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일보 전신 전라매일은 1994년 9월17일자 18면 추석 특집
추석 차례상은 오랫동안 집안의 질서였다. 어느 자리에 과일을 놓고, 생선 머리를 어느 쪽으로 돌릴지, 술잔을 몇 번 올리고 절을 몇 번 할지를 정해 놓은 생활 규범이었다. 그러나 30여년이 지난 지금, 차례상은 달라졌다. 음식은 줄고, 성묘와 벌초는 연휴 전후로 흩어졌다. 가족여행과 휴식도 명절의 한 장면이 됐다. 변하지 않아야 할 것은 조상을 기억하고 가족이 서로를 돌보는 마음이다.
■차례상, 질서의 이름.
전라일보 전신 전라매일은 1994년 9월17일자 18면 추석 특집에서 ‘차례상 차리기’를 비중 있게 다뤘다. 제목은 ‘축문 생략, 술잔은 한번…기제사와 차이’였다. 신문은 홍동백서(紅東白西), 동두서미(東頭西尾), 어동육서(魚東肉西), 좌포우혜(左脯右醯) 등 전통 진설법을 상세히 소개했다. 붉은 과일은 동쪽, 흰 과일은 서쪽에 놓고, 생선은 동쪽, 고기는 서쪽에 두며, 생선 머리는 동쪽을 향하게 하는 식이다.
당시 차례상은 다섯 줄로 놓는 방식이 일반적이었다. 첫 줄에는 밥과 국, 둘째 줄에는 구이와 전, 셋째 줄에는 탕, 넷째 줄에는 포·나물·식혜, 다섯째 줄에는 과일과 한과를 올렸다. 대추·밤·배·감의 순서를 뜻하는 조율이시(棗栗梨枾)도 널리 알려졌다. 음식 가짓수는 홀수로 맞추고, 복숭아·마늘·고춧가루는 올리지 않는다는 금기도 함께 전해졌다.
그 시절 차례상은 단순한 식탁이 아니었다. 조상을 모시는 예법이자 가족의 역할을 확인하는 장치였다. 그러나 준비의 무게는 대체로 여성에게 쏠렸다. 전을 부치고 탕을 끓이고 나물을 무치는 일은 며칠 전부터 시작됐다. 명절이 다가오면 “차례상을 얼마나 제대로 차렸느냐”가 집안의 정성과 예절을 가르는 기준처럼 작동했다.
이제 이 풍경은 빠르게 바뀌고 있다. 성균관의례정립위원회는 2022년 차례상 표준안을 내놓으며 음식 가짓수를 최대 9가지로 제안했다. 송편, 나물, 구이, 김치, 과일, 술 등 6가지만으로도 차례를 지낼 수 있고, 육류·생선·떡은 선택 사항이라고 밝혔다. 전은 반드시 올릴 음식이 아니라고도 했다. 홍동백서와 조율이시 역시 반드시 지켜야 할 예법이 아니라는 설명이다. 조상의 사진을 신위로 모시는 것도 가능하다고 봤다.
■명절 노동의 그늘.
변화의 이유는 분명하다. 핵가족화와 1인 가구 증가, 맞벌이 일상, 고령화, 여성의 경제활동 확대가 겹쳤다. 장거리 이동과 과도한 상차림 부담도 더는 개인 가정만의 문제가 아니다. 올해 한국물가정보 조사 기준 4인 가족 추석 차례상 비용은 전통시장에서 30만2500원, 대형마트에서 39만7700원으로 집계됐다. 품목과 구성에 따라 차이는 있지만, 의례를 지키려는 마음이 곧 적지 않은 가계 부담으로 이어지는 현실이다.
차례를 지내는 가정 자체도 줄고 있다. 한국농촌경제연구원 설문 결과를 인용한 최근 보도에 따르면 지난해 추석 차례상을 차린 가정은 10곳 중 4곳 수준이었다. 9년 사이 34%포인트 줄었다는 조사다. 차례를 없앤 집도 있고, 차례는 지내되 음식을 대폭 줄인 집도 있다. 가족이 함께 식사하고 고인의 사진 앞에 묵념하는 방식으로 의례를 바꾼 사례도 적지 않다.
성묘와 벌초의 시간표도 달라졌다. 예전에는 추석 연휴 귀성길과 성묘길이 겹치며 고속도로와 선산이 한꺼번에 붐볐다. 요즘은 연휴 직전 주말이나 평일 휴가를 이용해 미리 벌초하고 성묘하는 가정이 늘었다. 분산 성묘는 교통 혼잡을 줄이고, 고향에 오래 머물기 어려운 가족의 현실에도 맞는다.
다만 벌초·성묘 시기 분산에는 안전 문제도 따른다. 국립산림과학원은 2011년부터 2025년까지 발생한 성묘객 산불 182건을 분석한 결과, 약 80%가 추석 3주 전부터 연휴 사이에 집중됐다고 밝혔다. 벌초 때 논밭두렁이나 묘지 주변을 태우는 행위, 담배꽁초, 화기 취급은 작은 불씨도 산불로 번질 수 있다. 성묘 문화를 바꾸더라도 안전 원칙까지 가볍게 여겨서는 안 된다.
■간소화가 만든 변화.
추석 연휴 가족여행도 낯선 풍경이 아니다. 차례와 성묘를 미리 마친 뒤 가족이 함께 여행하거나, 고향 방문을 짧게 하고 휴식 시간을 갖는 방식이 늘고 있다. 이를 두고 명절의 해체라고 볼 일은 아니다. 가족이 한자리에 모여 조상을 기억하고 안부를 나누는 방식은 하나일 필요가 없다. 중요한 것은 누가 음식을 준비했는지, 상 위에 몇 가지를 올렸는지가 아니라 가족 구성원이 의례와 돌봄을 함께 맡는 일이다.
■추석의 본질은 남는다.
30여년 전 신문은 차례상의 위치와 순서를 자세히 알려줬다. 당시에는 필요한 생활 정보였다. 홍동백서와 어동육서, 동두서미는 선조를 모시는 정성의 언어로 받아들여졌다. 그러나 오늘의 추석은 다른 질문을 던진다. 차례상 규칙을 정확히 아는가보다, 부모와 자녀가 함께 음식을 준비했는가. 먼 친척과 연락하고 홀로 지내는 가족의 안부를 살폈는가. 고인의 삶을 자녀 세대에게 들려줬는가가 더 중요하다.
전통은 박물관 안의 규칙이 아니다. 시대의 삶 속에서 이어질 때 의미를 갖는다. 전통 차례상을 지키고 싶은 가정은 그 방식대로 하면 된다. 다만 그 형식을 모든 가족에게 강요할 이유는 없다. 간소한 상차림, 사진 앞 묵념, 가족 식사, 분산 성묘와 벌초도 충분히 추석의 예가 될 수 있다.
차례상이 가벼워진 자리에 가족의 대화가 늘어나야 한다. 명절의 핵심은 상 위의 음식이 아니라, 떠난 이를 기억하고 살아 있는 사람을 살피는 일이다. 추석은 그렇게 다음 세대의 명절로 바뀌고 있다. /황성조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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