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왕 폭사 계획 드러나 사형선고… 옥중에서 23세에 의문사
도쿄서 박열과 아나키스트 모임 결성 활동
관동대지진 때 피검, '대역사범'으로 몰려
재판서 당당히 "일왕부정, 일제타도" 밝혀
가네코 후미코와 남편 박열은 일본 왕실 인사를 죽이려 했다는 대역죄로 기소돼 1926년 3월 25일 도쿄의 대심원(대법원)에서 사형선고를 받았다. 가네코와 박열 부부는 재판부에 요구하여 박열은 한국식 사모관대, 가네코는 한복 차림으로 재판을 받았다.
가네코 후미코와 박열은 1922년 10월부터 도쿄 에바라군 세타가야 데이지리의 신발가게(게다) 주인의 2층 다다미방에 세를 얻어 함께 살았다. 월세는 10엔, 3평 정도의 방이었다. 두 사람은 동거에 들어가면서 첫째 동지로서 함께 할 것, 둘째 가네코 후미코가 여성이라는 관념을 없애고 여성으로서 차별하지 않을 것, 셋째 둘 중 하나가 사상적으로 타락해 권력자와 악수하는 일이 생길 경우 즉시 공동생활을 그만두기로 약속했다. 고학을 하여 의학전문학교를 가려던 꿈을 접고 아나키즘 활동가로 나선 것이다. 이념과 신념, 사랑을 바탕으로 계약동거를 하며 함께 투쟁하는, 남녀가 평등한 부부가 된 것이다.
1922-23년 경의 가네코 후미코. 아나키스트 운동과 관련 경찰에 조사를 받기 위해 출두하는 모습으로 알려졌다.
가네코-박열 부부는 자신들이 사는 셋집을 불령사 사무실로 쓰며 아나키즘 운동을 벌였다.
도쿄도 시부야구 도미가야의 불령사 옛터는 현재 주택이 들어섰다. 사진=일본 블로그 perestroika1910
박열은 경북 문경 출신으로 서울의 경성고등보통학교를 다니던 중 1919년 3.1운동에 참여했고, 일제가 세운 학교에 다니는 것은 치욕이라며 학업을 중단했다. 1919년 10월 일본으로 건너가 독립운동을 하기로 하고 도쿄에 도착, 신문배달과 인력거꾼 등 고학을 하며 세이소쿠 영어학교를 다녔다. 아나키즘에 공감하게 됐으며, 오스기 사카에(大杉榮), 이와사 사쿠다로(岩佐作太郞), 사카이 도시히코(堺利彦) 등 일본의 유명한 사회운동가와 교류했다.
1920년대 일본은 산업화가 급진전되면서 물가상승과 실업, 빈부격차 등 다양한 모순과 갈등이 빚어졌다. 소련에서는 1917년 러시아혁명 이후 볼셰비키가 정권을 잡고 프롤레탈리아 독재체제를 수립했다. 이 시기 동아시아에 아나키즘이 등장, 크게 세력을 떨쳤다. 아나키즘은 개인의 자유를 절대옹호하는 사상으로 반국가, 반자본, 반종교, 반권력, 반봉건, 반불평등을 내세웠다. 일왕(천황)을 정점으로 한 일본의 제국주의와 전체주의를 배격했기 때문에 식민지 조선의 청년은 물론 일본의 젊은이들에게도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아나키즘은 자유를 억압하는 모든 것을 부정하며 파업과 폭동, 암살 등의 극렬한 투쟁을 주저하지 않았다. 중국에서 신채호 이회영 유자명 백정기 정회암 원심창 이강훈 등의 아나키스트 독립운동가가 일제와 친일 첩자에 대해 테러와 암살 활동을 벌인 게 그 사례이다. 권력과 권위, 국가를 부정하고, 어떤 당파에도 속하지 않으며, 모든 것을 흡수한다는 뜻으로 검은 색을 상징색으로 사용했다. 아나키스트 단체나 기관지, 활동에 검다는 뜻의 '흑(黑)' 자를 붙인 것도 이런 이유에서이다.
「흑도」 1922년 7월 10일자 창간호.
도쿄에서 공부하며 의혈단(철권단, 혈권단, 박살단)을 조직했던 박열은 1921년 김약수 정태성 원종린 등과 '검은 파도'를 뜻하는 '흑도회(黑濤會)'를 결성, 노동운동과 반정부운동을 벌였다. 가네코와 박열 부부는 이 모임의 기관지 「흑도」의 발행을 주도했다. 한국의 현실을 일본인에게 제대로 알리고 민족적 편견과 민족적 증오가 없는 세계융합을 실현하는 게 목표였다. 흑도회는 1922년 7월 니가타 시나노가와 수력발전소의 조선인 노동자 학살사건을 조사하고 고발했다. 일제는 수력발전소 공사현장의 가혹한 노동환경에 견디다 못해 탈출한 조선인 100여명을 살해하여 콘크리트에 매장하고, 강에 수장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흑도회는 현장 조사를 벌이고 폭로대회를 열어 일본사회에 큰 충격을 줬다.
「후토이센진」 제2호(1922년 12월)에 가네코 후미코(朴文子)의 글이 실려 있다. 자료= 박열의사기념관 제공
월간 「현사회」 3호 1923.3.15. 자료= 박열의사기념관 제공
흑도회는 공산주의 성향을 가진 김약수와 백무, 아나키즘을 추구하는 박열과 홍진유 그룹으로 분열됐다. 가네코와 박열은 1922년 12월경 신영우(신염파), 서상일, 서동성, 홍진유, 장상중, 일본인 구리하라 가즈오 등과 '흑우회(黑友會)'를 조직했다.
가네코와 박열은 흑우회의 기관지 「후데이센징(太い鮮人)」 발행을 주도했다. 일본어 후데이는 삐딱하다, 뻔뻔하다, 건방지다, 대담하다, 낯이 두껍다는 뜻을 가진 단어다. 일제는 조선에서 식민통치에 저항하는 불온한 조선인을 '불령선인(不逞鮮人)'이라 불렀는데 불령의 발음도 후데이였다. 조롱하고 야유하는 뜻으로 '뻔뻔한 조선인' 혹은 '삐딱한 조선인'을 보란 듯이 잡지 이름으로 사용한 것이다.
가네코는 후데이센징 2호에 '소위 불령선인이란' 제목의 글을 썼는데 그는 여기서 "불령선인, 그것은 불령하기 때문에 불령선인인 것이 아니라 독립과 자유의 뜻에 불타 살아가는 인간이기 때문에 일본의 권력 계급자들에게 최고로 불령한 것이다. 이러한 뜻에서 우리는 불령선인이 되는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한다"고 적었다.
가네코와 박열 부부는 생계를 해결하고 책을 펴내는 등 아나키즘 운동을 하기 위해 적극 돈벌이에 나섰다. 잡지에 광고도 유치하고 집에서 봉투를 붙이고 삯바느질을 했으며 인삼장사도 했다. 가네코가 머리에 수건을 두른 사진은 이 시기 장사할 때의 모습으로 알려졌다. 잡지 '현사회'에 조선인삼 광고를 게재하면서 조선인삼상 박문자라고 적었다. 일본처럼 남편 박열의 성을 따라 박문자라고 쓴 것이다.
「후데이센징」은 1923년 3월부터「현사회(現社會)」로 제목을 바꿨다. 이 책에 실린 가네코와 박열의 일부 글은 일제가 심하게 검열하고 삭제하여 내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할 정도이다.
◇가네코-박열 부부과 함께 불령사에 참여한 동지들
김중한(왼쪽부터), 서상경, 육홍균, 최영환(최범술)
가네코와 박열은 1923년 4월 '불령사(不逞社)'를 조직했다. 가네코 부부를 비롯 홍진유 육홍균 한현상 최규종 최영환 이필현 서동성 정태성 김중한 장상중 하일 김철 서상경 박흥곤 등 한국인 15명과 구리하라 가즈오(栗原一南), 니야마 하쓰요(新山初代), 노구치 시나니(野口品二), 나카다 게이자브로(永田圭三郞), 오가와 다케시(小川武) 일본인 6명 등 21명이었다. 가네코는 "불령의 무리란 권력에 대해 반역하는 허무주의와 아나키즘을 품고 있는 자들의 모임"이라고 밝혔다. 사무실은 가네코와 박열이 동거하는 집이었으며 집에 불령사를 간판을 내걸었다. 정기적으로 모임을 열었고, 아나키스트 미술가 모치츠키 가쓰라(望月桂)를 초청하여 강연회도 열었다. 조선에서 벌어지는 형평운동(백정들의 차별을 철폐하기 위한 운동)에 축전을 보낼 것과 친일파로 불리는 동아일보 기자를 구타할 것을 논의하기도 했다.
1923년 9월 관동 대지진 당시 일제 군경과 자경단원들이 노동운동가와 사회운동가, 조선인 등 6000여 명을 무차별 살해했다.
다소 유별나게 아나키즘 운동을 벌이던 가네코와 박열 부부, 불령사 동지들은 1923년 9월 관동 대지진이 일어나면서 거센 소용돌이에 휩싸인다. 일제는 계엄령을 내리고 군대와 경찰을 동원하여 일본인 자경단과 함께 노동운동가와 사회운동가, 조선인을 무차별 학살하고 잡아들였다. 조선인들이 방화와 폭동을 일으키고 우물에 독을 탔다는 유언비어를 퍼뜨렸다. 일제는 지진과 소요 사태로 인한 사망자가 231명이라고 했지만 실제는 6661명에 이르렀다. 가네코 부부도 체포되고 집안의 많은 문서와 잡지, 선전물이 압수됐으며, 불령사 동지 16명도 붙잡혔다. 일제가 요주의 인물과 조선인 6380명을 검거했는데 여기에 걸려든 것이다.
가네코 후미코와 박열이 관련된 사건을 보도한 1923년 10월 21일자 동아일보 기사. 일제의 보도통제로 제목에 '동경00음모'라고 표기했다.
박열이 불령사를 조직, 대중의 반역을 표방하고 무정부주의를 선전했다고 보도한 1925년 11월 25일자 동아일보 보도. 1개 면에 기사가 5건이나 실렸다.
가네코와 박열이 불경사건의 주범으로 조선인 집단 음모계획을 추진했다고 보도한 도쿄 아사히신문의 1925년 11월 25일자 보도. 당국이 보도 금지를 해제했다는 문구가 적혀 있다.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 김중한과 니야마 하쓰요의 이야기를 다룬 1925년 11월 27일자 시대일보 기사. 인물 사진 맨위가 박열, 아래 오른쪽이 가네코, 좌측이 김중한, 맨 아래가 니야마 하쓰요이다. 니야마는 옥중에서 죽은게 아니라 석방된 뒤 폐결핵으로 사망했다.
일본검찰은 불령사가 폭동계획을 세웠다고 몰아붙였다. 1923년 10월 20일자에 당시 오사카 아사히신문은 '지진 중에 혼란을 틈타 암살을 기도한 불령선인 결사대 대검거'라는 제목으로 보도했다. 그러나 증거가 없어 불령사의 회원 대부분 석방됐고, 가네코와 박열 부부만 기소됐다. 집중적인 조사를 받았던 김중한과 그의 애인인 니야마 하쓰요도 풀려났다, 니야마 하쓰요는 석방된지 얼마 안돼 지병(폐결핵)으로 사망했다. 가네코 부부에 대한 조사는 1923년 10월부터 1925년 6월까지 무려 2년 가까이 계속됐으며 가네코는 23회, 박열은 21차례나 신문을 받았다.
혹독한 조사 끝에 내놓은 결과는 세상을 놀라게 했다. 가네코 부부가 히로히토(裕仁) 태자 성혼식 때 폭탄을 던지려 했다며 '대역죄'를 적용한 것이다. 일제는 신문 과정에서 박열이 폭탄을 입수하려 했다는 이야기가 나오자 이것을 확대포장하여 폭동과 왕실(황실) 인사 암살을 시도한 대역사건으로 만들었다. 박열은 1922년 중국의 의열단과 연결되는 독립운동가 김한에게 폭탄을 구해달라고 요청한 적이 있었다. 1923년에는 일왕의 아들 결혼식장에서 귀족과 내각총리대신 등을 폭살시키자며 불령사 동지인 김중한과 폭탄 구입을 추진했지만 비용 때문에 그만뒀다. 말로만 거사를 꾸민, 아무 물증과 증인도 없는 사건이었다.
예심판사인 다테마스 가이세이(立松懷淸)는 교묘하고 집요하게 폭탄 건을 대역사건으로 몰고갔고, 가네코 부부는 굳이 이것을 부인하지 않았다. 가네코와 박열은 일왕(천황)도 인간에 불과하다며 일제가 왕실을 신격화하여 민중을 억압하고 침략전쟁을 일으키고 있다고 비판했다. 일제가 신성불가침으로 여기는 왕실을 뿌리째 부정하고 거부하며 재판을 저항과 투쟁의 무대로 삼았다.
조선일보 1926년 1월 20일자 보도에 박열이 재판장에게 요구한 내용이 실려있다.
얼굴을 가리기 위해 삿갓형의 용수를 쓴 채 법정에 들어서는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
일제가 천황제를 비판하는 이들 부부를 전향시키려 했지만 단호하게 거부했다. 또한 일제가 조선인인 박열만을 대역사범으로 몰아 재판하려 했지만 가네코는 기꺼이 남편과 함께하겠다며 처절한 사랑과 투쟁의 의지를 보여줬다. 대역죄와 조선-일본인 부부의 사랑까지 얽힌 사건은 일본은 물론 조선에서도 큰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조선의 신문사가 일본에 특파원을 보내, 직접 면회를 하고 기사를 내보낼 정도였다.
가네코 부부의 재판은 대심원에서 진행됐다. '대역죄'는 1심과 2심 없이 대심원(대법원)에서 단심으로 재판을 마쳤기 때문이다. 대심원 판결에 앞서 가네코는 1926년 3월23일 옥중 결혼을 한다. 변호를 담당했던 후세 다쓰지(布施辰治) 변호사가 구치소 접견실에서 이들 부부에게 혼인신고서를 작성케 한 뒤 관공서에 제출해준 것이다. 이로써 가네코와 박열은 법적으로도 부부가 됐다.
국내외 지대한 관심 속에 이뤄진 공판은 수차례 연기됐다. 박열은 재판과 관련 자신을 '피고'라고 부르지 말 것, 조선의 예복 착용, 재판장과 동일한 높이로 좌석 설치, 공판 전에 선언문 낭독을 허용할 것을 요구했고, 조선예복 착용과 선언문 낭독을 관철시켰다.
도쿄 대심원이 박열 부부에게 사형을 언도한 것을 보도한 1926년 3월 26일자 조선일보 기사.
최종 판결은 1926년 3월 25일 경찰의 삼엄한 경계가 펼쳐진 가운데 도쿄 대심원에서 열렸다. 마키노 기쿠노스케(牧野菊之助) 재판장은 형법 제73조 대역죄와 폭발물단속벌칙 제4조 위반을 들어 사형을 언도했다. 판결 순간 박열은 "비열한 연극"이라며 "재판장 수고했네"라고 했고, 가네코는 웃으면서 "만세!"를 불렀다고 한다.
일제는 가네코 부부 재판 직후 한바탕 연극을 보여준다. 최종 판결 당일 일본 내각은 회의를 열고 두 사람의 폭탄 투척 대상이 꼭 왕실에 해당되지는 않고, 실현 가능성도 적었다며 사면을 요청했다. 대역죄 적용이 부당했음을 스스로 인정한 셈이다. 일왕은 4월 5일 화답이라도 하듯 사형을 무기징역으로 특별감형했다. 특별사면장을 전달하자 가네코는 형무소장 앞에서 갈기갈기 찢어버렸다.
가네코 후미코의 옥중 사망을 보도한 일본 신문의 1926년 7월 31일자 기사.
가네코 후미코는 1926년 7월 23일 수감 중이던 도치기형무소에서 의문사한 뒤 이곳 형무소공동묘지에 매장됐다가 4개월 뒤 박열의 고향인 대한민국 경북 문경으로 옮겨졌다. 사진=일본 긴지(銀次)의 블로그 '역사로의 초대'
경북 문경의 박열의사 기념관 한켠에 조성된 가네코 후미코 묘소. 사진=박열의사기념관
판결 이후 불과 4개월 뒤 가네코는 죽음을 세상에 알린다. 도치기현의 우쓰노미야 형무소 도치기 지소에서 갑작스럽게 의문사한 것이다. 야마나시현에 사는 어머니에게 긴급전보가 전해졌고, 사체는 일제의 감시와 훼방 등 우여곡절 끝에 사후 4개월 만인 11월 박열의 고향인 조선의 경북 문경에 묻혔다.
가네코는 사후에도 이른바 '괴사진(怪寫眞)' 사건으로 일본 사회에 또 한번 엄청난 파문을 불러일으킨다. 가네코 부부가 예심 법정에서 다정하게 찍힌 사진이 1926년 7월말 세상에 공개된 것이다. 가네코가 박열의 무릎에 앉은 채 책을 읽는 사진이 언론과 정계에 유포돼 정치적 문제로 비화됐고, 이듬해 정계 개편까지 벌어지는 단초가 됐다.
가네코 후미코의 인생은 불과 23세로 끝났다. 내내 가난과 불행 속에 살았지만 그 어두운 자리에 머물지 않고 끊임없이 노력하며 앞으로 나아갔다. 봉건주의 구습이 여전히 맹위를 떨치던 동아시아의 1900년대 초, 가네코는 고통과 좌절을 자양분으로 하여 주체적이고 강인한 사람으로 성장했고, 시대적 모순에 대해서도 뚜렷한 생각과 사고체계를 갖춘 채 강한 의지로 자신의 뜻을 펼쳐나갔다. 여성은 정당이나 집회에 참석하지 못하고 투표권도 없는 시대였다. 자서전 「무엇이 나를 이렇게 만들었는가」의 글귀에 가네코의 목소리가 잘 담겨 있다.
"나를 학대한 사람들에게 감사한다. 만약 내가 내 아버지나 조부모, 삼촌과 고모의 집에서 아무 부족함이 없이 자랐다면…. 운명이 내게 은혜를 베풀어주지 않은 덕분에 나 자신을 발견했다. 그리고 내 자신의 길을 걸을 수 있었다."
김재근 선임기자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