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서 뭐가 되고 싶니?'라는 질문에 갇힌 진로 교육을 넘어, '나는 어떤 사람인가'를 묻는 근본적인 성찰이 필요한 시대입니다. 이로운넷은 인공지능 시대, 평생직장의 개념이 사라진 오늘날 우리 아이들이 주체적으로 삶을 설계할 수 있도록 박근필 커리어 스토리텔러의 '수의사 작가의 진로 수업 10강'을 연재합니다.
20년 차 임상수의사이자 'N잡러'인 필자는 직업적 편견을 걷어내고 '나답게 사회에 기여하는 삶'의 방향을 제시합니다. 매주 화요일, 단순한 직업 선택을 넘어 미래 세대의 핵심 역량과 삶의 가치를 함께 고민해 보는 이 여정에 독자 여러분의 많은 관심을 바랍니다.[편집자]
"글쓰기가 직업이 되는 시대"
마흔이 되기 전까지 나는 글을 쓰는 사람이 아니었다.
학창 시절 독후감 숙제조차 버거웠다. 성인이 되어 수의사로 살면서 작가라는 단어는 내 삶의 어휘가 아니었다. 진료실이 내가 서 있는 무대의 전부였다. 그랬던 내가 지금은 여러 권의 책을 냈고, 이렇게 매주 칼럼을 쓴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시작은 거창하지 않았다. 번아웃으로 무너져 있던 어느 날, 우연히 읽은 책 한 권을 계기로 블로그를 열었다. 서툰 문장이었지만 매일 썼다. 쓰다 보니 마음이 가벼워졌다. 글쓰기가 내게는 항우울제였고 진통제였다. 그러다가 어느새 첫 책을 내고 작가가 되었다. 일 년 남짓 만의 일이다.
기록이 쌓이면 이름이 남는다
강원국 작가는《강원국의 글쓰기》에서 이렇게 말한다. "투명인간으로 살지 않으려면 내 글을 써야 한다."
나도 투명인간이었던 적이 있다. 이름은 있지만 세상이 나를 부르지 않았다. 출근하고 퇴근하는 수의사 한 명. 그게 전부였다.
그런데 블로그에 하루 한 편씩 쌓인 글이 나를 세상 밖으로 꺼내 놓았다. 누군가가 읽었고 댓글이 달렸다. 작가가 되고 강연 제안이 왔다. 내가 한 일은 단 하나였다. 매일 쓴 것이다.
기록이 쌓이면 스토리가 된다. 스토리가 쌓이면 이름이 된다. 그 이름이 곧 브랜드가 되고, 결국 커리어가 된다. 이 선순환의 출발점은 화려한 무엇이 아니라 지극히 평범한 한 줄이었다.
AI 시대, 왜 읽고 쓰고 말하는 게 힘인가
흔히 묻는다. 챗GPT가 글을 다 써주는 시대에 아이에게 글쓰기를 가르칠 필요가 있느냐고.
나는 반대로 묻고 싶다. AI에게 무엇을, 어떻게 쓰라고 지시할 사람은 누구인가.
질문하지 못하는 사람은 AI를 쓰지 못한다. 읽고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은 AI의 답을 검증하지 못한다. 자기 생각을 정리하지 못하는 사람은 AI가 써 준 글을 다듬지 못한다.
결국 읽고 쓰고 말하는 힘이 AI를 다루는 힘이다. 글쓰기는 단순한 '쓰는 기술'이 아니라 생각의 근육을 키우는 훈련이다. 한 줄을 쓰려면 세 줄을 생각해야 하고, 한 페이지를 쓰려면 열 페이지를 읽어야 한다. 쓰는 사람은 결국 깊이 생각하는 사람이 된다. AI가 절대로 대신해 줄 수 없는 것이 바로 그 힘이다.
아이에게 쓰는 힘을 어떻게 길러줄까
잘 쓰는 것보다 자주 쓰는 것이 먼저다. 매일 세 줄이면 충분하다. 오늘 있었던 일, 오늘 기뻤던 순간, 오늘 속상했던 일, 오늘 궁금했던 일. 꾸준히 쓰다 보면 '나는 쓰는 사람'이라는 정체성이 쌓인다.
독후감보다 독서 대화가 먼저다. 억지로 줄거리를 요약하게 하지 말고 책에서 기억에 남는 한 문장을 이야기하게 하자. 말이 정리되는 아이가 글도 정리한다.
아이의 글을 고쳐 주지 말고 끝까지 읽어 주자. 맞춤법을 바로잡기 전에 "이 문장이 특히 좋다"라고 먼저 말해 주자. 아이는 칭찬받은 지점을 기억하고, 다음 글에서도 그 지점을 스스로 찾아 돌아온다.
부모가 먼저 쓰는 모습을 보여주자. 어려울 것 없다. 가계부도 글이고, SNS 한 줄도 글이다. 아이는 말보다 부모의 행동을 따라한다.
투명인간에서 나의 이름으로
'작가가 된 수의사'라는 문장이 지금 내 명함이다. 동물병원 밖에서도 내 이름은 남는다. 회사가 더 이상 내 자리를 지켜줄 수 없을 때, 나이가 경쟁력이 되지 않을 때, 그때 나를 지탱해 주는 건 내가 써 온 문장들이다.
글쓰기는 더 이상 작가의 전유물이 아니다. 직업인이라면, 아이를 키우는 부모라면, 자기 이름으로 오래 살고 싶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마흔까지 한 줄도 쓰지 않았던 내가 해냈다면, 이제 막 문장을 배우는 아이들은 얼마나 멀리 갈 수 있을까. 아이에게 물려줄 가장 강력한 자산은 통장이 아니라 매일 한 줄을 쓰는 습관일지도 모른다.
<이번 주 하나의 질문>
"우리 가족에게는 '쓰는 시간'이 있는가. 아이의 노트 옆에, 나의 노트도 함께 펼쳐져 있는가."
박근필 수의사
필자 박근필: 박근필성장연구소 소장이자 커리어 스토리텔러로, 수의사로서의 경험과 작가로서의 통찰을 바탕으로 타인의 성장을 돕는 그로쓰 퍼실리테이터로 활동 중이다. 저서로는 《마흔 더 늦기 전에 생각의 틀을 리셋하라》등이 있다.
박근필 객원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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