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픽사베이
[주간한국 김택수 기자] 뇌는 한 평생 스스로를 고쳐 쓴다. 성인기에도 감각 회로를 재설계하는 뇌의 원리가 밝혀지면서 과학은 새로운 국면을 맞았다. AI는 뇌의 학습법을 모방해 효율을 높이고, 반도체는 뇌처럼 보고 즉시 판단하는 구조로 진화하고 있다. 한편 뇌과학은 침 한 방울로 질환을 정밀 진단하는 기술로 의료의 패러다임을 바꾸고 있다. 뇌를 배우는 AI·AI로 읽는 뇌, 그 경계를 넘나드는 과학의 대화가 시작되고 있다.
◇ 성인기에도 재설계되는 뇌 회로
‘어른이 되면 뇌는 완성된다’는 오랜 믿음이 흔들리고 있다. 연세대·DGIST 공동연구팀은 최근 성인기에도 뇌가 감각 회로를 능동적으로 재설계한다는 사실을 세계 최초로 입증했다. 뇌 깊숙이 자리한 시상망상핵(TRN)은 외부 자극을 걸러내는 ‘감각 검문소’ 역할을 한다. 그동안 학계는 이 검문소가 결정적 시기를 지나면 고정된다고 봤지만 연구팀은 청소년기에서 성인기로 넘어가는 과정에서도 TRN 회로가 재구성된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생쥐 실험 결과, 성인기로 접어들면서 특정 흥분성 입력이 줄어들고 미세한 촉감 구별 능력이 강화됐다. 연구팀은 시냅스 접착단백질 LRRTM3가 이 과정의 핵심 스위치라고 밝혔다. 이 단백질을 제거한 생쥐는 성인기 회로 정교화가 충분히 일어나지 않았고 촉감 구별 능력도 현저히 떨어졌다.
이 발견은 자폐 스펙트럼 장애, ADHD, 조현병 같은 감각 처리 이상을 동반한 질환을 새로운 시각에서 이해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했다. 감각 인지 장애를 개인의 성향 문제가 아닌 뇌 회로의 성숙 과정 관점에서 접근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고령화 시대, 성인기 이후에도 기능 회복 가능성을 제시했다는 점에서 의의가 크다.
◇ 뇌를 닮은 기술, 학습과 하드웨어의 진화
뇌가 평생에 걸쳐 스스로를 재구성한다는 발견은 신경과학의 성과에 그치지 않는다. 뇌 회로가 경험을 통해 정교화되는 원리는 인공지능 설계의 새로운 영감이 되고 있다.
이상완 KAIST 뇌인지과학과 교수팀은 뇌의 ‘예측 부호화’ 원리를 딥러닝에 구현해 안정적 학습 기술을 개발했다. 뇌는 다음 상황을 예측하고 실제 결과와 차이가 나면 그 오차를 줄이는 방향으로 스스로를 수정한다. 하지만 이 원리를 AI에 적용하면 신경망이 깊어질수록 오차가 특정 부위에 몰리거나 사라지는 문제가 발생했다.
연구팀은 AI의 ‘예측 오차가 앞으로 어떻게 변할지’까지 다시 예측하는 ‘메타 예측’ 방식을 제안했다. 오차를 한 번 더 생각하게 만든 것이다. 30가지 실험 중 29개에서 현재 AI의 표준 학습법인 역전파보다 높은 정확도를 기록했다. 기존 방식은 모든 층을 한 번에 계산하고 수정해야 하지만, 이 방식은 뇌처럼 분산적·부분적 학습으로도 큰 모델을 잘 학습시킬 수 있다. 이러한 알고리즘 혁신은 소프트웨어에만 머물지 않는다.
뇌를 닮은 AI는 하드웨어 차원에서도 진화하고 있다. 전상훈 KAIST 전기및전자공학부 교수팀은 지난해 12월 세계 최고 권위 반도체 학회 IEDM에서 센서·연산·메모리를 하나로 통합하는 AI 반도체 핵심 기술을 제시했다. 빛을 감지하는 센서와 뇌처럼 신호를 처리하는 회로를 아주 얇은 층으로 만들어 위아래로 겹쳐 하나의 칩에 넣었다.
기존에는 이미지를 찍고, 숫자로 바꾸고, 메모리에 저장하고, 다시 연산하는 여러 단계를 거쳐야 했지만 이 기술로 센서 안에서 바로 연산이 이뤄졌다. 불필요한 데이터 이동을 없애 전력 소모는 크게 줄이고 반응 속도는 획기적으로 높였다. 연구팀은 해당 기술이 초저전력 엣지 AI부터 대규모 AI 메모리까지 아우르는 차세대 플랫폼으로 확장될 것으로 전망했다.
AI가 읽는 뇌, AI가 지치게 하는 뇌
뇌를 모방한 기술이 AI를 진화시키는 동안, 역으로 AI는 뇌를 더 정밀하게 읽어내는 도구로 성장하고 있다. 뇌 질환 진단 영역에서 이 변화는 두드러진다.
정호상 고려대 바이오의공학부 교수팀은 침으로 뇌신경 질환을 조기 진단하는 AI 기반 센서 플랫폼을 개발했다. 표면증강 라만 산란 기술 기반 센서로 침 속 극미량 단백질 신호를 안정적으로 측정하고, 센서 표면에서 분자를 포획해 미세한 신호 검출을 돕는 GME(galvanic molecular entrapment) 기술을 적용해 신호를 더 뚜렷하게 포착했다. 실제 임상 침 시료 67건에 적용한 결과, AI 모델을 통해 뇌전증·조현병·파킨슨병 등 3종 뇌신경 질환을 93.94% 정확도로 구별했다.
AI가 뇌를 더 정밀하게 이해하게 된 것은 분명한 진전이다. 하지만 AI와 뇌의 관계는 일방향이 아니다. AI가 뇌 질환을 진단하는 동안 정작 인간의 뇌는 AI 사용으로 인한 새로운 부담에 직면하고 있다.
보스턴컨설팅그룹과 미국 리버사이드 캘리포니아대 연구팀이 대기업 근로자 1488명을 조사한 결과, 개인의 인지 능력을 넘어선 과도한 AI 도구 사용이 ‘AI 뇌 과부하’를 일으킨다는 사실이 확인됐다. AI 업무에서 가장 정신적 부담이 큰 것은 작업자가 직접 상황과 결과물을 모니터링하는 ‘감독’이었다.
여러 AI 에이전트를 동시에 관리하고 AI가 만든 결과물을 검토하는 것이 큰 스트레스로 작용했다. 정신적 피로도는 AI 감독 업무가 적은 근로자보다 12% 높았다. 연구 생산성은 AI 도구를 3개 쓸 때까지는 높아졌지만 4개 이상 사용할 때는 낮아졌다. 업무에 AI를 사용하는 사람의 14%가 AI 뇌 과부하를 경험했고, AI 과부하에 걸린 사람은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의사 결정 피로를 33% 더 많이 느꼈다.
성인 뇌의 가소성 발견은 뇌가 고정된 기계가 아니라 끊임없이 스스로를 재설계하는 유기체임을 보여준다. 이 원리를 AI에 적용하면 적은 에너지로 효율적으로 학습하는 인공지능이 가능하고 이를 반도체로 구현하면 보고 즉시 판단하는 차세대 하드웨어가 탄생한다. 역으로 뇌 회로를 정밀하게 이해하면 질환을 새로운 방식으로 치료할 수 있다. 하지만 AI와 인간 뇌의 공존은 단순히 기술 도입의 문제가 아니다. AI 과부하 연구가 시사하듯, 인간의 인지 능력에 맞는 적절한 AI 활용 방식 설계도 함께 이뤄져야 한다.
김택수 기자 kts@hankook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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