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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동칼럼]패배를 끌어안아야 하는 이유

한국 시간으로 지난 13일 아침에 열린 US오픈 테니스 여자 단식 결승전에서 엘레나 리바키나에게 패배한 아리나 사발렌카는 코트에 라켓을 내려쳐 부쉈다.

[정동칼럼]패배를 끌어안아야 하는 이유

한국 시간으로 지난 13일 아침에 열린 US오픈 테니스 여자 단식 결승전에서 엘레나 리바키나에게 패배한 아리나 사발렌카는 코트에 라켓을 내려쳐 부쉈다. 시상식이 준비되는 사이 자신을 촬영하는 카메라맨에게 손을 내저으며 욕설을 했고, 라커룸으로 돌아가 라켓 하나를 더 부숴 쓰레기통에 버렸다고 한다. 99주 동안 지켜온 세계랭킹 1위와 US오픈 3연속 우승을 한꺼번에 놓친 날의 풍경이다. 그는 “결승에서 패배하면 감정을 통제하기가 정말 어렵다”고 했다. 이해 못할 말은 아니지만, 테니스 팬들은 사발렌카가 2026년 US오픈 결승에서 졌다는 사실보다 그 이후의 태도를 오래 기억할 것 같다.

US오픈 결승전을 시청하고 나서 몇시간 지나지 않아 용혜인 의원의 기자회견 소식이 들려왔다. 예상대로 성평등가족부 장관 후보자에서 사퇴했다. 비례대표 의원과 장관의 겸직이 법적으로 가능하다는 말은 맞고, 청문회에서 소명하고 싶다는 바람도 후보자로서는 자연스럽다. 하지만 사퇴 기자회견에서 자신에 대한 성찰보다 타인을 향한 지목이 남았다. 부족함에 대한 지적을 겸허하게 새기겠다는 다짐은, “떳떳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는 자평, “후보자 검증은 포기한 채 소수정당을 조롱하고 폄하한” 국민의힘에 대한 비판, 일부 언론의 “악의적인 왜곡 보도”에 대한 지적에 묻혔다. 서로 연관성은 없는 사건이지만, 패배 후 라켓을 코트에 내려치는 테니스 스타의 모습이 겹쳐 보였다.

테니스의 전설 로저 페더러는 2024년 미국 다트머스대학교 졸업식에 초청받아 사람들의 기억에 남을 연설을 했다. 그는 통산 단식 1526경기에서 승률 약 80%를 기록했지만, 그 경기에서 따낸 포인트의 비율은 54%에 불과했다. 최정상급 선수도 득점하는 비율은 절반을 가까스로 넘는다는 뜻이다. 그는 “멋진 득점을 해도 범실을 해도 한 포인트일 뿐”이라 되뇌는 법을 익혔고, 커리어 초반에 수도 없이 투덜대고 욕하고 라켓을 집어 던진 뒤에 비로소 냉정함을 배웠다고 회고했다. 더없이 우아한 자세의 테니스로 기억되는 페더러 역시 사발렌카가 보인 나쁜 모습을 거쳐왔다. 둘의 차이는 기질이 아니라 학습에 있었던 셈이다.

규칙에 동의하고 코트에 선 이상 패배는 경기의 일부다. 당연한 일 같지만 때로는 잔인하다. 기량이나 노력의 차이가 아니라 경기 당일 컨디션이나 운이 승부를 가를 때도 있다. 갑자기 찾아온 궂은 날씨 때문에 테니스 코트 지붕을 닫는 동안 경기 흐름이 바뀌기도 한다. 하지만 규칙에 따라 경기를 한 다음 결과에 승복하는 것은 내가 부족했을 가능성 외의 다른 요인에는 눈과 귀를 닫기로 결단하는 일이다. 타인이나 외부적 여건을 탓하면 당장의 자존심은 세울 수 있을지 몰라도, 다음을 준비할 동력이 생기지는 않는다.

스포츠는 ‘그깟 공놀이’에 불과할 수도 있지만, 현실 정치에서는 패배가 더욱 무겁게 다가올 수밖에 없다. 정치학자 스티븐 레비츠키와 대니얼 지블랫은 책 <어떻게 극단적 소수가 다수를 지배하는가>에서 패배는 민주주의에서 필연적으로 일어나는 사건이고, 선거에 진 정당이 해야 할 일은 패배를 받아들이고 집으로 돌아가 다음 선거에서 다수의 마음을 사로잡을 방법을 알아내는 것이라고 말한다. 70% 이상의 국민이 장관 임명을 반대하는 정치인은 그 이유가 무엇이든 이미 진 것이다. 정치에서 패배를 남 탓으로 돌리는 말이 쌓일수록 민주주의의 규칙 자체에 대한 신뢰는 침식된다. 반대로 패배를 그대로 끌어안은 정당과 정치인만이 다음을 기약할 수 있다.

페더러는 “어떤 샷을 치는 순간에는 그게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것 같지만 지나간 포인트는 그저 지나간 것”이라고 했다. 그런 마음이 그에게 다음 포인트에 몰입할 자유를 주었고 압도적인 성취로 이어졌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수없이 진다. 페더러의 말처럼, 한 포인트를 잃을 때도 있고 한 세트를 빼앗기거나 한 경기를 질 때도 있다. 일생에 한 번 찾아온 것 같은 기회에서 패배할 때도 있다. 하지만 진짜 문제는 졌다는 사실 자체가 아니라 패배를 받아들이는 자세다. 패배를 온전히 내 것으로 받아들이고, 눈물이 나더라도 승자와 관중을 향해 억지로 웃음을 지어 보이고, 다음 경기를 위해 다시 일어서는 것이다.

조건 없는 승복은 패자가 승자에게 베푸는 미덕이 아니다. 같은 규칙에 따라 승부에 참여한 모두에게, 그리고 무엇보다 내일의 자신에게 건네는 약속이다. 라켓을 부수는 대신 그 라켓을 들고 다시 코트에 서는 자에게만 다음 경기에서 승리할 기회가 주어진다.

유정훈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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