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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해체와 재편의 기로에 선 농어촌

필자의 아버지는 입버릇처럼 “농자천하지대본(農者天下之大本)”이라 말씀하셨다. “농업은 천하만민이 살아가는 큰 근본”이라는 준엄한 가르침이었다. 평생을 보건복지 현장에서 농어촌의 삶을 들여다본 전문가로서 나는 지금도 그 말씀을 가슴 깊이 새기고 있다.

해체와 재편의 기로에 선 농어촌

[세상을 보며] 한현우 보건학 박사‧전 이화여자대학교 외래교수

필자의 아버지는 입버릇처럼 “농자천하지대본(農者天下之大本)”이라 말씀하셨다. “농업은 천하만민이 살아가는 큰 근본”이라는 준엄한 가르침이었다. 평생을 보건복지 현장에서 농어촌의 삶을 들여다본 전문가로서 나는 지금도 그 말씀을 가슴 깊이 새기고 있다.

그러나 오늘날 대한민국 농어촌의 풍경은 그 근본이 통째로 흔들릴 만큼 가파르게 변하고 있다. 단순히 농어촌 인구가 줄어든다는 통계적 수치를 넘어, 수백 년간 이어져 온 삶의 방식과 문화 자체가 근본적으로 해체되고 재편되는 중이다. 전통적인 공동체 중심의 자생적 질서는 빠른 속도로 소멸해 가고 있으며, 그 자리를 외국인 노동 인력과 공공복지제도가 간신히 메우고 있는 것이 농어촌이 마주한 현실이다.

가장 상징적인 변화는 삶의 마지막 관문인 장례문화에서 나타난다. 과거 농촌에서 상(喪)은 마을 전체가 슬픔을 나누고 연대하는 거대한 공동체 의례였다. 그러나 지금의 농어촌 장례식장은 풍경부터가 낯설다. 망자나 상주나 문상객이나 거창한 예복 대신 평상시 복장 차림으로 담담하게 장례를 치른다. 의식의 격식보다는 고령의 상주와 하객들의 편의, 그리고 현실적인 형편이 우선시되는 소탈한 형태로 바뀐 것이다.

장묘 방식 역시 거동이 불편한 노인들이 묘지를 관리하기 어렵다는 현실적 이유로 매장에서 화장(火葬) 중심으로 완전히 바뀌었다. 과정과 관계 중심의 전통적 장례가 효율과 현실에 맞춘 ‘간소화된 장례’로 전환된 것은, 농촌 공동체의 결속력이 이미 임계점에 도달했음을 보여주는 단면이다.

생산의 현장인 일터 역시 사정은 마찬가지다. 농어촌 청년들의 지속적인 이탈로 발생한 노동력 공백은 농어촌의 경제 구조를 뿌리째 뒤흔들었다. 과거 농촌 경제의 근간이자 아름다운 미덕이었던 ‘품앗이’ 문화는 이제 자취를 감추었다. 이웃끼리 서로 손을 보태던 상부상조의 자리에 외국인 노동 인력이 가득 차 있다. 인력사무소에 외국인 근로자를 요청하지 않으면 농번기 수확이나 양식장 운영이 불가능한 수준이다. 전통적인 공동체 노동이 철저한 시장 논리와 외주화로 대체되면서, 끈끈했던 이웃 간의 유대감과 ‘지대본’의 자부심도 함께 옅어지고 있다.

이러한 급격한 변화 속에서 농어민들이 느끼는 상대적 박탈감과 소외감은 더욱 깊어만 간다. 4차 산업혁명과 첨단 디지털 기술로 하루가 다르게 변화하는 도시의 타 직업군에 비해, 기후변화와 원자재 가격 상승 직격탄을 맞은 농어업은 노동 투입 대비 소득 효율성이 턱없이 떨어진다. 밤낮없이 땀 흘려 일해도 제값을 받기 힘든 현실은 농어민들의 사기를 바닥으로 떨어뜨린다. 고령화된 농어민들이 차라리 농어업을 탈피하고자 토지를 부동산에 내놓아도 보러 오는 매수자가 없는 것이 농어촌 부동산 시장의 현주소다. 과거에는 신재생에너지 열풍에 따른 태양광 발전 시설 설치나 가족묘지 조성 등의 목적으로 임야 수요라도 간간이 이어졌으나, 규제 강화와 트렌드 변화로 그마저도 옛일이 되었다. 이제 농어촌의 땅은 거래가 완전히 끊긴 채, 매년 세금만 부담하는 '골칫덩이'로 전락해 농어민들의 어깨를 더욱 무겁게 짓누르고 있다.

무엇보다 고령의 농어민들을 가장 낙담하게 만드는 것은 질 높은 의료서비스의 격차와 무너진 기초 의료 인프라다. 얼마 전 고북보건지소를 방문했을 때, 문 앞에 붙은 ‘공중보건의 소집해제로 인한 진료 불가’ 공고문을 마주하며 깊은 탄식이 흘러나왔다. 농어촌 의료의 최전선이자 노인들의 유일한 사랑방이었던 보건지소가 의사 공백으로 진료의 문을 닫은 것이다.

이뿐만이 아니다. 만성질환을 앓는 고령의 노인들은 의사가 처방한 기초적인 약품을 구입하기 위해 이웃 면(面)까지 먼 길을 왕래해야 하는 것이 오늘날의 서글픈 현실이다. 대도시 주민들이 손쉽게 누리는 양질의 종합병원 의료서비스는 고사하고, 당장 복용해야 할 약 한 봉지를 짓기 위해 원정을 떠나야 하는 의료 접근성의 불평등은 농어민들에게 단순한 소외감을 넘어 생존의 위협이자 깊은 박탈감으로 다가온다.

다행히 위기 속에서도 이를 보완하려는 공공복지제도의 자구책들이 현장에 도입되고 있다. 대중교통 사각지대에 놓인 고령 주민들의 이동권을 보장하기 위해 도입된 ‘행복버스’ 제도가 대표적이다. 과거 일부 지역에서 제한적으로 운영되던 택시 제도가 이제는 주민이 부르면 언제든 찾아오는 수요응답형 소형 버스 제도로 진화한 것이다. 정기 노선버스가 뜸한 오지 마을까지 운행하는 행복버스는 어르신들이 이웃 면의 약국을 찾고, 읍내 전통시장과 관공서 일을 볼 수 있게 돕는 실질적인 농촌형 교통 혁명이자 소중한 생명선 역할을 하고 있다.

이에 더해 노인맞춤 돌봄서비스를 제공하는 생활지원센터의 도우미 지원은 가족 복지가 해체된 농촌에서 ‘사회적 부양 체계’의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준다. 전담 생활지원사들이 거동이 불편한 어르신들의 읍내 병원 출입과 약국 방문을 동행하고, 경로당 급식 도우미와 식사 지원을 통해 독거노인들의 영양 불균형을 막는다. 무엇보다 주기적인 안부 확인을 통해 고독사를 예방하는 중추적인 감시망 기능을 수행하고 있다. 외로움과 질병, 자산 가치 하락과 의료 공백에 노출된 노인들에게 이들은 국가가 제공하는 가장 따뜻하고 실질적인 보건복지적 손길이다.

지금 우리 농어촌은 전통적 공동체의 해체와 노동 시장의 급격한 변화, 부동산 경기 침체, 그리고 기초 의료의 붕괴라는 다중고 속에서 공공복지 인프라의 확충을 통해 새로운 생존 방식을 모색하는 거대한 과도기를 지나고 있다.

아버지가 말씀하셨던 ‘농자천하지대본’의 가치는 시대가 변해도 결코 퇴색될 수 없는 국가의 근간이다. 단순히 예산을 쥐여주는 시혜성 복지만으로는 이 변화의 흐름을 되돌릴 수 없다. 이제는 농어촌의 정주 여건을 대폭 개선하고, 무너진 공공보건의료 체계를 재정비하며, 농지 소유 관련 세제나 자산 활용 방안까지 포괄하는 촘촘한 정책적 배려가 필요하다. 해체의 위기를 극복하고 포용적이고 지속 가능한 '새로운 공동체'의 이정표를 세우는 것이 지금 우리 사회가 농어촌의 소외된 눈물에 응답하고 천하의 근본을 다시 바로 세우는 책무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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