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 축구를 현대컵 2연패로 이끈 김상식 감독이 베트남 금성홍기와 태극기를 들고 기뻐하고 있다. 사진 디제이 매니지먼트
“지난 4월 이재명 대통령이 하노이를 방문했을 때 ‘베트남에서 축구가 킹(king) 스포츠라던데, 김 감독은 킹의 킹인가’라는 얘기를 하셨다. 오늘 하루만큼은 스스로 ‘킹 중의 킹’으로 즐기고 싶다.”
26일 베트남 축구대표팀을 아세안(ASEAN) 현대컵 우승으로 이끈 직후 김상식(50) 감독은 “거리 응원 인파 탓에 집에 어떻게 돌아갈지 걱정”이라며 유쾌한 농담을 던졌다. 경기 직후 하노이와 호치민 등 베트남 주요 도시 거리는 2002 한·일 월드컵 4강 신화 직후의 한국처럼 뜨겁게 달아올랐다. 오토바이 경적 소리가 도시를 가득 채웠고, 팬들은 금성홍기와 태극기를 함께 흔들며 밤새도록 승리를 만끽했다.
베트남은 이날 하노이에서 열린 태국과의 결승 홈 2차전에서 2-2로 비기며 원정 1차전(2-0승) 결과를 더한 합산 스코어에서 4-2로 앞서 우승 트로피를 들어 올렸다. 상대 자책골이 2번 나오는 행운까지 따랐다.
김상식 베트남 감독이 인판티노 FIFA 회장과 함께 엄지를 치켜 세우고 있다. AFP=연합뉴스
과거 스즈키컵과 미쓰비시컵을 거쳐 지금은 현대가 타이틀 스폰서십을 맡고 있는 현대컵은 2년 주기로 열리는 ‘동남아 월드컵’이다. 김 감독은 지난 2024년에 이어 베트남 축구 역사상 최초로 이 대회 2연패를 이룬 지도자가 됐다. ‘베트남 축구의 아버지’로 존경 받는 전임자 박항서 감독조차 이루지 못한 성과다.
베트남은 A매치 최다 무패 기록을 26경기(22승 4무)로 늘렸고, 현대컵에서 숙적 태국을 상대로도 4경기 연속 무패(3승1무) 행진을 이어갔다. 베트남축구협회와 여러 기업이 선수단에 약속한 우승 포상금은 270억 동(14억원)에 이르고, 비엣젯항공은 1년간 무료 항공권을 선물했다.
베트남 축구를 현대컵 2연패로 이끈 김상식 감독. 사진 디제이 매니지먼트
김 감독은 2024년 부임 이후 벌써 4번째 우승을 이뤄냈다. 2022년 K리그 전북 현대에서 경질 당할 당시 상대팀 팬들로부터 “상식 종신”이라는 비아냥을 들었지만, 이제는 베트남 팬들로부터 “평생 감독으로 함께 해 달라”는 이야기를 듣는다. 이번 대회 결승 1차전 당시 교체 투입한 두 선수가 잇달아 골을 터트리자, 현지에서는 해리 포터의 합성 사진을 선보이며 “또 한 번 다크 매직(흑마술)을 부렸다”고 환호했다.
베트남 팬들은 김상식 감독이 흑마술을 썼다고 열광했다. 사진 SNS 캡처
베트남은 박항서 감독 후임 필립 트루시에 감독이 실패하자 다시 한국 지도자를 불러들였다. 박항서의 ‘파파 리더십’에 이어 김상식의 ‘형님 리더십’이 통했다. 베트남에서는 이름(상식)과 발음이 비슷한 베트남어 사우(숫자 6)를 따 그를 ‘엉클 사우’라 부른다.
그는 한국의 정(情)과 비슷한 베트남 문화 ‘띤(Tinh)’을 적극 활용했다. 한국에서 공수한 인삼과 화장품을 “부모님과 아내에게 선물하라”며 건네 선수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감독 계약 직후 대표팀 선수 50명의 사진과 이름을 칠판에 붙여두고 성조까지 맞춰가며 외우는 등 공을 들였고, 경기장에선 베트남 국가를 함께 불렀다. 승리한 날은 신나는 트위스트 댄스로, 평소엔 따뜻한 차 한 잔으로 격의 없이 어울렸다.
현대컵 우승을 이끈 김상식 감독을 베트남 선수들이 헹가래 치고 있다. 사진 디제이 매니지먼트
전임자 박 감독 시절 동남아 최강으로 급성장하며 고액 연봉과 연예인급 인기에 취한 베트남대표팀 선수들에게 김 감독은 ‘아시아 톱10 진입’과 ‘월드컵 본선 진출’이라는 새 비전을 제시해 식어가던 승부욕에 다시금 불을 질렀다. 에이전트 이동준 디제이 매니먼트 대표는 “선수 발굴을 위해 3부리그까지 발품을 팔며 트루시에 감독이 쓰지 않은 선수들도 꼼꼼하게 체크했다. 박항서 감독에게 베트남 선수들 장단점과 특징, 관계까지 조언을 듣고 본인만의 색깔을 얹었다”고 전했다.
‘원조’ 박항서를 필두로 신태용(인도네시아 페르시자 자카르타 감독), 김판곤(말레이시아 셀랑고르 감독)을 거쳐 김상식까지 동남아축구에 ‘한류 감독’ 열풍이 분다. 한국 지도자들은 동남아 축구의 고질적 약점으로 여겨지는 체력과 근성, 수비 조직력을 한국식 훈련으로 개조했다.
킥오프 후 20분만 지나면 걸어 다니던 선수들을 90분 내내 질주하는 전사들로 바꿔 놓았다. 경제 성장과 맞물려 대폭 늘어난 축구 관련 투자에 강인한 멘털로 무장한 한국식 축구 문화가 접목되며 폭발적 시너지가 발생한 셈이다. 동남아 축구에는 귀화 열풍이 불고 있는데, 김 감독의 베트남도 응우옌 쑤언손 등 브라질 귀화선수 3명을 받아들였다.
박린 기자 rpark7@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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