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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칼럼] 무용(無用)의 용(用)

생성형 AI가 인간의 지적 노동을 빠른 속도로 대체하는 시대다. 복잡한 코딩과 통계 분석은 물론, 몇 초 만에 완성도 높은 보고서와 그럴듯한 그림까지 척척 만들어내는 기계의 능력을 보고 있노라면 인간이 수십 년간 갈고닦아 온 기능적 능력들의 가치가 무색해진다.

[칼럼] 무용(無用)의 용(用)

행복을 여는 창

김지현 교육학 박사

생성형 AI가 인간의 지적 노동을 빠른 속도로 대체하는 시대다. 복잡한 코딩과 통계 분석은 물론, 몇 초 만에 완성도 높은 보고서와 그럴듯한 그림까지 척척 만들어내는 기계의 능력을 보고 있노라면 인간이 수십 년간 갈고닦아 온 기능적 능력들의 가치가 무색해진다. 산업사회 이후 과학기술의 발달로 실용적인 학문과 물질적 가치의 중요성이 커지면서 문학, 철학, 역사로 대표되는 인문학은 ‘돈이 되지 않는 쓸모없는 학문‘이라는 눈총을 받아 왔다. ‘문송합니다.’라는 신조어가 생길 정도로 인문계 기피 현상과 이공계 쏠림 현상이 지속되던 상황에서 최근 인문계열 전공자만을 대상으로 한 대기업의 채용 공고가 등장해 화제가 되고 있다.

보통 목적에 부합하거나 당장 이득을 주는 것을 ‘유용(有用)‘하다고 평가하는 세상에서 장자의 ‘무용지용(無用之用)‘은 이러한 세속적 기준을 뒤집을 수 있는 철학적 통찰을 제공한다. 그는 들판에 우뚝 선 굽은 나무, 즉 ‘무용지목(無用之木)‘을 비유로 들었다. 똑바르고 곧은 나무는 집을 짓는 재목으로 쓰이기 위해 목수의 도끼에 일찍 베여 나가지만, 굽어서 어디에도 쓸모가 없는 나무는 도끼날을 피하여 오랫동안 천수를 누린다. 그리고 마침내 길 가던 나그네에게 넓고 깊은 그늘을 선사하는 위대한 존재가 된다. 이것이 바로 장자가 말한 ‘무용의 용‘, 즉 쓸모없어 보이는 것이야말로 가장 본질적이고 거대한 쓸모를 품고 있다는 역설이다.

드라마 「미스터 선샤인」에서 조선 최고 명문가의 자제인 김희성은 부귀영화나 권력, 의병 활동 같은 세속적이고 사회적 ‘유용함’을 좇지 않는 인물이다. “내 원체 아름답고 무용(無用)한 것들을 좋아하오. 달, 별, 꽃, 바람, 웃음, 농담 뭐 그런 것들.”이라며 자신을 한량으로 포장하고 시와 산문으로 기록을 남긴다. 총과 칼에 비해 글이나 예술은 아무런 힘이 없는 ‘쓸모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렇게 기록된 역사는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여 결속시키고 의병 활동의 당위성을 후대에 전하는 가장 강력하고 지속적인 ‘쓸모’를 발휘한다. 또한, 영화 「죽은 시인의 사회」에서도 쓸모없어 보이는 시와 낭만은 수동적인 부속품으로 길들어지던 아이들의 영혼을 깨우고, 스스로 삶을 주체적으로 바라보게 만드는 가장 결정적인 쓰임(用)을 발휘한다.

지금 우리가 맞이한 AI 사회는 점점 더 혹독한 효율성의 논리를 요구한다. 최적화된 결과물과 압도적인 생산성을 자랑하는 알고리즘 앞에서, 인간이 단순한 계산이나 정보 처리 능력으로 AI를 압도하기란 불가능하다. 만약 우리가 스스로 특정 기능을 수행하는 ‘도구적 유용성‘으로만 평가한다면, 인간은 AI라는 더 뛰어난 도구에 의해 언제든 대체될 수 있는 존재로 전락하고 말 것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쓸모없음의 쓸모‘인 인문학이 지닌 진가가 드러난다.

인공지능은 정해진 목표를 향해 가장 빠르고 효율적인 길을 계산해 낼 수 있지만, “왜 그 길을 가야 하는가?“라는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지는 못한다. 인간이 도구적 기능성이라는 도끼날을 피하고, AI에 의해 대체되지 않는 고유한 존엄성을 지키려면 스스로 질문하는 힘을 길러야 한다. 고전을 읽고, 타인의 아픔에 공감하며, 삶의 의미와 윤리적 가치를 고민하는 인문학적 탐구는 당장 어떠한 경제적 부산물도 만들어내지 못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것은 인간이 기계의 부속품이 되지 않고, 자신만의 고유한 삶의 궤적을 그리게 만드는 단 하나의 그늘이 되어 준다.

장자의 굽은 나무가 도끼를 피했기에 무성한 그늘을 만들 수 있었듯, 사회가 정의한 편협한 유용성에 흔들리지 않고 인간만의 고유성을 지켜낼 때 비로소 우리는 AI를 견뎌낼 거대한 생각의 그늘을 키울 수 있다. 시를 읽고, 질문을 던지며, 쓸모없는 것들의 아름다움을 알아채는 인문학적 사유, 그것이야말로 기술이 전지전능해질수록 인간이 인간으로 남아있게 만드는 가장 강인하고도 위대한 ‘무용의 용‘이다.

김지현 교육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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