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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6세 노병의 확신 “발전한 대한민국 보며 우리의 희생, 가치 있었다”
입력:
2026-06-07 21:43
수정:
2026-06-07 21:45
국가보다 먼저 기억해준 한국…노병들이 보낸 감사의 편지
오늘날 우리가 누리는 자유와 번영은 이 땅에 흘려진 참전용사들의 피와 희생이라는 빚 위에 세워졌다. 올해로 20년째를 맞은 경기도 용인 새에덴교회(소강석 목사)의 한국전 참전용사 보은 행사가 지난 5일(현지시간) 미국 버지니아주 레스턴의 한 호텔에서 열린 가운데, 이곳에서 두 명의 한국전 참전용사와 전몰장병의 조카딸을 만났다. 그들이 한국을 향해 보내온 감사의 말은, 총성이 멎은 지 70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뜨거웠다.
“돌아오지 못한 전우들의 희생, 충분히 가치 있었다”
폴 H 커닝햄 박사. 새에덴교회 제공
전국미한국전참전용사회(KWVA) 회장을 지낸 폴 H 커닝햄 박사(96)의 목소리는 낮게 떨렸지만 확신에 차 있었다. “돌아오지 못한 전우들이 ‘우리의 희생이 그럴 만한 가치가 있었냐’고 묻는다면, 나는 감히 단호하게 ‘그렇다. 충분히 가치가 있었다’라고 말할 것입니다.”
1950년 9월, 스무 살의 미 공군 하사로 한국 땅을 밟은 그는 경기도 김포와 서울 영등포 인근 레이더 기지에서 24시간 3교대로 모든 항공기를 감시했다. 오키나와를 이륙한 B-29 폭격기 경로까지 추적했고, 레이더 유지보수는 한 달에 겨우 한 시간만 허용될 만큼 임무는 긴박했다. 이런 공로로 미국과 한국 대통령 부대 표창을 동시에 받았다. 그는 “전투 병사 한 명이 최전방에서 싸우기 위해 뒤에서 10~11명의 지원 병력이 필요하다고 하는데 나도 그 일원으로서 소임을 다했다”고 담담하게 말했다. 총성이 아닌 레이더 화면 앞에서 버텨낸 976일이었다.
2023년 새에덴교회의 초청으로 방한했을 때, 그는 손자 케빈과 함께 73년 전 레이더를 가동했던 영등포의 그 언덕을 다시 찾았다. 일본이 모든 나무를 베어버려 민둥산이었던 고지는 울창한 숲으로 변해 있었다. 길목을 지키는 군 경비병에게 당시 레이더 사진을 꺼내 보이자 경비병은 놀란 표정으로 말했다. “지금도 같은 레이더 장비가 이 영구 기지 돔 안에 있습니다.” 손자는 그 순간을 카메라에 담았다. 70년 전 젊은 하사가 밤새 화면을 들여다보던 그 자리에, 그의 손자가 서 있었다.
젊은 시절의 커닝햄 박사. 교회 제공
그는 이번 행사에서 한복을 입은 한국 어린아이들과 마주쳤다. 아이들이 “저희가 어려울 때 도와주신 분들”이라며 인사를 건넸을 때 그는 말을 잇지 못했다. “경제 대국이 된 한국을 보는 것 자체가 우리 참전용사들에게는 가장 큰 감사이자 보람입니다. 미국에서는 젊은이들에게 과거의 희생을 충분히 새겨주지 못해 아쉬운데, 한국인들은 이 전쟁을 결코 잊힌 사건으로 내버려 두지 않을 것이라는 굳건한 확신을 안고 무덤에 갈 수 있게 됐습니다.”
한국전쟁이 미국에서 ‘잊힌 전쟁’으로 불려온 지 70여년. 커닝햄 박사는 “적어도 한국만큼은 그 이름을 허락하지 않을 것이라고 믿는다”고 했다.
전쟁의 상처, 신앙으로 극복
글렌 A 갈테리(왼쪽) 목사 부부. 교회 제공
미 해병 제7연대 소속 최전방 소총수로서 인천상륙작전과 장진호 전투의 혹독한 사선을 모두 넘나들었던 글렌 A 갈테리 목사(97)의 고백은 극적이다. 그가 속한 연대는 원산에서 장진호에 이르는 모든 진격 경로에서 선봉을 맡았고, 고립된 폭스 중대를 구출하기 위해 남쪽으로 치열하게 싸우며 전진했다.
인천에 상륙해 서울로 향하는 길, 북으로 패주하는 북한군의 후방을 차단하는 임무를 마쳤을 때만 해도 ‘전쟁이 거의 끝나가나 보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11월 중공군이 밀려왔다. 영하 40도를 밑도는 장진호의 칼바람 속에서 중공군 1개 사단에 포위당했을 때, 분대원 13명 중 살아남은 이는 그를 포함해 단 두 명뿐이었다. 총알구멍이 10여개 뚫린 그의 파카는 기적의 증거였다.
젊은 시절의 갈테리 목사. 교회 제공
“당시엔 길게 기도할 시간도 없었습니다. 그저 ‘하나님 도와주세요’라는 비명 같은 생각뿐이었죠.”
진짜 지옥은 살아 돌아온 뒤에 시작됐다. 매일 새벽 2시면 중공군이 덮치는 악몽이 그를 깨웠다. 무엇보다 그를 괴롭힌 것은 자신이 사살한 중공군 장교의 주머니에서 나온 사진 한 장이었다. 아내와 두 아이와 함께 활짝 웃고 있는 그 장교의 얼굴. ‘내가 저 여인을 과부로, 아이들을 고아로 만들었구나.’ 그것은 전쟁이 끝난 뒤에도 끝나지 않는 전쟁이었다.
글렌 A 갈테리 목사. 교회 제공
어느 새벽 2시, 고통을 이기지 못한 그는 화장실 변기 앞에 무릎을 꿇고 부르짖었다. “주 예수님, 저를 도와주셔야 합니다.” 그 순간, 어린 시절 언덕을 내려올 때 느꼈던 크고 따뜻한 감각이 다시 온몸을 감쌌다. ‘사랑한다. 너는 내 것이다.’ 눈물이 없다는 그가 그날 밤 펑펑 울었다. 자리에서 일어나 변기 위 거울을 보았을 때 몇 년 만에 처음으로 거울 속 자신의 얼굴이 마음에 들었다.
‘사람을 죽인 내가 목사가 될 수 있을까’라는 죄책감을 이겨내고 신학대학원에 진학해 목사가 됐다. 미국에서 12년 목회 후 카리브해와 아프리카 보츠와나의 오지 마을로 떠나 10년간 주민들과 똑같이 살며 복음을 전했다.
“나는 그 사람들을 섬기려면 그들과 함께 살아야 하고 그들 중 한 명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올해 97세가 되는 그는 “하나님은 내게 은퇴하라고 하신 적이 없다”며 지금도 영성 지도와 호스피스 및 영적 치유 사역으로 사람들을 돌보고 있다.
한국은 외삼촌을 기억했다
전몰장병의 조카 로빈 피아신(70)씨. 교회 제공
로빈 피아신(70)씨의 삼촌 윌리엄 찰스 브래들리 병장은 끝내 돌아오지 못했다. 미 육군 제2보병사단 제9보병연대 의무중대 소속이었던 그는 1950년 12월 1일, 청천강 인근 후퇴 작전 중 부상한 전우들을 돌보다 중공군의 포로가 되었다. 아군이 철수할 때 전방과 후방 모두 포위당했던 ‘죽음의 계곡(The Gauntlet)’에서 그는 북한의 포로수용소로 끌려가 숨졌고 유해는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 전투 중 두 차례 상처를 입어 퍼플하트 훈장을 두 번 받을 만큼 그는 늘 자신보다 전우를 먼저 생각한 의무병이었다.
아들을 잃은 피아신씨의 외할머니 패트리샤는 ‘골드 스타 마더(전사자 유가족 어머니 모임)’가 됐다. 피아신씨의 어머니도 직접 워싱턴으로 찾아가 정부에 정보를 요구하고 같은 처지의 유가족들을 곁에서 도왔다.
피아신씨는 어릴 때 어머니의 화장대 앞에 자주 앉았다. 화장대 위에는 항상 외삼촌의 사진이 있었다. “내 머리카락 색이 삼촌과 같은 갈색이라는 걸 보았고, 내 얼굴에서 삼촌의 이목구비를 발견했습니다. 삼촌은 저와 남동생들 안에서 여전히 살아 숨 쉬고 있는 것입니다.” 그녀는 지금 전쟁포로·실종자 유가족 단체 회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NARA) 조사를 통해 외삼촌이 숨질 때 곁에 의사가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됐을 때 그녀는 “길가에 혼자 버려진 게 아니었다”는 사실에 오랜 슬픔이 조금 가라앉는 것을 느꼈다. 새에덴교회의 보은 행사는 그에게 국가도 주지 못한 위로였다.
“미국 정부가 삼촌을 온전히 기억해 주기도 전에 한국교회가 먼저 외삼촌의 사진을 화면에 띄우고 이름을 불러주며 기억해 주었습니다. 아낌없는 사랑에 눈물이 났습니다. 외삼촌이 지금의 대한민국과 감사할 줄 아는 이들을 보셨다면 하늘에서 정말 감격하셨을 것입니다.”
레스턴(미국)=김아영 기자 singforyou@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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