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희정 작가
고향을 떠난 사람은 어디에 뿌리를 내릴 수 있을까. 캐나다 토론토를 중심으로 활동하는 신희정 작가가 이민자의 삶과 정체성, 그리고 기억의 흔적을 담은 전시 ‘Still, Wind’를 통해 관람객과 만난다.
전주한옥마을 향교길68미술관은 오는 30일까지 레지던시 프로그램 첫 입주 작가인 신희정 작가의 초대전 ‘Still, Wind’를 개최한다.
이번 전시는 작가가 지난 4월 말부터 전주에 머물며 전통 한지 연구와 창작 활동에 몰두한 결과물을 선보이는 자리다.
전시에서는 가로 2m 규모의 대작을 비롯해 다양한 신작을 공개한다. 해외 활동 작가의 특성상 운반이 쉽지 않은 대형 작품도 포함돼 있어 레지던시를 통해서만 만날 수 있는 특별한 전시로 평가받고 있다.
전시 제목인 ‘Still, Wind’는 정지된 상태를 뜻하는 ‘Still’과 끊임없이 움직이는 ‘Wind’를 결합한 표현이다. 상반된 두 단어는 고향을 떠나 타국에 정착했지만 여전히 본래의 정체성을 간직한 채 살아가는 디아스포라의 삶을 상징한다.
한국에서 태어나 캐나다에서 활동하고 있는 신 작가는 자신의 이주 경험을 작품에 녹여냈다. 한국인이라는 문화적 뿌리를 간직한 채 캐나다 사회에서 살아가는 그의 삶은 늘 두 문화의 경계 위에 놓여 있다. 익숙한 것과 낯선 것 사이에서 형성되는 감정과 기억, 그리고 정체성에 대한 고민이 이번 전시의 핵심 주제다.
작가는 한국 전통 종이인 한지를 주재료로 사용한다. 한지 위에 이미지를 그린 뒤 이를 찢고 자르고 다시 붙이는 과정을 반복해 새로운 화면을 만들어낸다. 해체와 재구성의 과정을 통해 기억의 단편과 시간의 흔적을 시각적으로 구현하는 것이 그의 작업 방식이다.
특히 한지는 작가에게 단순한 재료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한국인의 문화적 정체성과 역사, 기억을 품고 있는 상징적 매체이기 때문이다. 신 작가는 전통 재료인 한지를 현대적 조형 언어로 재해석하며 개인의 경험을 보편적 이야기로 확장해 나가고 있다.
작품 속 수많은 한지 조각들은 유년 시절의 기억과 타국에서의 생활, 점차 희미해지는 모국어, 사람들과의 관계가 켜켜이 쌓인 삶의 흔적이다. 조각들은 서로 분리된 듯 보이지만 다시 연결되며 하나의 풍경을 완성한다. 이는 디아스포라가 겪는 상실과 적응, 단절과 연결의 과정을 은유적으로 보여준다.
화면은 관람객에 따라 겨울 숲이 되기도 하고, 비 내리는 도시나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밭, 울창한 숲으로 읽히기도 한다. 특정한 이미지를 강요하기보다 각자의 경험과 기억에 따라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도록 열린 구조를 취하고 있다는 점도 작품의 특징이다.
신희정 작가는 “작품 속 조각들은 흩어진 기억들이 다시 만나 새로운 풍경을 만들어가는 과정”이라며 “관람객들이 자신의 경험과 감정을 작품에 투영하며 각자의 이야기를 발견하길 바란다”고 말했다.
조미진 향교길68미술관 관장은 “신 작가의 작품에는 한 사람이 살아오며 품어온 시간과 기억, 그리고 어디에도 완전히 머물 수 없었던 마음의 풍경이 담겨 있다”며 “차분한 화면 속에서도 수많은 생각과 감정이 바람처럼 흐르는 모습을 느낄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번 전시는 단순한 개인전을 넘어 현대 사회의 이주와 정체성, 기억과 소속의 의미를 되돌아보게 하는 자리다. 찢기고 흩어진 한지 조각들이 새로운 풍경으로 완성되듯, 신희정 작가는 작품을 통해 상처와 단절을 넘어 새로운 삶의 의미를 만들어가는 디아스포라의 여정을 담담하게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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