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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2026 박정희] (54) 경제개발 성공 후 '전통문화 발전·계승' 천명

박정희 대통령이 1973년 10월 10일 경복궁 특설 전시장에서 열린 제4회 전자박람회를 참관하고 있다.

[2026 박정희] (54) 경제개발 성공 후 '전통문화 발전·계승' 천명

1971년 최초 문화 법안 ‘문예진흥법’

1973년 문화예술인 ‘문예 중흥’ 선언

제1차 문예중흥 5개년 계획도 확정

한국학·영화·문화재 등 대규모 투자

박정희 대통령이 1973년 10월 10일 경복궁 특설 전시장에서 열린 제4회 전자박람회를 참관하고 있다.

◇경제개발 성공 후 문화로의 자연스러운 전환

문화예술을 통해 인간개조가 가능하다고 보았던 박정희 대통령이 민족문화 융성을 바탕으로 한 문화예술 부문에 본격적으로 행동을 시작한 것은 1960년대 후반부터였다.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이 성공적으로 마무리되자 다음으로 시급한 문제였던 문화에 대한 관심은 자연스러운 귀결이었다.

자신감을 얻은 박정희 대통령은 1971년 7대 대통령에 취임하면서 문화정책의 방향을 천명했다. “선대의 빛나는 전통과 문화를 계승·발전시키고, 문예와 학술의 적극적인 창발로 문화 한국 중흥에 각별한 관심과 지원을 다 할 것입니다.”

1973년 예산교서에서는 “문예진흥 장기계획을 세워 선대로부터 물려받은 문화적 유산과 전통예술을 계승 발전시키고, 민족사상과 주체의 의식을 바탕으로 새마을운동과 체계화한 새로운 민족문화를 창조하는 한편, 문화시설을 확충하고 문화예술 인구의 저변을 확대하는 문예중흥 운동을 전개해 나가고자 한다”라고 천명했다.

◇문화예술진흥법의 획기적 제정

1971년 11월 1일 국무회의에서 문화예술진흥법안이 가결되었다. 이는 대한민국 문화정책에 관한 최초의 법으로서 문화정책의 태동이었다. 1972년 8월 14일 제정·시행된 문화예술진흥법은 “문화예술 진흥을 위한 사업과 활동을 지원함으로써 우리나라의 전통적인 문화예술을 계승하고 새로운 문화를 창조하여 민족문화의 중흥에 기여하게 함을 그 목적”으로 밝혔다.

“국가와 지방자치단체는 문화예술의 진흥에 관한 시책을 강구하고, 국민의 문화예술 활동을 권장하며 이를 적극 보호·육성하여야 한다.”라며 문화예술진흥을 위한 국가의 적극적 개입 의지를 천명했다. 이 법을 토대로 1972년 9월 29일 문화예술진흥위원회 규정이 공포되고, 1973년 10월 11일 ‘한국문화예술진흥원’이 개원되었다. 이 법의 특별한 점은 국민들을 대상으로 한 전방위적 문화예술 지원형식이 법제화되었다는 것이다.

‘문학·미술·음악·연예, 민족 고유문화 발전을 위한 조사·연구·저작, 출판 등의 진흥을 위해 문화예술진흥기금’을 마련할 모든 법적 근거를 두었다. 이 조항에 근거해 ‘문화예술진흥기금’이 1973년에 처음으로 모금되기 시작했으며, 이를 기반으로 1974년 문예진흥기금에 의한 첫 지원사업이 실시되었다.

문화예술진흥을 위한 시혜는 예술가들에게만 그치지 않았다. “국민으로 하여금 문화예술에 대한 이해를 깊게 하고 이에 적극 참여하게 하기 위해 문화의 날과 문화의 달을 설정”했다. “국가와 지방자치단체는 학교 및 직장의 학생, 직원 기타 종업원의 정서와 교양을 높이기 위해 학교 및 직장에 4개 이상의 문화예술 활동을 위한 단체를 두도록 권장”했다. 게다가 “문화예술용품의 생산업자에 대하여 융자 알선, 기술도입에 관한 지원”을 강구하라고 해 문화예술 활동을 위한 산업적 기반 확충에도 관심을 기울였다.

1973년 10월 20일 국립극장에서 열린 전국문화예술인대회에서 문화예술인 전체의 이름으로 ‘문예중흥 선언’이 채택되었다. 선언문에는 “우리는 민족중흥의 역사적 전환기에 처하여 새로운 문화 창조의 사명을 절감한다. 한겨레의 운명을 결정짓는 근원적 힘은 그 민족의 예술적 문화적 창조력이다. 예술이 창조력을 잃었을 때 겨레는 침체 되고 문화가 자주성을 찾았을 때 나라는 흥한다”, “우리는 길이 남을 문화를 개발하고 민족적 정통성을 이어받아 오늘의 새 문화를 창조한다. 맹목적인 복고 경향을 경계하고 분별없는 모방행위를 배척하며 천박한 퇴폐풍조를 일소하여 우리 예술을 확고한 전통 속에 꽃피우고 우리 문화를 튼튼한 주체성에 뿌리 박게 한다”는 메시지가 담겼다.

이 선언문은 이후 등장할 국가 주도의 문예중흥 5개년계획의 이념적 토대로서 매우 중요한 위치에 있다.

◇문예중흥 5개년계획의 체계적 추진

정부가 주도한 경제개발 5개년계획이 성공적으로 자리 잡자, 박정희 대통령은 그 모델을 문화예술 정책에 도입했다. 계획 입안에 착수한 문화공보부는 1971년 8월 학술원·예술원, 예총 및 학계 인사 등 30여 명에게 자문하고, 600여 명을 대상으로 우편조사를 실시한 후, 세미나를 통한 의견수렴을 통해 기본 계획의 초안을 마련했다. 그 후 15명으로 구성된 초안검토위원회를 두어 보완작업을 거친 뒤 1973년 10월 18일에 드디어 제1차 문예중흥 5개년계획이 확정되었다.

이 계획은 세 가지 중점 목표를 두었다.

첫째, 올바른 민족사관을 정립하고 새로운 민족예술을 창조한다.

둘째, 예술의 활성화·대중화로 국민의 문화 수준을 향상시킨다.

셋째, 문화예술의 국제교류를 적극화함으로써 문화 한국의 국위를 선양한다.

문화예술진흥계획의 최상위기관은 국무총리를 위원장으로 하는 문화예술진흥위원회였다. 전반적인 계획은 문화공보부에서 관장하고 구체적인 계획의 집행은 각 지방자치단체에 위임함으로써 문예중흥 5개년계획이 전국적으로 확산될 수 있도록 했다.

1974년(1차년도)에는 한국학개발지원사업을 중점 추진했다. 문화예술진흥원은 한국학, 전통예능, 문학, 미술, 음악, 연극, 무용, 출판 등 10개 분야에 걸쳐 총 209개의 세부사업을 책정 추진했다. 정부 예산 32억 1천만 원과 문예진흥기금 7억 2천만 원, 도합 50억 8천만 원을 투입했다.

박정희 대통령이 가장 역점을 둔 사업은 ‘한국학개발지원사업’이었다. 민족사의 재정리, 고전 종합조사 및 국역, 한국학 개발 등 3개 부문, 29개 사업을 완결시키는 놀라운 성과를 이뤘다.

1975년(2차년도)에는 160개 사업 추진을 추진했다. 총 80억 5천만 원의 예산 중 문예중흥 5개년계획의 예산은 46억 3천만 원으로 확정됐다. 진흥원은 약 11억 원으로 총 160개 사업을 책정하고 139개 사업을 완료했다.

1976년(3차년도)에는 고전국역사업을 지속 추진했다. 문화공보부의 세출예산은 약 105억 원이었다. 긴축재정의 여파로 계속사업이 주를 이루었으나, 고전국역사업, 조선왕조실록 국역간행 등 방대한 국학 자료의 연구 및 번역보급은 핵심 사업으로 꾸준히 진행되었다.

1977년(4차년도)에는 영화시책 개선을 추진했다. 총예산 180억 원 중 80억 원이 문화부문에 투입되었다. 영화시책으로 연간 제작 편수 제한을 철폐하고, 우수영화 제작 실적에 따라 제한 없이 외화 배정을 해주기로 했다.

1978년(5차년도)에는 경주문화재 발굴에 대규모 투자가 이뤄졌다. 예산이 전년 180억 원에서 250억 원으로 크게 증액되었고, 150억 원을 문화부문에 사용했다. 경주문화재 발굴 작업 등에 100억 원, 문화예술 부문에 50억 원을 투입했다.

1974년부터 1978년까지 시행된 제1차 문예중흥 5개년계획 기간 중 문예중흥을 위한 정부투자와 문예진흥기금은 485억 4천240만 원에 달했다. 부문별 투자를 보면 70% 이상이 국학, 전통예술과 같은 전통문화 부문에 투자되고, 시설 및 기반 조성에 5%, 문학·미술·음악·연극·무용 등의 예술진흥에 12.2%, 영화·출판 등의 대중문화창달에 8.9%가 각각 투자되었다.

제1차 문예중흥 5개년계획을 통한 문화예술 토대를 마련하기 위해 박정희 대통령은 관련 정책기구들을 만들었다. 영화진흥공사(1973년), 민속박물관(1975년), 문화재연구소(1977년), 세종문화회관(1978년) 등의 기반시설들이 신설되거나 확충되었다. 특히 세종문화회관의 건립은 국민들이 수준 높은 공연예술을 접할 수 있는 공간을 제공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컸다. 당시로서는 최첨단 시설을 갖춘 세종문화회관은 대한민국 공연예술의 메카로 자리 잡았다.

각종 문화상 제정도 활발했다. 대한민국문학상(1976년), 대한민국음악제(1976년), 대한민국연극제(1977년), 대한민국작곡상(1977년), 대한민국무용제(1979년) 등이 제정되었다. 이러한 상들은 각 예술 분야의 발전을 촉진하고 예술가들에게 창작 의욕을 고취시키는 역할을 했다.

◇분야별 지원사업의 구체적 성과

각종 문예지의 원고료 지원을 대폭 인상했고, 작가기금 설치 운영, 여류문인회 연간지 발간 지원, 유명 중견 시인 101인의 애국시집 발간배포 등 다양한 문학 활동을 지원했다. 미술회관 설치 운영, 민족기록화 제작 전시, 우수작품 구입 및 창작 지원 등을 실시했다. 특히 90편의 민족기록화 제작에는 당시 화단의 현대화를 이끌고 있던 신진작가들이 많이 참여해 미술계에 활력을 불어넣었다.

대한민국작곡상 제정, 대한민국음악제, 국악공연지원, 민속악 체계 정립 등을 추진했다. 특히 39편의 오페라 창작과 13회의 공연을 지원한 것은 대한민국 오페라 발전사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대한민국연극제, 연극연구 활동 지원, 지방연극 활동 지원 등이 있었다.

제1회 대한민국연극제는 9개 극단이 참가하여 105회의 공연으로 3만 800명의 관객을 동원해 대성공을 이뤄냈다.

전통무용기법의 개발, 무용공연지원, 예술가들의 해외연수 지원 등을 했다. 1960년대가 현대무용의 태동기였다면 1970년대를 대한민국 현대무용계의 르네상스로 표현하기도 했다. 출판금고기금 확충, 추천도서 구입보급, 국제 도서박람회 참가 지원 등이 이뤄졌다. 이런 노력의 결과 1970년대 종로서적, 교보문고 등 대형 서점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문학·오페라·무용 공연 등 다방면 지원

문예진흥기금 시책 민간 자본 20% 넘어

1974년부터 5년간 485억원이나 투입

‘문화 대통령’ 재평가·재조명 작업 절실

문예중흥 5개년계획의 주요한 시책 중 하나가 바로 ‘국제교류’였다. ‘한국미술 5천년전’의 일본 전시회, ‘미국독립 200주년 기념공연’, ‘신안해저유물국제세미나’, ‘아시아영화제’, ‘국제청소년음악연맹총회’ 등 여러 국제대회를 개최했다.

1971년 해외공보관이 설립되었고, 1978년 세계 41개국 60명으로 확대되었다. 1977년부터 추진된 도쿄, 뉴욕, LA 및 파리의 한국문화원 설립은 현지에서 대한민국 문화를 체계적으로 알리고 문화 교류의 거점 역할을 하는 중요한 기관이 되었다.

박정희 대통령의 문화예술정책 중 가장 탁월한 시책 중 하나는 단연 ‘문예진흥기금’이다. 개인 혹은 법인에서 기부금 형태로 출연할 수 있도록 했으며, 공연장, 박물관, 미술관, 사적지 등의 관람료에 일정률의 기금을 부가해 모금함으로써 문화예술기관에서 얻은 일정 수익을 다시 재투자하게 제도화했다.

제1차 문예중흥 5개년계획 기간 동안 총 485억 4천240만 원의 예산이 투입되었는데, 이 가운데 정부 예산이 78.3%, 문예진흥 기금을 포함한 민간자본이 21.7%를 차지했다. 민간자본이 20% 이상을 차지했다는 것은 문화예술 발전에 대한 민간의 참여를 이끌어 낸 것으로 큰 의미가 있다.

문예중흥 5개년계획에 박정희 대통령이 얼마나 심혈을 기울였는지는 예산 변화를 보면 확인할 수 있다. 1968년까지 공보 부문 예산이 18억 원, 문화부문 예산이 11억 원이었다. 그러나 1978년 예산액은 공보 부문이 100억 원으로 약 6배 증액된 반면, 문화부문 예산은 152억 원으로 14배 정도 증액되었다. 1968년 문화부문 예산 비중이 38%였던 것이 1978년에는 60%로 증가한 것은 박정희 대통령 정부가 문화를 얼마나 중요하게 여겼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제2차 계획과 비운의 좌절

제1차 문예중흥 5개년계획이 성공적으로 마무리되자 박정희 대통령은 곧바로 제2차 문예중흥 계획을 수립했다. 1차 계획에 비해 3배 이상의 예산이 책정된 이 계획은 민족문화의 전통 연구개발, 새로운 민족문화예술 창조, 전 국민이 문화적 혜택을 누리는 것, 문화예술의 국제교류 증진 등을 목표로 했다.

그러나 1979년 10월, 비운의 사건으로 박정희 대통령이 서거하자 제2차 문예중흥 5개년계획은 무산되고 말았다. 매우 유감스럽고 슬프게도 그 이후 한국의 문화계는 10년의 잠복기를 거쳐 다른 방향으로 전개되었다.

박정희 대통령은 문화예술의 자유에 대해서도 명확한 입장을 가지고 있었다. “학문과 예술의 자유로운 연구 없이 역사상 오랫동안 이름을 떨친 나라가 없다”라며 “예술의 창조는 자유로워야 하고 국가나 지방자치단체는 창조적 표현의 발휘에 도움 되는 방책을 마련할 의무가 있으며, 예술의 발전이 어떤 검열에 의해서 제약되어서는 안된다.”라고 강조했다.

박정희 대통령이 집권한 18년 세월의 문화정책을 관통하는 기저의 정신은 경제개발계획 및 새마을운동과 그 유전자가 같았다. 경제개발과 새마을운동의 목표가 ‘경제활동을 통한 인간개조’였다면, 문예중흥의 목표는 ‘문화 활동을 통한 인간개조’였다.

좌우를 막론하고 대한민국의 오늘은 1960년대에 만들어졌다는 의견에 대부분 동의하고 있다. 지금 현재의 문화를 틀 짓고 있는 수많은 문화입법과 제도, 그리고 문화정책들이 1960년대~1970년대에 걸쳐서 만들어졌다.

신좌파적 경향성이 강한 문화연구가들마저도 1960년대가 대한민국 현대성의 시작이었다는 것을 부인하지 않는다. “1960년대 1970년대의 문화정책은 단순히 전시 행정의 표본 수준에 머무는 것이 아니며, 국민들의 의식과 정서에 의식적, 무의식적으로 상당한 영향을 끼쳤던 것으로 인식할 필요가 있다”라는 평가가 있다.

1960~1970년대는 절대빈곤과 냉전, 북한의 위협, 68혁명으로 대표되는 세계적 혁명의 물결 속에서 국가의 생존과 발전을 동시에 추구해야 했던 시기였다. 이러한 시대적 배경 속에서 박정희 대통령 정부가 ‘민족문화’를 강조한 것은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고 볼 수 있다.

◇재평가의 필요성

현대사의 가장 극적인 인물인 박정희 대통령은 그저 먹고사는 문제를 해결한 경제대통령으로서만 현재에 각인되고 있을 뿐이다. 그가 보여준 문화에 대한 관심과 추진한 정책들은 다른 여러 정치적 이슈와 ‘먹고사니즘’에 침식된 사람들에 의해 별 관심을 받지 못했다.

오히려 대한민국을 부정하는 세력들에 의해 그의 문화정책은 ‘독재’와 ‘적폐’의 수단으로 치부된 채 제대로 된 평가를 받지 못하고 있는 것이 안타까운 현실이다.

현재를 ‘총성 없는 문화전쟁의 시대’라고 표현할 수 있다. 역사는 문화를 통해 대중들에게 전달된다. 문화에 대한 관심도가 없거나 현저히 낮은 보수·자유진영에서는 어떠한 대응책이나 방안들을 만들 생각조차 못하고 있다. 문화가 왜 중요하며, 문화선진국을 꿈꾸었던 ‘문화 대통령’ 박정희에 대한 재평가 작업이 필요한 이유다.

1974년부터 1978년까지 5년간 투입된 485억 4천240만 원은 당시로서는 막대한 금액이었다. 이 투자로 대한민국은 문화예술의 제도적 기반을 완성했고, 수많은 예술가를 육성했으며, 국민들이 문화를 향유 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했다.

1972년 제정된 문화예술진흥법은 현재까지도 대한민국 문화정책의 근간을 이루고 있다. 1960년대 대한민국 영화의 황금기는 2000년대 대한민국 영화의 부흥을 예고하는 것이었다. 1960~1970년대 구축된 방송 인프라와 방송문화는 오늘날 K-드라마, K-예능의 토대가 되었다. 박정희 대통령이 꿈꾸던 문화선진국의 비전은 1979년 10월 그의 서거와 함께 미완으로 남았다. 제2차 문예중흥 5개년계획이 완수되었다면, 대한민국은 경제 선진국뿐만 아니라 문화선진국으로도 더 빨리 도약했을 것이다.

“예술이 창조력을 잃었을 때 겨레는 침체 되고 문화가 자주성을 찾았을 때 나라는 흥한다.”

1973년 문예중흥 선언의 이 구절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하다. 문화는 단순히 여가와 오락이 아니라 국가의 정체성을 형성하고 국민의 의식을 고양시키는 중요한 수단이다. 박정희 대통령의 문화정책을 재평가하고 재조명하는 것은 꼭 필요한 작업이다.

글=박정희아카데미 부속 박정희연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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