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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정호용, 권력에 눈멀고 진실에 눈감다

1980년 5·18민주화운동 당시 특전사령관을 지낸 정호용(94)씨가 사망했다.

정호용, 권력에 눈멀고 진실에 눈감다

정호용, 권력에 눈멀고 진실에 눈감다

‘광주 5적’ 정호용 사망

5·18 때 광주 머물며 특전사 지휘

5공 때 장관·국회의원 권세 누려

전두환 등 ‘광주 5적’ 모두 사망

발포명령 등 진실규명 끝내 ‘미완’

2026년 09월 13일(일) 20:50

1980년 5월 27일 오전 수많은 광주항쟁 희생자들을 뒤로 하고 전남도청에서 장형태 지사와 악수하는 정호용 특전사령관(오른쪽)./광주일보 DB

1980년 5·18민주화운동 당시 특전사령관을 지낸 정호용(94)씨가 사망했다.

이로써 40여년간 광주학살 5적(전두환·노태우·정호용·박준병·이희성)으로 불리던 5인방이 모두 사망했다. 신군부 핵심 인물들이 끝내 5·18 진실을 밝히지 않은 채 사망하면서 5·18 미완의 과제를 풀기 위한 ‘마스터 키’가 사라져버렸다는 평가가 나온다.

13일 전두환씨의 비서실장인 민정기씨는 이날 광주일보와의 통화에서 “정 전 장관이 사망한 것은 맞다”며 “발인은 14일로 알고 있다”고 밝혔다.

민씨는 정호용씨가 숨진 장소와 구체적인 사망 경위에 대해서는 “자세한 내용은 알지 못한다”고 말했다.

전씨의 부인 이순자씨는 발인이 다음 날(14일)로 예정돼 직접 빈소를 찾는 대신 정호용의 유족과 전화 통화를 한 것으로 전해졌다. 민씨는 “이씨가 유족과 통화한 것으로 알고 있다”고 설명했다.

정호용은 육군사관학교 11기로 전두환·노태우 등과 육사 동기였으며, 12·12군사반란의 주역인 군 내 사조직 ‘하나회’의 초기 핵심 구성원이었다. 정호용은 12·12 쿠데타 당시 대구에 주둔한 육군 제50사단장으로 직접 가담하지는 않았으나, 이틀 뒤인 12월 14일 특전사령관으로 임명됐다. 정호용은 5·18 당시에도 광주에 투입돼 학살을 자행한 핵심 병력인 제3·7·11공수특전여단을 통솔하고 있었다.

5·18진상규명조사위원회 조사 결과에 따르면, 정호용은 신군부의 핵심 지휘관으로서 5·18 당시 광주에서 81시간동안 머무르며 강경 진압에 깊숙이 관여했다.

정호용은 5월 19일 새벽 6시 30분 제3공수여단장 최세창에게 제3공수여단 광주 출동 준비를 지시했다. 이후 제3공수여단은 5월 20일 광주역 앞에서 시민들에게 집단 발포를 했다.

정호용은 5월 20일 밤 광주역 발포를 전후한 시각, 국방부장관실에서 전두환씨를 비롯한 신군부 실세들과 모여 ‘자위권 발동’을 검토하는 등 주요 회의에 개입했다. 5·18 기간 동안 네 차례에 걸쳐 헬기를 타고 광주와 서울을 오가면서 공수부대 3개 여단장들과 접촉, 진압대책을 구체적으로 논의하기도 했다.

5월 23일에는 광주에서 “희생을 무릅쓰고라도 사태를 조기에 수습해 주시라”는 전두환의 메모를 소준열 전투교육사령부 사령관에게 직접 전달하고, 5월 27일에는 도청에 진입하려는 공수부대에게 수류탄 등 군수품을 제공하기도 했다.

5·18 연구자들은 정호용이 12·12때 직접 참여하지 못해 공을 세우지 못하자 5·18 때 더 악랄하게 광주 시민들을 진압했다고 보고 있다. 또 정호용은 육군 정식지휘계통에서 벗어난 비공식 보고 체계를 통해 5·18 유혈 진압 과정을 보고받고 있었던 것으로 조사됐으나, 구체적으로 어떤 보고 체계가 작동했는지는 확인되지 않았다.  정호용은 ‘충정작전에 참가해 광주사태 진압에 공헌을 세웠다’며 1980년 6월 20일 충무무공훈장을 받았으며, 2006년에 박탈당했다. 이후 제3야전군사령관, 육군참모총장 등으로 승진했으며 1985년 대장으로 예편한 뒤에도 내무부·국방부 장관, 재선 국회의원을 거쳤다.

대법원은 지난 1997년 반란중요임무종사와 내란중요임무종사, 내란목적살인, 뇌물수수 방조 등 혐의로 기소된 정호용에게 징역 7년형을 확정했다. 정호용에게는 5월27일 전남도청 재진입작전을 계획하고 실행하는 것을 지원한 책임이 인정됐다.

정호용의 사망으로 신군부 핵심 지휘관으로부터 5·18 진상에 대한 증언을 들을 기회는 사라졌다. 최초 발포와 집단발포 책임자 규명, 행방불명자와 암매장지 확인 등은 5·18민주화운동의 핵심 과제임에도 지금까지 신군부 지휘부 가운데 이에 대해 인정하거나 진실을 이야기 하는 이는 단 한명도 없었다.

정호용은 지난 2021년 5·18진상조사위에 자신의 책임을 다시 조사해 달라는 진정서를 냈다. 5·18 책임자로 지목돼 내란목적살인죄로 처벌받은 것이 억울하며, 자신은 노태우 정부의 정치적 희생양일 뿐이라는 주장이었다. 정호용은 이후 미국으로 출국하면서 5·18진상조사위와 대면조사조차 제대로 하지 않았다.

정호용은 불과 3년여 전까지만 해도 지인 등을 통해 5·18 진상을 밝히는 데 협조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가, 군 후배들의 비난이 거세자 진상을 밝히기를 포기하고 증언을 거부한 것으로 전해졌다.

/유연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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