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보 없는 신용여신 88.6%… ‘사후 대응’에서 ‘사전 통제’로 무게 이동
-확률·손실률 아닌 ‘신호 탐지’… 금융 리스크 관리, 모델 구조가 바뀐다
한국수출입은행 본점 전경 [사진=수은]
수출입은행이 여신감리의 기준을 다시 세운다. 신용을 평가하고 사후 점검하는 수준을 넘어, 부실이 현실화되기 전 단계에서 ‘이상 신호’를 잡아내는 체계로의 전환이다. 금융이 더 이상 결과를 관리하는 산업이 아니라, 확률과 분포를 통제하는 산업으로 바뀌고 있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14일 수은에 따르면, 인공지능(AI)을 활용한 여신감리 조기경보모형 구축을 위한 컨설팅에 착수한다. 입찰 공고는 16일 예정돼 있다. 이번 사업은 여신감리 전반의 제도, 조직, 프로세스, 성과를 다시 설계하는 구조 개편에 가깝다.
여신감리는 신용평가, 여신승인, 사후관리까지 전 과정의 의사결정이 적정하게 이뤄졌는지를 독립적으로 점검하는 기능이다. 그런데 수은의 구조는 일반 상업은행과 다르다. 전체 여신의 88.6%가 담보가 없는 신용여신이다. 담보가 없는 구조에서는 부실 발생 이후 회수보다, 부실 발생 이전의 신호 탐지가 자산건전성 관리의 핵심이 된다.
금융 리스크 관리의 언어로 보면, 기존 체계는 예상손실을 중심으로 작동해 왔다. 이는 부도확률, 손실률, 익스포저(exposure at default)를 기반으로 손실을 계량화하는 방식이다. 그러나 이 구조는 이미 리스크가 일정 수준 현실화된 이후의 상태를 반영한다는 한계가 있다.
이번 조기경보모형은 이보다 앞단으로 들어간다. 재무제표에 나타나기 전의 비정형 데이터, 거래 패턴, 결제 지연, 공급망 변화 등 ‘행동 기반 데이터’를 통해 정상 상태에서의 이탈을 탐지한다. 금융권에서는 이를 이상 징후 탐지라고 부른다. 핵심은 숫자가 아니라 ‘변화의 방향과 속도’다.
예를 들어 기업의 현금흐름 악화는 손익계산서나 현금흐름표에 반영되기까지 시간이 걸린다. 하지만 매출채권 회전일수, 지급 지연 빈도, 거래 상대방 변화는 훨씬 빠르게 움직인다. AI 모델은 이 데이터를 학습해 정상 범위에서 벗어나는 패턴을 포착하고, 신용위험 상승 이전 단계에서 경고 신호를 발생시킨다.
이 과정에서 중요한 개념은 손실 분포(loss distribution)다. 금융기관은 평균적인 손실보다 ‘극단 위험 중에서도 확률분포의 꼬리에 해당하는 손실인 테일 리스크(tail risk)’를 더 두려워한다. 이는 극단적인 손실이 전체 포트폴리오를 훼손하기 때문이다. 조기경보모형은 이러한 꼬리 위험을 사전에 줄이기 위한 장치다. 단순히 손실을 계산하는 것이 아니라, 손실이 발생할 확률 자체를 구조적으로 낮추는 접근이다.
수은의 최근 지표는 이러한 변화의 필요성을 보여준다. 여신잔액은 2021년 107조7000억원에서 2025년 140조7000억원으로 증가했다. 반면 고정이하여신 비율(non-performing loan ratio)은 1.72%에서 0.90%로 낮아졌다. 자산이 커지면서도 건전성이 개선된 것은, 경기 요인이라기보다 리스크 관리 체계가 제대로 작동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이번 AI 기반 조기경보모형은 여기서 한 단계 더 나아간다. 기존 재무정보 중심 모델에서 벗어나, 외부 데이터와 비정형 데이터까지 결합한 확장형 리스크 프레임워크로 전환하는 것이다. 이는 스트레스 테스트, 시나리오 분석(scenario analysis)과 결합될 경우, 특정 산업이나 국가 리스크가 포트폴리오에 미치는 영향을 실시간으로 반영할 수 있는 구조로 이어진다.
여신감리의 역할도 달라진다. 과거에는 사후 점검(post-audit)에 가까웠다면, 앞으로는 리스크 탐지와 경보 배분의 중심축이 된다. 승인 부서와 사후관리 부서 사이에서 데이터를 기반으로 위험 신호를 전달하고 대응 속도를 조절하는 ‘리스크 관제 기능(control tower)’으로 이동하는 것이다.
금융권에서는 이를 포트폴리오 기반 리스크 관리의 심화로 본다. 개별 기업의 신용을 평가하는 단계를 넘어, 전체 자산의 상관관계, 집중도, 변동성을 함께 관리하는 방향이다. 결국 핵심은 하나다. 손실이 발생한 뒤 대응하는 것이 아니라, 손실이 발생할 가능성 자체를 사전에 줄이는 구조를 만드는 것이다.
수은 관계자는 “첨단산업과 혁신성장 기업에 금융을 공급하면서도 자산건전성을 유지하려면 잠재 리스크를 정교하게 관리해야 한다”며 “AI 기반 조기경보모형은 불확실성을 통제하는 핵심 도구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뉴스로드] 최지훈 기자 jhchoi@newsroad.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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