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강 작가가 15일(현지시간) 프랑스 아비뇽 페스티벌에서 한국 언론과 만나 이야기하고 있다. 예술경영지원센터
“언어는 경쟁력을 겨루는 도구가 아니라, 우리가 존재하는 방식 그 자체입니다.”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소설가 한강(56)이 15일(현지시간) 세계적인 공연예술축제인 프랑스 아비뇽 페스티벌 현장에서 한국 언론과 만나 이같이 말했다. 올해 축제의 초청 언어로 ‘한국어’가 선정되면서, 한 작가는 프랑스 연출가 줄리 델리케의 낭독극 ‘새’에 참여하기 위해 이곳을 찾았다.
축제를 대표하는 교황청 중정 무대에 15~16일 오르는 ‘새’는 한 작가가 제주 4·3 사건을 소재로 쓴 소설 ‘작별하지 않는다’의 1부를 발췌해 만든 1시간 45분 분량의 작품이다. 프랑스 배우 이자벨 위페르와 한국 배우 이혜영이 각자의 언어로 나란히 서서 텍스트를 읽어 내려가며, 한 작가는 극의 마지막 5분 동안 출연해 목소리를 보탠다.
14일(현지시간) 아비뇽 페스티벌을 대표하는 교황청 중정 무대에 최종 리허설을 하는 ‘새’. 한강의 ‘작별하지 않는다’를 토대로 한 낭독극 ‘새’에는 프랑스의 이자벨 위페르(왼쪽)와 한국의 이혜영이 출연한다. (c)아비뇽 페스티벌
한 작가는 “처음 제안을 받았을 때 언어를 화두로 삼아 프로젝트를 진행한다는 점이 매우 흥미로웠다”며 “소설을 단순히 극화하는 것이 아니라 낭독이라는 형식을 취한다는 점이 신선해 어렵지 않게 참여를 결정했다”고 소회를 밝혔다. 이어 “눈으로 조용히 책을 읽을 때도 머릿속에서 자신만의 음악적 리듬을 만들어내지만, 배우의 목소리를 통과한 낭독은 완전히 다른 차원의 음악적 경험을 선사한다”면서 “내가 쓴 문장들이 배우들의 몸을 돌고 나와 공간에 퍼져나갈 때, 문장의 본래 결에 배우들의 섬세한 해석이 겹쳐지면서 생기는 흥미로운 울림이 있었다”고 설명했다.
원작 ‘작별하지 않는다’는 소설가인 주인공 경하가 손가락이 잘리는 사고를 당한 친구 인선의 부탁을 받고, 눈보라를 뚫고 제주의 집으로 내려가 홀로 남겨진 앵무새를 구하기 위해 힘겨운 여정을 떠나는 이야기다. 제주에서 경하는 인선의 가족이 겪었던 제주 4·3 사건의 참혹한 역사를 접하며 깊은 애도의 시간을 가지게 된다. 이번 페스티벌에서는 낭독극 ‘새’ 외에도 이탈리아 연출가 다리아 데플로리안이 ‘작별하지 않는다’ 전체를 정통 연극으로 무대화한 ‘사랑이란 얼마나 끔찍한 고통인가’도 함께 관객과 만난다.
15일(현지시간) 아비뇽 페스티벌을 대표하는 교황청 중정 무대에 오른 ‘새’ 공연 이후 프랑스 여배우 이자벨 위페르(왼쪽부터), 노벨상 수상한 한강 작가, 한국 여배우 이혜영이 객석에 인사하고 있다. (c)예술경영지원센터
한국 현대사의 참혹한 비극을 다룬 이 소설은 국경을 넘어 전 세계인들에게 깊은 울림을 주고 있다. 이에 대해 한 작가는 “사건 자체는 매우 무겁고 비극적이지만, 소설을 쓸 때 눈송이, 새의 깃털, 흔들리는 촛불처럼 가볍고 부드러운 것들을 통해 다가서고 싶었다. 가벼운 감각적 매개체를 통해 무거운 이야기를 전달하고자 했다”면서 “낭독극 ‘새’ 역시 델리케 연출가가 소설 속 문장의 감각을 극대화하기 위해 선택한 형식이라고 생각한다. 감각은 누구에게나 보편적이라는 것을 느낀다”고 피력했다.
역사적 배경지식이 없더라도 누구나 작품 속 주인공 경하의 발걸음을 따라가다 보면 자연스럽게 비극과 조우하게 되는 서사의 힘도 강조했다. 한 작가는 “경하의 여정을 따라가다 보면 자연스럽게 인간의 심연을 만나게 된다. 해외 독자들 역시 마찬가지”라며 “제주 4·3 사건은 한국만의 특수한 비극이라기보다 인류가 오랜 역사 속에서 반복해 온 공동의 아픔이기에, 누구나 문턱 없이 이 비극을 깊이 이해할 수 있다”고 말했다.
15일(현지시간) 아비뇽 페스티벌을 대표하는 교황청 중정 무대에 오른 ‘새’ 공연 이후 프랑스 여배우 이자벨 위페르(왼쪽부터), 노벨상 수상한 한강 작가, 한국 여배우 이혜영이 객석에 인사하고 있다. (c)예술경영지원센터
노벨문학상 수상 이후 극도로 외부 활동을 자제해 왔던 한 작가는 지난 4월 스페인에서 대중과 만나는 행사를 시작으로 점차 발걸음을 넓히고 있다. 일상의 변화를 묻는 질문에 그는 “특별히 삶이 달라진 것은 없고 예전처럼 똑같이 글을 쓰며 살고 있다”면서 “노벨상 수상 이후 쏟아지는 관심이 부담스러워 칩거하기도 했지만, 해마다 새로운 수상자들이 나오면 나에 대한 관심도 자연스럽게 멀어질 것이다. 점점 마음이 가벼워지고 있다”고 웃었다.
이날 간담회에서는 최근 국내외적으로 극에 달한 분열과 갈등, 이른바 ‘혐오의 시대’를 건너는 예술가의 시선에 대한 질문도 나왔다. 한 작가는 이에 대해 단호하면서도 깊이 있는 답변을 내놓았다.
한강 작가가 15일(현지시간) 프랑스 아비뇽 페스티벌에서 한국 언론과 만나 이야기하던 도중 웃음을 터뜨리고 있다. 예술경영지원센터
“혐오는 전 세계적으로 대두된 참 어렵고 무거운 숙제입니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가 이 혐오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문제적인 것’으로 인식하는 태도입니다. 문제를 문제로 인식하는 순간에 이미 극복의 희망이 있습니다. 다 함께 머리를 맞대고 사회적 방향을 고민해야 할 시점입니다.”
간담회를 마무리하며 한국 문화에 대한 세계적인 관심이 높아지는 가운데 한국어의 경쟁력을 묻는 질문에 그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대신 언어와 문학의 본질을 강조하는 말로 인터뷰를 맺었다.
한강 작가가 15일(현지시간) 프랑스 아비뇽 페스티벌에서 한국 언론과 만나 이야기하고 있다. 예술경영지원센터
“한국어는 제 모국어이고, 언어라는 것을 경쟁력과 연관 지어 생각해 본 적이 없습니다. 언어는 우리가 존재하는 방식이니까요. 우리는 언어를 통해 이야기를 나누고, 사랑도 하고, 고백도 하며, 진실을 토로하기도 하고 비명을 지르기도 합니다. 그리고 이 언어에서 문학, 연극, 노래 등이 생겨납니다. 아비뇽 페스티벌이 특정 언어에 집중하는 이유 역시 언어가 가진 음악적이고 근원적인 성격 때문일 것입니다. 우리가 이 축제에서처럼 언어로 할 수 있는 가장 좋은 일들을 함께 듣고 읽고 나눌 수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히 아름답고 의미 있는 시간이라 생각합니다.”
아비뇽=장지영 선임기자 jyjang@kmib.co.kr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