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쫌!

쫌! 이명길 수필가 긴말이 필요치 않다... 응원석 계단 모퉁이에 쪼그리고 앉은 남자의 손에 ..'쫌!'이라 쓴 종이 한 장이 들렸다... 누군가에 부탁하는 듯, 어쩌면 간절하게 애원이라도 하듯이 글자 한 자에 온 마음을 실은 듯하다... .. .. .. .. .. 텔레비전 채널을 돌리다가 스포츠 뉴스에 꽂혔다... 야구 경기 중의 주요 장면인데 화면 ..

쫌!

이명길 수필가

긴말이 필요치 않다. 응원석 계단 모퉁이에 쪼그리고 앉은 남자의 손에 '쫌!'이라 쓴 종이 한 장이 들렸다. 누군가에 부탁하는 듯, 어쩌면 간절하게 애원이라도 하듯이 글자 한 자에 온 마음을 실은 듯하다.

텔레비전 채널을 돌리다가 스포츠 뉴스에 꽂혔다. 야구 경기 중의 주요 장면인데 화면 속 야구장은 이미 뜨겁다. 치어리더들의 절제된 동작이 경기장을 흠뻑 달게 한다. 홈런이 터져 관중석에 플래카드가 세차게 흔들리고 응원 함성이 허공으로 날아오른다. 이내 한 남자의 얼굴로 카메라가 옮겨지더니 들고 있는 글자가 화면 가득 키워진다. 그래도 남자는 묵묵히 종이만 들고 있다. 소리치지도 들썩이지도 않는다. 그저, 간절한 바람인 듯 '쫌!'이라는 글자만 보여준다.

'쫌!', 단 한 음절에 사나이의 기질과 인생이 모두 담겼다. 거칠지만 따뜻하고 불같지만 무던한 진심의 말 같다. 말이 길지 않아도 마음은 넓고 깊은 것이 부산 사람들의 정서다. 그래서인지 글자 하나에 사나이의 인생과 지역 감각과 간절함이 응축돼 보인다. 선수에게 건네는 응원만이 아닌 것 같다. 거기 모인 사람 모두의 마음이 글자 하나에 담겼다. 단순한 사투리로만 넘길 수 없는, 삶을 버텨내는 사람들의 마음에서 길러진 말이 아닌가. 느슨하지 않으면서 단단하게 동여매는 힘이 느껴진다.

상대의 행동에 자제를 바랄 때 '쫌!' 하고 소리에 힘을 싣게 된다. 그러면 대부분의 사람은 기에 눌려 주춤해진다. 그 말 뒤에 굳이 다른 말을 덧대지 않아도 속뜻을 알아챈다. 간절한 바람이 있을 때도, 뭘 원하고, 뭘 잘못했어도 일일이 드러낼 필요가 없다. 때론 재치로 쓰이면서, 더러는 분노의 표출이 되기도 한다. 말하기에 따라 간절함을 대신하면서 따스한 정이 물씬 닿을 수도 있다.

성장기동안 부산에 살았다. 어린 마음에 끝말을 자르듯이 뱉는 사투리가 멋있다고 생각되어 흉내 내다가 부모님께 꾸중 들은 기억이 있다. 하지만 엄마는 언제부터 내 행동을 제지하고 싶을 때마다 '쫌!'이라 단절음을 뱉었고, 그때마다 주춤해진 나는 엄마 눈치를 살폈다. 그게 사투리의 힘이었다.

투박하면서 정겹지만 말의 뼈대만 남기고 끝을 딱 자르면 오해의 소지도 된다. 표준말을 쓰는 사람이 들으면 말투가 단호한데 목소리도 크고 강하여 감정이 격양된 것으로 보인다. 그러니 성격이 급하고 화가 많다고 단정할 수 있다.

'쫌!', 권유인가 싶으면서 통보이기도 하다. 한 번에 쏘는 압축된 공기의 버튼 같아 소리의 길이나 억양을 조절해야 한다. 짧게 던지면 부정어 같고, 길게 끌면 청유 같다. 툭 던질 때면 단절을 말하듯 하여 듣는 사람이 나머지를 채우게 한다. 굳이 말을 많이 하지 않아도 소리 세기에 따라 뜻이 전달되지만 새겨보면 유머와 애정을 뺄 수가 없다.

화면 속 남자는 야구든 인생이든 포기하지 말라는 메시지를 주는 건 아닐까. 부산 바다처럼 거칠고도 따뜻한 마음, 한 번 품은 꿈은 끝까지 밀고 나가는 사나이의 기질까지 '쫌'이라는 음절에 다 들어있는 것 같다.

'이겨봐라, 조금만 더 힘내라, 잘해 보자, 부탁한데이' 등 갖가지 말로 마음 내지 않아도 통한다. '쫌!', 찐하게 뭉쳐진 짧지만 큰 말이다. 험한 세상에 사람을 일어서게 할 말인 것 같다. 누구라도 세상살이 버거울 때 이 말을 외쳐보면 어떨까. 투박하고 깊은 말이 사랑과 인내와 위로로 전달되어 응원이 될 것 같다.

만사 시끄럽고 어수선한 시즌이다. 이럴 때 보이지 않는 곳에서 부산 사나이가 외칠지도 모르겠다. '쫌!', 남자의 한 마디가 채찍처럼 떠오른다. 나도 스스로에 용기를 부추기는 단어로 기억해 두련다. 인생도 야구처럼 역전의 순간이 올 수 있기에.

이명길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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