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손해보험업계 2위인 DB손해보험의 지배구조가 위기를 맞았다. 공정거래위원회의 검찰 고발에 이어 ‘행동주의 펀드’ 얼라인 파트너스의 이사회 진입까지 현실화하면서 김준기 회장 일가의 불투명한 경영행보가 수면 위로 드러나고 있다. 이는 금융당국의 대주주 적격성 심사로 이어질 수 있다. 최악의 시나리오는 적격성 심사에서 DB손보 중심의 금융부문을 그룹에서 떼어내는 계열분리 혹은 지분매각 명령이 내려지는 경우다. 최근 김 회장의 딸 김주원 부회장과 아들 김남호 부회장의 움직임은 ‘만약의 상황’에도 대비하는 모습이라는 관측을 낳고 있다.
김준기 DB그룹 창업회장
DB그룹의 복잡한 상황은 오너 일가의 행보와 직결돼 있다. 불미스런 사건으로 인한 김준기 회장의 2선 퇴진, ‘미국 유흥가 큰손’ 루머가 돌았던 장녀의 등장, 위장 계열사 운영과 불투명한 지배구조 등이 하나의 고리로 얽혀있다.
DB그룹 오너 일가는 창업주 김준기 회장, 1975년 생인 아들 김남호 명예회장, 1973년생 맏딸 김주원 부회장으로 구성된다. 통상 아버지가 명예회장, 자녀들이 회장이나 부회장인 다른 대기업과 확연히 구분된다. 더욱 혼란스러운 모습은 그룹의 공식 회장직은 이수광 전 DB손보 사장이 맡고 있다는 점이다. 2020년 부친에 이어 경영권을 승계한 것처럼 보였던 김남호 회장이 지난해 명예회장으로 갑작스럽게 ‘영전’하면서 벌어진 풍경이다.
현재 시점 기준으로 김준기 회장 일가의 공통분모는 ‘은둔’에서 찾을 수 있다. 사실상 업무 정지 상태인 김남호 명예회장은 지난해 6월 DB그룹 인사 발표 후 이취임식도 없이 조용히 짐을 싸 해외로 출국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이후 약 8개월간 미국 등에 머물며 외부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잠행을 이어갔다.
이후 한국에 들어와 부친과 같은 층에 마련된 집무실에 출근하며 김준기 회장을 조용히 보필해온 것으로 알려져있다. 그러다 올해 3월 DB손보 주총을 앞두고 갑자기 입장문을 내며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회사 경영 관련해 부친과 일부 이견이 있었던 적은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부친께 맞설 생각을 한 적은 없었다. 앞으로도 그럴 일은 없을 것”이라는 내용이 담겼다.
김주원 DB그룹 부회장
갑작스런 그의 입장문은 재계에서 ‘효도 반성문’으로 회자되는데, 여기에는 이유가 있다. 부친의 ‘애착 기업’인 DB하이텍 매각 시도를 완전히 접겠다는 뜻이 담겼다는 해석이다. DB하이텍을 향한 김준기 회장의 집념은 널리 알려져 있다. IMF외환위기 당시에는 사재를 털어 살려냈고, 2013년 그룹이 유동성 위기에 처했을 때는 그룹의 모태인 동부건설과 핵심 제조사인 동부제철, 동부대우전자 등을 매각하는 와중에도 끝까지 지켜냈다. 그런 DB하이텍을 아직 경영권 승계 과정에 있는 아들이 팔겠다고 나섰으니 부친의 격노를 부른 것은 예정된 수순이었다는 것이 재계의 시각이다.
다만, 김남호 회장의 ‘반성문’이 지배구조 변화까지 막을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DB손보가 지난해 인수한 미국 보험사 포테그라(Fortegra)와 관련한 금융당국의 대주주 적격성 심사가 막바지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금융당국의 적격성 심사는 공정거래위원회의 위장계열사 적발로 인한 검찰 고발 사건과 연결되어 있는데, 김준기 회장 일가의 불투명한 지배구조가 걸림돌이 될 가능성이 거론된다. 금융회사의 지배구조에 관한 법률은 대주주가 공정거래법 위반으로 벌금형 이상의 처벌을 받을 경우 대주주 적격성 심사 대상이 된다고 규정하고 있다. 금융당국은 자회사 편입 승인 과정에서 재무 지표뿐 아니라 대주주의 법 위반 전력과 경영진의 도덕성을 엄격히 따진다. 이미 성비위 혐의로 구속된 전력까지 있는 김준기 회장이 이번에는 위장계열사 운영으로 다시 검찰에 고발된 만큼 금융당국의 판단에 영향을 미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눈길을 끄는 움직임은 이와 관련한 김준기 회장측의 대응이다. 재계 일각에서는 제조·반도체 부문과 금융을 떼어내는 계열 분리 시나리오가 꾸준히 제기되고 있다. 이는 김준기 회장의 맏딸 김주원 DB그룹 부회장의 보폭 확장과 맥을 같이 같이한다. 김주원 부회장은 해동화재(현 롯데손해보험의 전신 중 하나) 오너가 출신인 김주한씨와 1999년 결혼했다. 일본 게이오대학을 졸업한 남편이 투자은행(IB) 메릴린치에서 근무하게 되자 함께 미국으로 건너간 그는 오랜기간 그룹 경영에는 직접 관여하지 않았던 것으로 알려져있다. 김 부회장의 결혼생활은 순탄치만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두 자녀를 둔 김주원 부회장 부부는 2011년 이혼한 것으로 전해지며, 이후 뉴욕 한인타운 유흥가 등에서 김 부회장의 사생활을 둘러싼 잡음이 들리기도 했다.
베일에 싸여있던 김주원 부회장이 DB그룹 경영일선에 등장한 것은 2021년 DB하이텍 미주법인 사장으로 전격 부임하면서다. 그는 미국 현지에서 반도체 수주 확대 전략을 수립하고 조직을 재정비하는 등 해외 사업 실무를 담당했다. 당시만 해도 그의 등장은 ‘장녀의 경영수업’ 정도로 해석됐다. 하지만, 2022년 7월 경영에 합류한 지 불과 1년 만에 그룹 부회장으로 파격 승진하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당시는 김남호 명예회장이 부친의 동의 없이 DB하이텍 매각을 검토했다는 사실이 알려지며 부자 갈등이 깊어지던 시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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