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경제의 심장, 울산 석유화학단지가 다시 한번 거대한 변곡점에 섰다. 올해로 스무 번째를 맞이한 ‘울산 화학의 날’은 우리에게 단순한 축제의 장이 아니다. 1972년 울산 석유화학단지 준공 이후 반세기 동안 국가경제를 견인해 온 자부심을 되새기는 동시에, 생존을 위한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는 엄중한 성찰의 시간이다. 과거 우리는 황무지에서 기적을 일궈냈으나, 지금은 유례없는 복합 위기와 글로벌 패러다임의 대전환이라는 거대한 파고(波高) 한복판에 놓여 있다.
가장 시급한 위협은 안보의 불확실성과 공급망의 교란이다. 최근 미국과 이란 간의 긴장 고조로 촉발된 중동 분쟁은 우리 석유화학산업에 가혹한 시험대를 제시하고 있다. 세계 원유 수송의 핵심 동맥인 호르무즈 해협의 긴장감은 단순히 국제 유가 상승을 넘어, 나프타와 가스 등 석유화학 핵심 원료의 수급 체계 자체를 근본적으로 흔들고 있다. 이란의 봉쇄 위협과 이에 대응하는 서방 국가들의 조치가 맞물리며 발생하는 에너지 공급망의 불안정성은 국내 기업들의 원가 부담을 임계치까지 밀어붙이고 있다.
과거의 위기가 단기적 가격 변동에 그쳤다면, 작금의 국면은 원료를 제때 수급하지 못해 공장 가동 중단을 우려해야 하는 ‘에너지 안보’로 직결된다. 글로벌 경기 침체로 인한 수요 위축 속에서 원가는 오르고 수익성은 악화하는 ‘샌드위치 위기’는 이제 일시적 현상이 아닌, 우리가 마주해야 할 상시적 상수가 되었다. 이 시점에서 우리에게 주어진 지상 과제는 석유화학산업의 구조 고도화와 전략적 재편이다. 현재 울산 석유화학단지 내에서도 저수익 한계 사업 부문에 대한 매각과 자산 최적화 논의가 수면 위로 급부상하고 있다. 가동률 저하로 고통받는 노후 설비들을 과감히 정리하고, 기업 간 스와프(Swap)나 공동 운영을 통해 규모의 경제를 실현하려는 움직임이 시작되었다.
하지만 단순히 비효율을 덜어내는 것만으로는 이 위기를 돌파할 수 없다. 이제는 ‘샤힌 프로젝트’와 같은 과감하고 적극적인 투자를 통해 산업의 판 자체를 바꾸는 정공법만이 유일한 생존전략이다. S-OIL이 주도하는 9조 원대의 대규모 투자는 단순한 설비 증설을 넘어, 세계 최대 규모의 스팀 크래커를 통해 석유화학 비중을 획기적으로 높이는 ‘원유의 화학적 전환’의 본보기를 보여준다. 이러한 공격적 투자의 정신이 지금 울산 석유화학 업계에 가장 필요한 핵심 가치다. 저수익 범용 제품에 안주하던 과거의 포트폴리오를 과감히 부수는 대전환에 업계 전체가 사활을 걸어야 한다. 위기일수록 움츠러들기보다 미래 시장의 주도권을 선점하기 위한 ‘투자 대전환’으로 승부수를 던져야 할 때다.
이러한 구조적 재편이 몸집을 가볍게 하고 체질을 바꾸는 과정이라면, 디지털 전환(DX) 및 인공지능 전환(AX)은 그 위에 강력한 새 엔진을 장착하는 과정이다. 4차산업혁명의 기술력은 이제 생산현장의 효율성을 높이는 도구를 넘어, 기업의 생사를 가르는 핵심 역량이 되었다. 울산 기업들은 이미 실질적인 현장 혁신 성과를 통해 이 길을 증명하고 있다. S-OIL은 약 255억 원을 투입한 통합 제조 운영관리 시스템 ‘S-imoms’를 통해 공정 혁신의 새로운 표준을 제시했다. 30여 개의 분산된 시스템을 하나로 통합하고, AI 예지 정비를 통해 설비 이상을 사전에 포착함으로써 연간 200억 원 이상의 경제적 가치를 창출하고 있다.
샤힌 프로젝트를 필두로 한 대규모 투자 물결과 제조 AI 대전환에 본격 돌입한 생산현장의 변화는 울산이 여전히 글로벌 경쟁력을 갖춘 최적의 전략적 요충지임을 입증하고 있다. 경사스러운 ‘제20회 울산 화학의 날’을 맞아, 과거의 영광에 안주하지 않고 변화의 선두에 설 것을 다짐한다. 대외적 지정학적 리스크를 극복하고, 내부적 구조 혁신과 DX 및 AI 대전환을 완수하는 길만이 우리를 다시 글로벌 챔피언의 자리로 되돌려놓을 지름길이다. 위기는 곧 기회다. 지금의 진통을 혁신의 동력으로 삼아, 울산 석유화학산업의 새로운 50년, 그 찬란한 황금기를 함께 열어젖히자. < 릴레이 특별기고 - 끝 >
김보찬 S-OIL 부사장·울산광역시공장장협의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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