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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고래 따라 울산 앞바다에 온 이양선

1848년 4월, 울산 앞바다에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거대한 범선(帆船)이 나타났다. 조선의 판옥선이나 어선과는 전혀 달랐다. 범상치 않은 기세를 풍기며 바다를 가르던 그 배는 순식간에 봉군과 연안 사람들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주민들은 두려움을 먼저 느끼며 공포에 휩싸였다.

김잠출 울산역사연구소 사무국장

1848년 4월, 울산 앞바다에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거대한 범선(帆船)이 나타났다. 조선의 판옥선이나 어선과는 전혀 달랐다. 범상치 않은 기세를 풍기며 바다를 가르던 그 배는 순식간에 봉군과 연안 사람들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주민들은 두려움을 먼저 느끼며 공포에 휩싸였다. 경상좌병영은 곧바로 조정에 보고했다. 조정은 즉시 삼남 지방에 경계를 강화하라는 명령을 내렸을 뿐, 그 배가 어디서 왜 왔는지 등 정체를 알지 못했다. 당시 조선에서 낯선 배의 출현은 단순한 해상 사건이 아니라 국가 안보와 직결된 중대한 문제였다. (울산을 불안에 떨게 했던 배는 나중에 고래 따라 동해에 온 미국 포경선으로 확인됐다) 당시 울산 각지의 봉수대 봉군이나 해안 사람들에겐 그저 '이상한 배(異樣船)'였다. 이 한 척의 배가 울산이 서구와 처음 마주하는 역사의 출발선이 되었다.

'조선왕조실록'은 정체불명의 외국 선박을 처음엔 '황당선(荒唐船)'으로 기록했다. 대부분 청나라 어선이나 상선들이었다. 하지만 황당선은 단순한 어선이 아니었다. 조선 연안을 드나들며 불법 어로를 행하고 때로 밀무역과 약탈까지 서슴지 않았다. 떼 지어 나타나 해적선으로 돌변하기도 해 조선은 이들을 경계했다. 울산도 예외가 아니었다.

1627년(인조 5년), 조정은 황당선을 붙잡지 못한 울산의 수군 지휘관들을 문책했다. 또 1704년(숙종 30년) 당선(唐船)이 울산 앞바다에 포착한 사실을 즉시 보고하지 않은 병사와 수사를 추궁했다. 반면 언양 현감 김헌조는 이양선이 자주 출몰할 때마다 항상 해역을 경계하고 조정에 즉각 치보를 올리는 등 발 빠르게 대응했다. 이런 기록은 조선왕조실록과 승정원일기, 비변사등록, 각사등록 등에 여러 번 언급되고 있다. 이양선이 가장 많이 출몰한 때는 헌종 14년 여름과 가을경이다. "이양선이 경상 등 5개 도에 출몰하는데, 널리 퍼져서 추적할 수 없었다. 간혹 뭍에 내려 물을 긷기도 하고 고래를 잡아 양식으로. 그 수를 셀 수 없이 많았다"라고 기록할 정도로 급증했다.

1848년(헌종 14년) 4월 울산 앞바다에 '이상하게 생긴 배(이양선)'가 나타났다. 이 배는 사실 미국 포경선이었다.(AI생성 이미지). 김잠출 제공

18세기 후반, 중국 어선과는 전혀 다른 형태의 이양선(서양 범선)이 동해를 휘젓기 시작했다. 1797년 영국 해군 장교 윌리엄 브로턴이 이끄는 탐험선 프로비던스호가 부산 앞바다를 항해했고, 그에 앞서 1787년 프랑스의 탐험가 라페루즈가 동해안을 탐사하며 부산과 울산, 경주, 포항 앞바다를 지나 북상했다. 조선은 이를 거의 인식하지 못했지만, 서양인들은 이미 동해를 새로운 항로와 탐사의 무대로 바라보고 있었다. 처음엔 탐험선이었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울산 앞바다와 동해에 고래를 쫓아온 서양 포경선으로 확인되었다. 당시 고래는 그들에게 곧 '움직이는 유전'이었고 동해와 울산 앞바다는 국제적 포경장이었다. 1848년에만 50여 척의 미국 포경선이 대한해협을 지나 동해에 들어왔고 프랑스 4척과 2척의 독일 포경선까지 더해 긴수염고래와 귀신고래를 잡았다는 분석도 있다.

1540년 황해도 바다에 처음 나타난 황당선에서 시작해, 1797년 서양 탐험선 출현, 1848년 울산 앞바다의 포경선까지 낯선 배들은 계속 조선의 바다를 드나들었다. 그 배들은 조선 사람들에게 불안과 호기심을 동시에 안겨 주었고 그 만남 속에 새로운 시대가 열리고 있었던 것이다. '황당한 배'와 '이상한 모양의 배'는 울산이 세계와 처음 마주했던 역사의 증거였다. 그리고 울산과 서구의 만남의 중심에는 고래가 있었다.

한반도를 처음 방문한 미국인도 포경선원이었다. 1852년 12월 21일(음력, 철종 3년) 부산 동래부 용당포 앞바다에 미국 포경선이 표착했다. 미국인 42명, 일본인 2명이 승선해 있었다. 조선과 미국이 최초로 공식 조우한 순간이었다. 현지 보고서는 "코가 높고 눈은 파랗다. 漢語·淸語·倭語·蒙古語를 모두 알지 못했다. 붓으로 쓴 글은 구름과 산 같은 그림을 그려 알 수 없었다. 배는 杉木 판대기에 銅鐵을 깔아 튼튼하고 정밀해 물방울 하나 스며들지 않는다. 그러면서 자신들을 가리켜 '며리계(America)'라며 여러 번 지껄였다"고 기록해 놓았다.

1890년대 근대포경이 도입되면서 장생포에도 서양인들이 들어왔다. 고래 탐험 과학자 앤드류스(미국)와 여행 작가 겸 기자 애미 스이인(일본) 그리고 멜손 선장과 요르덴센(노르웨이), 한스 후룸 포수와 존슨 선장, 러시아의 포경업자와 기술자 등이 고래를 따라 울산에 처음 상륙한 이방인들이었다.

김잠출 울산역사연구소 사무국장

김잠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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