상이 어떤 것인지, 기본 물음을 악착같이 붙들고 묵묵히 행하는 것이다. 세상에 대한 아무런 기대도 없이!
고병권 노들장애학궁리소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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