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획된 반복 아닌 낙서 행위가 축적돼 화면 속 균형·리듬”
미스터 두들이 플레이스씨 야외에 설치된 작품 앞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황인옥기자
어린아이가 노트 한쪽에 비디오게임 속 캐릭터를 끄적인다. 같은 얼굴을 반복해서 그리고, 선을 하나 더 긋고, 빈 곳이 생기면 다시 무언가를 채운다. 무엇을 그릴지, 누군가에게 보여줄지에 대한 계획은 없다. 그저 재미있어서 손을 움직인다.
어린 시절 노트 귀퉁이에 비디오게임과 TV 캐릭터를 끄적이던 한 소년의 낙서가 하나의 거대한 세계가 됐다. 영국의 낙서 팝 아티스트 미스터 두들(Mr Doodle·본명 샘 콕스)의 작업이다.
그가 어린 시절부터 이어온 선의 세계를 경주에서 만나고 있다. 경주 플레이스씨(PLACE C)에서 내년 3월 14일까지 열리는 ‘두들 경주(DOODLE GYEONGJU)’전에는 경주를 위해 새롭게 제작한 작품 70여 점과 플레이스씨 소장품 90여 점 등 160여 점이 소개됐다.
전시에는 초기 흑백 선화부터 최근 색채와 붓을 적극적으로 사용한 작품까지 소개한다. 미스터 두들이 자신의 조형 언어를 어떻게 확장해왔는지를 한 자리에서 살펴볼 수 있다.
이번 전시는 플레이스씨 최상원 회장과의 인연으로 성사됐다. 최 회장은 2019년 미스터 두들의 작품을 처음 접한 이후 도쿄와 교토 전시, 도쿄 아트페어, 아트 타이페이, 홍콩 소더비 갤러리 등을 통해 작품을 꾸준히 수집해왔다.
미스터 두들은 독창적인 두들 아트로 국제 미술계에서 주목받으며 활동 영역을 넓혀온 작가다. 영국을 기반으로 도쿄·교토·타이베이·홍콩 등에서 개인전을 열었으며, 글로벌 브랜드와의 협업을 통해 대중적 인지도도 쌓았다.
그의 작품 세계를 상징하는 ‘두들랜드(DoodleLand)’는 캔버스에 머물지 않고 벽과 가구, 자동차, 건축 공간으로 확장됐다. 특히 작품을 선보이는 동시에 현장에서 직접 벽면을 두들로 채우는 작업으로도 알려져 있으며, 현재 수백만 명의 소셜미디어 팔로워를 보유할 만큼 미술과 대중문화의 경계를 넘나드는 작가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미스터 두들 작업의 근간은
두들 (Doodle·낙서)이다. 그에게 낙서는 작업을 관통하는 방식이자 태도다. 미술을 공부하면서 작품에 특정한 메시지와 의미를 넣어야 한다는 태도가 자신의 작업과 맞지 않는다고 느꼈을 때. 자연스럽게 두들링(doodling·낙서하기)을 자신의 창작 방식으로 받아들였다.
“두들링을 하면 그냥 아무 생각 없이, 본능적으로 즉흥적으로 하게 됩니다. 오히려 그럴 때 나만의 작업이 자연스럽게 나오는 것 같아요.”
미스터 두들의 개인전이 열리고 있는 경주 플레이스씨(PLACE C) 전시장 전경. 황인옥기자
최근작·소장품 등 160여점 소개
‘두들랜드’는 화폭 넘어 공간으로
무의식이 시각적 질서로 만들어
그리는 행위 자체서 즐거움 발견
낙서의 속성은 무의식의 끄적거림이다. 그의 작업도 다르지 않다. 작업 가운데 약 95%는 계획 없이 손의 움직임을 따라 진행된다. 무의식적인 선의 축적이 작업을 완성한다. 특정 캐릭터나 패턴을 의도적으로 반복하지 않는 것도 무의식적 행위를 기반으로 하기 때문이다.
“제가 이 캐릭터를 여기에서 반복적으로 그려야지 하고 목적을 가지고 그린 것은 아니에요. 다 그리고 나서 보면 비슷한 것들이 패턴처럼 보이기 시작합니다.”
그의 끄적거림은 선과 선의 만남이 증폭되는 장이다. 선과 선의 확장 속에서 서로 다른 형상들이 맞물리며 화면 전체에 균형과 리듬을 지닌 패턴이 드러난다. 행위 속에는 미리 계산된 구도나 계획된 반복보다, 즉흥적인 행위가 축적되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형성되는 질서다.
그의 두들링이 무의식의 발로라고 하지만 단순한 우연과는 구별된다. 끊임없이 이어지는 선과 캐릭터는 화면 안에서 반복과 리듬, 밀도와 질서를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작가는 이를 ‘무브먼트’라고 표현한다. 그에게 두들링은 생각을 그림으로 옮기는 과정이라기보다 몸의 움직임을 통해 무의식이 시각적 질서를 만들어가는 과정에 가깝다는 의미였다.
“저의 예술적인 행위는 하나의 의도된 행위라기보다 저의 무의식 속, 내면 깊은 곳에서 흐름으로 나오는 액션입니다.”
무의식에 기대는 작업의 출발점에는 어린 시절의 감각이 있다. 그는 비디오게임 캐릭터를 따라 그리다가 점차 자신만의 캐릭터를 만들어내는 즐거움을 발견했다. 지금도 작업의 영감은 외부보다 자신의 기억 속에서 찾는다.
“일부러 영감을 받으려고 외부에 많이 노출되려고 하지는 않아요. 어렸을 때 많이 놀았던 비디오게임의 BGM을 들으면 그때의 제 모습과 상상했던 것들이 떠오릅니다.”
미스터 두들의 개인전이 열리고 있는 경주 플레이스씨 전시장 전경. 황인옥기자
그를 끊임없이 창작으로 이끄는 것은 작업하면서 느끼는 즐거움이다. ‘아이 같은 태도’에 가까운 그의 무의식적 끄적거림은 결과보다 그리는 행위 자체에서 즐거움을 발견하는 창작자의 태도라고 할 수 있다. “아이들은 작업을 할 때 정말 재미있어서 하는 게 느껴지잖아요. 저도 작업을 할 때 그런 마음으로 임하기 때문에 아마 그런 에너지가 화면에서 느껴지는 것 같아요.”
최근 작품에서는 색과 붓이 새로운 변화를 이끈다. 초기의 흑백 선 중심 작업에서 벗어나 강렬한 원색과 그러데이션, 넓은 색면이 등장하고 붓의 물성도 적극적으로 활용된다. 특히 이번 전시에는 2026년에 제작된 신작들이 다수 포함됐다.
“브러시를 쓰기까지 정말 오랜 시간이 걸렸어요. 그런데 한 번 사용하고 나니까 정말 든든한 도구를 가진 느낌이 들었습니다. 제가 하고 싶은 것을 다 펼쳐낼 수 있는 도구가 생긴 것 같아요.”
색의 변화 역시 단순한 장식적 확장으로 제한할 수 없다. 선으로 구축해온 세계에 색을 더하면서 감정의 폭과 회화적 공간이 넓어졌다. 작가는 “색을 사용하면서 작품 안에 더 많은 감정을 녹여낼 수 있다는 점이 좋았다”며 이제는 색을 통해 자신이 표현하고 싶은 것을 더욱 자유롭게 만들 수 있다고 말한다.
미스터 두들 작. 황인옥기자
작가 현장 라이브 드로잉 '눈길'
‘천년’에 현재 감각 덧입히기도
“관객과의 만남 자체가 작업 일부”
이번 전시에서 눈여겨볼 부분은 현장에서 이어지는 라이브 드로잉이다. 미스터 두들은 관람객이 지켜보는 가운데 벽면에 선을 쌓아가며 경주의 공간과 만난다. 완성된 작품만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작품이 만들어지는 시간을 전시의 일부로 끌어들이는 셈이다.
“관람객들은 이걸 보기 위해 시간을 투자했고, 유료 전시라면 돈도 투자했잖아요. 작가로서 뭔가 하나라도 더 보답하고 싶은 마음이 있습니다.”
라이브 드로잉은 완성된 순간부터 사라질 가능성을 품는다. 그 때문에 작품은 물질적 결과물인 동시에 특정한 시간과 장소에서만 존재하는 사건이 된다. 이번 경주 작업에서는 첨성대 등 지역의 상징과 관람객과의 만남도 선 속에 녹여낸다.
미스터 두들이 경주에서 자신의 작업을 바라보는 방식도 흥미롭다. 그는 두들링을 특별히 현대적인 미술이라고 규정하지 않는다. “낙서가 누구나 옛날부터 해왔던 굉장히 원시적인 행위”라는 생각이다.
“낙서가 미술의 흐름 속에서 기억에서 없어졌거나 과소평가됐을 뿐이지, 제가 굉장히 현대적인 미술을 한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낙서는 누구나 경험했지만, 그의 화면에서는 반복되는 선이 특정한 캐릭터와 리듬, 밀도를 갖추면서 하나의 독립된 조형 언어가 된다. 결국 그의 작업이 보여주는 것은 ‘낙서도 미술이 될 수 있다’는 선언보다, 가장 사소한 선 하나가 지속적인 행위와 반복을 통해 어떻게 하나의 세계로 성장하는가에 있다.
천년의 시간이 축적된 경주와 즉흥적인 선의 세계가 만나는 이번 전시는 시간의 대비도 볼거리다. 과거의 흔적을 보존한 도시에서 미스터 두들은 지금 이 순간의 손 움직임을 기록한다. 그의 선은 경주의 역사를 재현하기보다 현재의 감각을 그곳에 덧입힌다.
전시장에서는 관람객이 직접 참여할 수 있는 ‘두들 항아리 그리기’와 어린이·가족 대상 ‘두들 탐험대’도 운영된다. 특히 관람객이 직접 도자기에 낙서를 남기는 프로그램은 작가의 창작 방식을 전시장 밖으로 확장한다.
미스터 두들은 작가로서 가장 즐거운 일에 대해 “창작을 할 수 있다는 것”과 “평소라면 만나기 어려운 사람들을 만나고 그들에게서 에너지를 받는 것”을 꼽았다. 관람객과의 만남 자체가 다시 작업의 일부가 된다는 것이다.
황인옥기자 hio@idaegu.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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