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사회

[좋은 시를 찾아서] 압생트

눈을 감으면 꽃병 안에서 취한 꽃이 빛난다” 시의 첫 행이자 첫 연에서 시인에 고뇌의 깊이는 이미 결정된 셈이다. 압생트라는 술이 품고 있는 상징성은 혹은 어떤 유래는 고흐라는 화가를 통해 이미 독자들은 간파하고 있다.

[좋은 시를 찾아서] 압생트

박진형

눈을 감으면 꽃병 안에서 취한 꽃이 빛난다

잎맥이 보이지 않는 잎사귀가

코흐 곡선을 그리며 꿈틀댄다

하늘 아래 살아 있는 것이라곤 오직 꽃대뿐

독기 품은 향기는 벽과 침대에 갇힌다

사이프러스 사이로 녹색 요정이 모래 위에 발자국을 새긴다

귓속으로 스며들어 걷잡을 수 없는 몽상이 쏟아지면

점묘로 그려진 세상은 졸음에 겨워

방아쇠에 집게손가락을 넣는다

자화상이 지워지는 사이에도

칩거하며 낮잠을 자는 시계는

바늘이 찌른다는 것을 모른다

캔버스 위로 초록빛 유혹이 번진다

비소에 중독되어 교태를 부리며

끊임없는 심장 소리를 내는 분수대의 마네킹은

태양에 눈부시게 달아오르고

모래밭에는 녹옥석이 환상극 무대를 펼친다

눈을 뜨자 지붕으로 스며든 이끼가

잘린 귀의 아픔을 기억해 낸다

◇박진형= 2016년 《시에》 작품활동 시작. 2019년 국제신문 신춘문예 시조 부문 당선. 시조집 『어디까지 희망입니까』, 시집 『프랑스식 권태』. 문학동인 Volume 회장, 웹진 《DICA문학』 편집위원, 웹진 《시인광장》 편집장 역임. 용인문학회 회원, 시에문학회 회원, 한국작가회의 회원. 한국시인협회 회원. 2025년 올해의 단시조 대상, 2026년 천강문학상 시조 대상 수상.

<해설> 눈을 감으면 꽃병 안에서 취한 꽃이 빛난다” 시의 첫 행이자 첫 연에서 시인에 고뇌의 깊이는 이미 결정된 셈이다. 압생트라는 술이 품고 있는 상징성은 혹은 어떤 유래는 고흐라는 화가를 통해 이미 독자들은 간파하고 있다. 취한 꽃이 빛난다는 사실 하나를 두고 꽃병에서가 아닌 꽃병 안에서라는, 시인의 심리적 변형과 눈을 뜨면이 아닌 눈을 감으면 이라는 역발상적인 상황 설정은 시인 나름의 전략일 것이다. 술로 인해 취한 눈에 보이는 과거와 현재의 현상들은 압생트의 경험을 기록한 일종의 서사다. “귓속으로 스며들어 걷잡을 수 없는 몽상이 쏟아지면/점묘로 그려진 세상은 졸음에 겨워/방아쇠에 집게손가락을 넣는다”는 그런 서사의 함축일 것이고 화폭 속 점들이 꼬불거리는 선으로 살아나는 눈앞의 현상을 화가는 놓치지 않음으로 고흐는 정신이 살아 꿈틀대는 화면을 얻었을 것이다. 이처럼 시인 또한 눈을 감고 빛나는 꽃을 보는 시도가 “눈을 뜨자 지붕으로 스며든 이끼가 잘린 귀의 아픔을 기억해 낸다”라는 언어미학의 결정체를 만나고 있다. -박윤배(시인)-

이 기사 공유하기
페이스북X

이 기사를 추천합니다

i

댓글

0

후 댓글을 작성할 수 있습니다.

아직 댓글이 없습니다 이 기사에 첫 의견을 남겨보세요.

댓글 수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