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재영 한국기술교육대학교 명예교수
▲ 정재영 한국기술교육대학교 명예교수
청주 흥덕사(興德寺)에서 1377년에 금속활자본 ‘불조직지심체요절(佛祖直指心體要節)’이 간행된 것은 우연한 일이 아니다. 고려시대에는 실제로 왕실이나 각 사찰 등에서 목판본 전적들을 대대적으로 간행했을 뿐만 아니라, 왕실 주도로 금속활자를 세계 최초로 발명하여 서적 간행에 적극적으로 사용한 바 있다.
1370년대에 와서는 지방의 사찰에서도 자체적으로 금속활자본 직지를 간행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고려 중기 무렵 청주 무심천 변에 있었던 사뇌사(사내사)와 운천동 지역 흥덕사 등에서는 많은 청동제 금속 유물들을 직접 만들어 사용하고 있었다. 사뇌사 터 발굴 유물들이 그것을 웅변하고 있다. 당시 흥덕사 주변의 각 사찰과 공방에서는 단기간에 활자를 주조할 수 있는 기반이 마련돼 있었다.
그 당시 흥덕사에서 ‘불조직지심체요절’을 간행할 때 있었던 아름다운 이야기들이 남아 전해지고 있다. 실제로 금속활자본 ‘직지’의 맨 마지막 면에는, 이 책을 간행할 때 주도적으로 참여하여 금속활자본 직지를 인쇄해 배포한 주인공들의 이름이 남아 있다. 석찬(釋璨)과 달담(達湛), 그리고 비구니 묘덕(妙德)이 그들이다. 석찬은 백운화상 경한의 시자(侍者)로서 스승이 편집한 백운화상어록(白雲和尙語錄)을 금속활자로 인쇄하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했고, 비구니 묘덕은 흥덕사의 금속활자본과 취임사에서 바로 다음 해에 목판본으로 직지를 간행할 때도 재정적으로 지원한 시주(施主)였다. 석찬과 달담은 스승의 가르침을 세상에 널리 펴기 위해 묘덕의 시주를 받아 흥덕사에서 금속활자로 직지를 간행한 것이다.
▲ 정재영 한국기술교육대학교 명예교수
‘직지’가 현재 청주에 남아 있지 않은 사실은 아쉽지만, 고도로 발전된 인터넷과 인공지능 시대에 직지의 가치를 새롭게 재정의하고 과학적으로 재해석함으로써 직지와 세종의 한글 금속활자 문화를 세계에 제대로 알릴 수 있을 것이다. 한국의 전통 인쇄 기술의 가치를 창조적으로 계승하고 발전시켜 나간다면 이 일도 어려운 일이 아닐 것이다.
앞으로 예상해 볼 수 있는 직지 문화의 미래상 중 몇 가지를 제시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직지를 세계 지식·정보 혁신의 상징(Global Innovation Symbol)으로서 가치 정립을 지속적으로 추진해야 한다. 직지는 구텐베르크 성경(1455년)과 함께 새로운 인쇄 기술의 개발을 통해 정보의 대량 생산과 공유시대를 연 혁신의 시발점으로 오늘날 인터넷과 인공지능의 이어지는 정보 혁명의 미래 원형으로 가치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둘째, 디지털과 인공지능 기술을 활용해 직지를 시공간을 초월한 새로운 이미지와 콘텐츠로 재탄생할 수 있도록 발전시켜야 한다. 프랑스국립도서관에 보관돼 있어 직지의 실물을 접하기 어려운 물리적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서도 고화질 3D 디지털 스캐닝 등 새로운 VR/AR 기술을 접목한 다양한 콘텐츠 개발과 전시 기술의 고도화를 통해 세계 곳곳에서 누구나 접속할 수 있는 ‘디지털 혁신 기록 문화유산 콘텐츠로’로 거듭나야 한다. 청주의 직지 특구가 인류의 미래 기록 문화유산을 보존하고 관리하는 세계적인 거점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을 것이다. 직지 특구에 설립된 유네스코 국제기록유산센터(ICDH)를 중심으로 세계 기록 문화유산의 디지털 플랫폼화를 추진할 수도 있을 것이다.
셋째, 직지는 현재 유네스코가 인정하는 글로벌 인쇄·기록문화 아이콘으로 가치를 가지고 있다. K-컬처의 문화적인 뿌리이기도 하다. 따라서 우리는 직지의 콘텐츠를 글로벌 문화의 킬러 콘텐츠로 다양하게 개발해야 할 필요가 있다. 인쇄 기술 문화유산의 상징으로서뿐만 아니라, 직지와 관련된 탄탄한 스토리들을 개발해 인공지능을 활용한 다양한 영상 자료들로 확장해 가야 한다. AI 영상 기술을 활용한 미디어아트와 웹툰 그리고 오페라와 뮤지컬 등 예술 영역까지 기존의 콘텐츠를 보완하고 새로운 콘텐츠들을 개발해야 한다. 전시에서도 기존의 개념에서 탈피해 기존 인식의 경계를 뛰어넘는 새로운 디지털 전시 시스템을 구축할 필요가 있다. 직지에서 강조하고 있는 선(禪) 사상은 물질문명이 극대화된 현대사회의 문제를 극복하는 데도 이바지할 수 있다. 물질만능과 기후 위기의 현대 문명사회의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는 미래 철학으로 그 가치가 다시 조명 받을 것이다.
넷째, 청주에서는 2004년 제정된 ‘유네스코 직지상(Jikji Memory of the World Prize)’을 통해 전 세계 기록유산의 보존 및 접근성에 기여한 인물·기관을 지원하는 제도를 지금까지 주도적으로 운영하고 있다. 청주가 세계적인 문화유산 보호 문화를 선도하는 미래형 브랜드를 주도적으로 만들어가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앞으로는 ‘유네스코 직지상’을 세계 문화계가 주목하는 명실상부한 상으로 발전시켜야 한다.
인공지능 기술은 지식의 저장이나 전달을 도와줄 뿐만 아니라, 스스로 새로운 지식도 만들어낼 수 있다. 그동안 우리가 경험하지 못한 새로운 기술의 세계가 도래한 것이다. 금속활자의 발명이 인류의 지식 전달에 혁신을 만들었듯이 인공지능은 인터넷과 함께 인류의 지식 정보 전달에 엄청난 혁신과 변화를 불러올 것이다.
직지 문화의 전통은 오늘날 현재 대한민국의 발전과 직결돼 있고, 앞으로 우리가 가야 할 미래와도 직결돼 있다. 직지와 세종이 만든 한글 금속활자 등은 역사적인 세계 기록문화 유산일 뿐만 아니라, 디지털과 AI 융합기술과 만나 전 세계와 새로운 방법으로 소통할 수 있는 살아있는 인류의 문화 자산이다. 직지는 미래에도 인류의 기록문화 지식을 공유할 수 있는 글로벌 문화의 핵심 브랜드로서 가치를 가질 것이다. 이것이 바로 지속 가능한 미래 가치를 실현할 수 있는 직지의 역사·문화적인 의미이다.
중부매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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