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도진 극동대학교 해킹보안학과 교수
요즘 ICT 업계 사람들을 만나면 기승전결이 늘 인공지능(AI)이다. 정부 부처 업무보고나 기업들의 신년 계획에도 ‘AI 일상화’라는 단어는 빠지지 않는다. 그런데 막상 현장에서 시스템을 설계하고 망을 까는 실무진들과 속이야기를 나눠보면, 겉과 달리 묘한 한숨이 배어 나온다.
가장 흔한 푸념은 비용과 종속에 대한 현실적 걱정이다. 당장 쓰기 편하다고 미국 빅테크들이 만든 거대언어모델(LLM)의 API를 끌어다 쓰기 바쁜데, 서비스 규모가 커질수록 해외 기업에 내야 하는 청구서도 눈덩이처럼 불어난다. 소위 ‘AI 소작농’ 신세 우려다. 이대로 가다간 인프라는 힘들게 지어놓고 정작 알짜 수익은 남에게 퍼주게 된다는 것이다.
막대한 자본과 GPU 물량을 쏟아붓는 빅테크들과 범용 텍스트 AI 시장에서 정면 대결하는 것은 솔직히 무리가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늦기 전에 남들이 덜 가진 무기로 판을 짜야 할 것이다.
■ 텍스트 LLM의 한계, 현장 데이터가 무기인 ‘피지컬 AI’
최근 현장 전문가들 사이에서 대안으로 자주 오르내리는 화두가 피지컬 AI다. 모니터 속에서 그럴싸한 문장이나 이미지를 만들어주는 수준을 넘어, 로봇이나 스마트팩토리, 자율주행, 지능형 통신망 등 현실의 물리적 환경을 직접 제어하는 AI를 의미한다.
이 지점이라면 우리에게도 꽤 승산이 있다. 대한민국은 지난 수십 년간 반도체, 자동차 제조 현장을 굴리며 세계 최고 수준의 통신망을 구축해왔다. 글로벌 빅테크들이 인터넷에 떠도는 텍스트 데이터를 긁어모으다 저작권과 데이터 고갈 문제에 부딪히고 있는 반면, 우리 산업 현장에는 24시간 끊임없이 기계와 설비가 뿜어내는 생생한 실물 데이터가 쌓여 있다. 막연히 범용 모델을 쫓아가기보다, 이 산업 데이터를 무기로 삼아 피지컬 AI 분야로 궤도를 트는 것이 훨씬 실속 있는 생존법일 수 있다.
■ HWP와 PDF에 갇힌 도면들… AI 도입 전 ‘지루한 밑작업’
그런데 막상 이 전략을 현장에 적용하려다 보면 생각지 못한 장벽에 부딪힌다. 당장 AI에게 먹일 ‘데이터’의 상태가 생각보다 심각하기 때문이다.
스마트 건축물이나 대규모 통신망 감리 현장의 현실을 보자. 현장의 핵심 지식 자산인 수천 장의 설계도, 시방서, 감리 보고서들은 지금도 대부분 아래아한글이나 PDF, 심지어 스캔된 이미지 파일로 굴러다닌다. 작업자 눈에는 익숙한 문서지만, AI 입장에서는 표나 그래프가 섞여 있으면 글자가 깨져버리는 읽을 수 없는 그림에 불과하다.
게다가 공종마다 쓰는 기술 용어마저 제각각이다. 철도 공사 현장에서 쓰는 단어와 공항, 일반 건축물 통신망 구축에서 쓰는 용어가 미묘하게 다르다. 사람은 현장 경험으로 눈치껏 알아듣지만, 기초적인 용어 통일조차 안 된 상태에서 AI에 문서를 밀어 넣으면 맥락을 오독해 엉뚱한 결과물을 낼 위험이 크다. 현장 엔지니어들이 “고도화된 AI 모델 도입보다, 당장 서류 보고서를 엑셀에 다시 옮겨 적는 노가다부터 줄여달라”고 쓴웃음을 짓는 이유다.
결국 산업계의 진짜 AI 전환(AX)은 화려한 신기술 도입 선포가 아니라, 서류 철에 잠든 문서들을 마크다운 등 기계 친화적 포맷으로 바꾸고 파편화된 용어들을 통일하는 지루한 밑작업에서 시작되어야 한다.
■ 민간에 떠넘기기엔 무거운 짐, ‘국가 AI 연구소’의 마중물 역할
이런 척박한 환경에서 데이터를 다듬고 기초 모델을 만드는 짐을 개별 민간 기업에게 모두 떠넘길 수는 없다. 쓸만한 AI 모델 하나를 제대로 학습시키는 데는 천문학적인 컴퓨팅 비용과 전력이 든다. 대기업도 벅찬데, 중소·벤처기업은 출발선에 서기도 힘들다.
1990년대 통신 인프라가 빈약하던 시절, 국가 주도로 한국전자통신연구원(ETRI)이 나서서 CDMA(코드분할다중접속) 세계 최초 상용화를 이끌어냈던 뚝심을 떠올려 볼 만하다. 지금 논의 중인 국가AI연구소가 바로 이런 마중물 역할을 해줘야 하지 않을까. 단순히 전문가들이 모이는 회의체를 넘어, 국가가 뼈대가 되는 기초 모델과 컴퓨팅 파워를 제공하는 실질적인 베이스캠프가 되어 준다면 중소기업들도 이를 바탕으로 각자의 현장에 맞는 응용 서비스를 개발하며 자생력을 키울 수 있을 것이다.
현장의 엔지니어들은 낡은 PDF 문서를 변환하고 쓸만한 데이터를 추려내며, 어떻게든 다가오는 파도 속에서 살아남으려 땀 흘리고 있다. 가야 할 방향도 어느 정도 정해졌다. 이제는 거창한 구호 대신, 현장의 보폭에 맞춘 실질적 지원과 고민이 뒤따라야 할 때다.
다만 이렇게 다듬어 놓은 데이터와 인프라도 안전한 통신망과 제대로 된 설계 구조가 뒷받침되지 않으면 오래가기 어렵다. 결국 다음 단계에서 살펴봐야 할 것은 데이터 주권을 둘러싼 보안 문제와, 현장에서 정보통신 설계 전문성이 어떻게 다뤄지고 있는가이다. [중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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