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일 사회진보연대 광주전남지부 주최로 대안공간 공공연 마치홀에서 열린 강연에서 중앙대 백승욱 교수가 강연을 하고 있다.
“세계는 급격히 변화하는 격동의 시대이자 도처에서 전쟁의 위협이 대폭 늘어나며 익숙한 기존 정치 구도가 빠르게 무너지고 새로운 도전이 일상화하는 시대에 들어서고 있다. ‘우리가 아는 세계의 종언’을 새삼스레 확인하는 것이다. 우리가 아는 세계의 종언 이후 세계를 ‘탈단극 공위기’, 민주주의의 위기, 인민주의의 고양, 얄타 체제의 해체 등 여러 가지 방식으로 진단할 수 있다.”
19일 사회진보연대 광주전남지부 주최로 대안공간 공공연 마치홀에서 열린 강연에서 중앙대 백승욱 교수는 한국 사회를 “자유주의 이전과 이후가 뒤섞인 상태”로 규정했다. 국제 질서의 균열을 설명하면서도, 핵심은 국내 정치와 사상의 공백에 있었다.
‘격동하는 국제질서와 한반도’를 주제로 한 이날 강연에서 백 교수는 현재 국제 정세의 구조적 변화부터 한국 사회운동의 한계까지 폭넓은 주제를 다뤘다.
얄타 체제의 붕괴, ‘뚜껑이 열리다’
백 교수는 현재의 국제 질서 위기를 “얄타 체제의 뚜껑이 열리는 과정”으로 규정했다. 그는 “1차 대전에서 2차 대전으로 가는 시기에 세계가 엄청난 동요를 겪었고, 미국과 소련이 강력한 뚜껑으로 그 위협을 덮었다”며 “지금은 그 뚜껑이 삐져나오기 시작했다”고 진단했다.
그는 20세기 세계 질서가 봉합된 배경으로 네 가지 요인을 꼽았다. 첫째는 미국이 UN과 압도적 군사력을 통해 강대국 전쟁을 억제한 것, 둘째는 브레튼우즈 체제를 통한 세계 경제 통합, 셋째는 단체협상권을 중심으로 한 노동자 권리의 제도화, 넷째는 탈식민화와 초국적 기업의 등장이다. 백 교수는 “이 네 가지 봉합이 현재 동시에 흔들리고 있다”고 설명했다.
백 교수는 현재 전쟁의 특수성에 주목했다. 그는 “100년 전 전쟁은 모두 열강 전쟁이었지만 지금은 핵 보유 강대국들 사이의 전면전 가능성이 매우 낮다”며 “대신 전쟁은 핵 강대국의 인접 지역에서 주로 발생하고 있으며, 우크라이나 전쟁이 그 상징”이라고 말했다. 이라크 전쟁에서 시작된 ‘예방적 선제 전쟁’ 논리가 이후 반복되고 있으며, 전쟁에 대한 사회적 저항감도 드론·로봇 전쟁 등 기술 발전으로 점차 약화되고 있다고 진단했다.
백 교수는 미국 헤게모니가 쇠퇴하고 있음을 인정하면서도 “반전이 여전히 가능한 조건이 있다”고 분석했다. 그는 스테이블 코인을 활용한 미국 국채의 유동화 가능성을 언급하며, “전 세계 유동 자금을 미국 국채 투자로 흡수하는 새로운 금융 메커니즘이 등장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트럼프의 ‘아메리카 퍼스트’에 대해서는 “이는 USA 퍼스트가 아니라 아메리카 대륙 퍼스트”라고 해석했다. 그는 “그린란드에서 아르헨티나까지 아메리카 대륙을 미국의 영향권으로 재편하겠다는 것이며, 1820년대 먼로주의의 연장”이라고 분석했다. 또한 ‘딥스테이트’ 해체를 명분으로 한 트럼프의 행정부 개편에 대해 “비대해진 관료 체제를 기업식으로 운영하겠다는 의도이며, 머스크의 등장과 맞닿아 있다”고 설명했다.
백 교수는 제이슨 무어의 이론을 소개하며 자본주의의 구조적 한계를 설명했다. 그는 “자본주의는 노동 착취만으로 유지되는 것이 아니라, 체계 외부에서 저렴한 에너지·원료·식량·노동력을 끊임없이 끌어오는 ‘자연의 무상 전유’를 통해 이윤율을 유지해왔다”고 말했다.
그는 “영국의 면방직 산업은 식민지의 저렴한 목화 없이는 불가능했고, 미국의 성장도 광활한 농업 자원과 석유에 기반했다”며 "지금은 이 ‘프론티어’가 한계에 도달하고 있다”고 진단했다. AI 산업에 대해서도 “막대한 전력 비용과 GPU 비용으로 가성비가 성립하기 어려운 투자가 이루어지고 있으며, 새로운 에너지 혁신 없이는 지속되기 어렵다”고 말했다.
“한국 통치계급 이념적 지향 부재”
백 교수는 한국의 정치 지형과 사회운동에 대해 날카로운 비판을 쏟아냈다. 백 교수는 한국 정치의 구조적 한계를 ‘87체제’에 대한 과도한 의존에서 찾았다. 민주화 이후 형성된 이 틀이 여전히 사고의 중심에 놓여 있지만, 현실을 설명하는 데는 점점 한계를 드러내고 있다는 지적이다. 87체제는 ‘민주 대 반민주’라는 이분법을 강화하며, 복잡한 이후의 변화를 포착하지 못하는 경향을 낳았다.
그는 이를 ‘87체제론의 승리주의’로 규정하며 “전두환·박정희 세력에 맞서 싸워 정권을 탈환한다는 서사가 반복되고 있지만, 이는 현대 정치를 제도의 문제가 아닌 ‘적과 우리’의 대립으로만 보는 한계를 갖는다”고 비판했다.
그는 특히 “한국에는 통치 계급의 이념적 지향이 부재하다”고 지적했다. “자유주의, 보수주의, 사회주의 중 어떤 방향을 지향하는지조차 불분명한 상태에서 정치적 피드백이 가능하겠느냐”고 반문하며, “기준 없이 정치 이념을 세울 수 없고, 적을 제거하는 것을 넘어서는 이념적 지향이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오히려 1991년을 주목했다. 1987년이 정치적 전환이었다면, 1991년은 경제와 제도의 전환이었다는 설명이다. 국가 주도의 명령형 경제에서 벗어나, 법인 간 관계와 시장 질서로 재편되는 ‘자유주의적 전환’이 시작된 시기라는 것이다.
하지만 이 전환은 완결되지 못했다. 제도는 도입됐지만, 그것을 해석하고 운영할 사상적 기반은 취약했다.
백 교수는 이를 “사상은 있지만 사상사가 없는 상태”라고 표현했다. “중국은 루쉰을, 일본은 메이지 유신 시기의 사상 논쟁을 현재적으로 재해석하는 전통이 있지만, 한국에서는 국가 건립의 이념을 둘러싼 사상 논쟁 자체가 없었다”는 것이다. 제도를 둘러싼 논쟁이 축적되지 못하고, 질문은 늘 ‘무엇이 문제인가’가 아니라 ‘누가 문제인가’로 귀결된다.
이 같은 조건은 사회운동에도 영향을 미쳤다.
촛불과 광장은 반복됐지만, 그것이 제도적 축적이나 사상적 전환으로 이어지지 못했다. ‘승리의 기억’은 남았지만, 이후를 설계할 논점은 비어 있다는 지적이다.
백 교수는 현재 정치 지형의 성찰적 준거점으로 1960년대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제안했다. 그는 “4·19 이후 한국 사회에 굉장히 넓은 사상의 장이 열렸고, 제3세계에 대한 정보가 지금보다 훨씬 많이 개방됐던 시대”라며 “80년대 학생운동과 그 이전 세대 사이의 단절을 냉정하게 들여다봐야 한다”고 말했다.
또한 동아시아 역사의 맥락에서 “한국은 일본·중국과 달리 상업 도시나 강한 지역성이 형성되지 못한 채 중앙집권적 구조가 500년 가까이 지속됐다”며 “이것이 오늘날 지방자치가 뿌리내리기 어려운 이유이자 정치가 중앙 중심으로 반복되는 역사적 배경”이라고 설명했다.
백 교수는 강연을 마치며 “얄타 체제의 뚜껑이 열리는 세계에서 한국 사회가 어떻게 정세에 ‘올라타느냐’가 핵심 과제”라며 “외부를 논평하는 것을 넘어 정세의 일부가 되는 것, 그리고 각자가 살고 있는 공간에서 책임 있는 개입을 실천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황해윤 기자 nabi@gjdre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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