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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예

풍향계/ 쉬운 이별

이별할 때 쿨한 태도를 갖는 것이 연애의 새로운 규범이 되었다. 헤어지는 상대에게 과한 부담이나 어려움을 주지 말고 보내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슬픔이나 분노의 감정을 마음껏 드러내서는 안 된다. 사랑에는 이별이라는 분명한 고통이 따르기도 하지만, 이별만이 유일한 고통은 아니다.

풍향계/ 쉬운 이별

박혜경 여성학박사

이별할 때 쿨한 태도를 갖는 것이 연애의 새로운 규범이 되었다. 헤어지는 상대에게 과한 부담이나 어려움을 주지 말고 보내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슬픔이나 분노의 감정을 마음껏 드러내서는 안 된다. 사랑에는 이별이라는 분명한 고통이 따르기도 하지만, 이별만이 유일한 고통은 아니다. 사랑에는 기대, 책임과 약속, 시간 배분, 다른 관계와의 우열관계 등으로 갈등을 겪게도 한다. 시간이 흐르면서 새로운 생애사건을 맞닥뜨리게 되면 관계에 균열이 생기기도 한다. 감정을 쏟아붓고, 시간과 돈을 들이고, 삶의 다른 기회와 관계들을 희생하고 양보하면서 유지해 온 연애 관계가 이별로 끝나게 되면 고통과 상처를 남긴다.

연애 관계가 끝나는 것은 기존 관계에 문제가 있기 때문이라고 여겨지지만 그렇지만은 않다. 연애는 새로운 연애의 가능성 때문에 끝나기도 한다. 인간의 감정이 유동적이고 누군가를 사랑할 때 세상의 모두를 만나본 뒤에 최종적으로 상대를 선택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나중에 진짜 운명의 상대를 만났다고 느낄 수도 있다. 근대 이래 사랑이 친밀한 관계의 최고의 윤리가 된 세상에서 ‘사랑이 죄는 아니기’ 때문에 새로운 사랑을 ‘진짜 사랑’이라고 한다면 반박하기 어렵다.

연구에 의하면 결혼에서도 이혼선택은 재혼의 가능성이나 다른 연애의 가능성으로부터 영향을 받는다. 순수하게 감정에만 기초해 있다고 보는 건 환상이지만, 연애는 결혼보다 더 감정에 기반을 두고 있기 때문에 더욱 불안정하다. 불안정성은 연애 관계의 숙명과 같은 것이다.

한국에서 연애는 이르면 십대에 시작하고 결혼은 30대를 훌쩍 넘어서 한다. 평균 초혼연령이 남녀 모두 30을 훌쩍 넘어선 지 오래기 때문이다. 결혼을 하는 경우에는 대개 20년 가량 혼전 연애기를 보내게 된 셈이다. 점점 결혼 연령이 높아지고 생애 독신자도 늘어가는 추세를 감안하면, 연애는 - 연애를 하든 안 하든, 못 하면 어쩌면 더욱 - 생애의 상당한 기간 동안 문제가 된다. 이 시기는 연애의 기쁨과 즐거움, 갈등, 이별의 아픔과 혼란이 반복되는 시기다.

독일의 울리히 벡 부부는 이러한 현상을 연애중독이라고 부르면서 이 상황을 혼란스럽지만 또한 정상적인 상태라고 설명했다. 우리도 1990년대 이래 성개방 풍조의 확산에 따라 연애가 더욱 자유로워졌으므로 벡 부부가 분석한 90년대 독일사회와 유사한 면이 있다.

하지만 최근 상황은 더 복잡해졌다. 금융자본주의 질서 하에 빈부격차는 더욱 양극화되어 왔고, 경제의 불확실성과 불안정성이 커졌다. 좋은 일자리를 찾아 국내와 해외로 떠나는 이들도 증가하면서 불안정한 장거리 연애가 늘어났고, 지역에 따라서는 연애 상대를 만나는 것에 어려움을 겪기도 한다. 연애에서 갈등요인이 늘어났고, 연애 자체가 힘들어지기도 했다. 벡 부부가 금세기만큼 남녀가 많이 싸운 시대는 없었다고 말했던 대로의 상황이다.

90년대 독일사회에 대한 벡의 분석과 다른 것은 자녀에게 매달리는 현상 대신 우리의 경우에는 반려동물이 증가하고 최근에는 인공지능, 나아가 휴머노이드와의 정서적 관계가 출현했다는 것이다. 휴머노이드가 독거노인 등 보살핌이 요구되는 경우에 새로운 대안이 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과 연애관계와 같은 깊은 정서적 관계를 맺는 것에 대해서는 구분이 있어야 한다고 본다.

반려동물과 휴머노이드와의 관계의 특성은 시작과 끝을 내가 정할 수 있고, 관계의 충성심과 정서적 보상을 대체로 내 의도대로 얻을 수 있으며, 정서적 경제적 비용이 사람보다 적게 든다는 것이다. 이런 것을 효용이라고 볼 때 휴머노이드가 반려동물보다 훨씬 유리하다. 심지어 휴머노이드는 보살피는 노동과 책임, 죽음 같은 것을 겪지 않아도 된다. 반려동물은 나름대로 진짜의 감정을 인간에게 준다는 점도 다르다. 동물의 권리를 옹호하여 반려가족을 이루는 경우라면, 애초에 휴머노이드와의 관계와 그 동기에서 다르다.

연애 때문에 또는 연애를 하지 못해서, 또는 연애가 끝났기 때문에 고통스러울지라도 인간세상에서 연애나 외로움을 없애는 것도, 연애에서 이별과 고통을 없애는 것도 불가능할 것이다. 그렇다고 거절도 이별도 없는 연애를 위해 휴머노이드와의 친밀한 관계를 맺는다면 인간의 마음은 궁극적으로 괜찮을까? 따듯한 위로와 정서적 지지 등 감정만 인출해서 나에게 필요한 때 경험할 수 있는 관계를 맺을 수 있다는 것은 유혹적이기는 하다. 하지만 그것에서 얻을 수 있는 것은 진짜 감정은 아니다. 인간은 나를 사랑한다는 연인의 마음을 다시 확인하고 싶어하기도 한다. 심지어 헤어진 연인에게도, 어릴 때 나를 버린 부모에게도 한때는 정말로 나를 사랑한 적이 있는지 궁금해 한다. 전원을 끄면 내 마음대로 끝낼 수 있는 관계가 넘쳐나는 세상으로 바뀐다면 어떨까. 진짜 감정은 중요하지 않아. 사랑하는 척만 해 줘. 그런 세상이 된다면, 인간의 마음을 어찌 할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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