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은행이 중동발 지정학적 리스크에 따른 물가 불안과 원·달러 환율 폭등이라는 거대한 도전에 직면하며 기준금리 인하 시점을 잡지 못하고 깊은 고심에 빠졌다.
8일 금융권에 따르면, 당초 상반기 내 금리 인하(피벗)를 기대했던 시장의 목소리는 사라지고 오히려 ‘고금리 장기화(Higher for Longer)’에 대비해야 한다는 위기감이 확산되고 있다. 이창용 한국은행 총재를 비롯한 금통위원들은 물가 안정이라는 본연의 목표와 내수 부진이라는 경기 침체 사이에서 전례 없는 고차방정식을 풀어야 하는 상황이다.
현재 한국은행을 가장 곤혹스럽게 만드는 요인은 통제 불가능한 대외 변수의 급습이다. 이란과 이스라엘의 전면전 위기로 국제 유가가 배럴당 100달러를 가시권에 두면서, 간신히 2%대로 내려앉았던 소비자물가 상승률이 다시 꿈틀대고 있다. 특히 반도체 경기 호황으로 인한 이른바 ‘칩플레이션(Chipflation)’ 현상까지 겹치며 원자재와 부품 가격이 동반 상승해 물가 상방 압력을 높이고 있다.
한국은행은 지난 2월 통화정책방향 결정회의에서 올해 물가 상승률 전망치를 2.2%로 상향 조정했으나, 현재의 유가와 환율 추세를 고려할 때 이마저도 낙관적이라는 지적이 나온다. 물가가 목표치인 2%에 확실히 안착했다는 확신이 서기 전까지는 금리를 내릴 수 없다는 ‘매파적 동결’ 기조가 힘을 얻는 이유다.
외환 시장의 불안은 한은의 발을 묶는 또 다른 사슬이다. 원·달러 환율이 8일 연속 1,500원대라는 기록적인 수치를 유지하는 상황에서 한은이 선제적으로 금리를 인하할 경우, 한-미 금리 차 확대에 따른 자본 유출 가속화와 원화 가치 추가 하락을 피할 수 없다.
미국 연방준비제도(Fed)가 탄탄한 고용 지표를 근거로 금리 인하 시점을 하반기 이후로 미루는 기류가 뚜렷해지면서, 한은 역시 독자적인 금리 인하에 나서기엔 리스크가 너무 크다. 1,500원대 고환율은 수입 물가를 밀어 올려 국내 물가 상승을 부추기는 직접적인 경로로 작용하고 있어, 당국은 금리 인하 카드를 꺼내기보다 환율 방어를 위한 유동성 관리에 사활을 걸 수밖에 없는 처지다.
금융 안정 측면에서도 금리 인하는 ‘양날의 검’이다. 수도권을 중심으로 다시 고개를 드는 주택 가격 상승세와 이에 연동된 가계부채 증가세가 한은의 경계심을 자극하고 있다. 금리를 서둘러 내릴 경우 부동산 시장에 잘못된 신호를 주어 가계부채 폭탄의 심지에 불을 붙일 수 있다는 우려다.
반대로 고금리를 유지하자니 영세 자영업자와 중소기업들의 연체율이 임계점에 도달하고 있어 경기 침체의 골이 깊어질 수 있다는 점이 딜레마다. 실제로 시중은행의 소상공인 대출 연체율은 최근 3년 내 최고치를 기록 중이며, 내수 소비 위축은 한은이 기대했던 완만한 경기 회복 경로를 위협하고 있다.
시장 전문가들은 한국은행이 당분간 ‘관망세’를 유지하며 금리 동결 기조를 이어갈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주요 투자은행(IB)들은 한은의 첫 금리 인하 시점을 기존 2분기에서 올해 4분기, 혹은 내년 초로 일제히 늦춰 잡고 있다. KDI 등 주요 연구기관들 역시 현재의 대외 여건하에서는 성급한 피벗이 오히려 경제의 불확실성을 키울 수 있다고 경고한다.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