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어촌 딸들의 노동현장이자
가족 책임져야했던 생계의 장
기숙사·시장·교회·야학 등
연대로 엮어진 뜨거운 공동체
“전방 앞에서 만나자” 좌표로
공장서 골목까지 하나의 생활권
전남방직 여직원휴게실 및 도서실(노석경사진)
1960년에서 1980년대 임동은 거대한 방직공장을 중심으로 하나의 산업공동체를 형성했다. 섬유산업이 호황을 누리던 1970년대 두 공장의 종업원은 6천명에 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공장이 일자리를 제공하면서 주변으로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노동자들의 기숙사와 사택을 비롯해 시장과 상점, 학교와 교회, 음식점과 유흥·오락 공간 등이 하나의 생활권으로 연결됐다.
당시 방직공장의 노동은 일반적인 사무직의 근무 형태와 크게 달랐다. 하루 8시간씩 3교대로 작업이 이뤄졌고, 야간에도 생산설비가 멈추지 않았다. 공장의 다수를 차지하는 여성노동자들은 반복적인 기계작업과 교대근무를 견뎌야 했다.
노동자들의 근무 시작과 종료, 교대 시간은 철두철미한 시스템으로 운영됐다. 한 올의 실을 뽑아내는 작업처럼 근무 체계 역시 일사불란했다.
하루 3차례 노동자들의 출퇴근은 임동은 물론 신안동과 북성동 등 인근 지역 주민들에게도 하루의 시간을 가늠하게 하는 신호였다. 공장 노동자들의 출퇴근 시간은 주민들의 생활시간이 맞물리면서 하나의 ‘도시 시계’와 같은 역할을 했다.
노동자들의 출퇴근 시간이 임박하면 주변 상인들은 손님들이 몰려올 시간을 짐작, 고객맞기에 돌입했다.
공장이 사람들의 생활에 깊숙이 자리하면서 ‘전방, 일신 앞에서 만나자’와 같은 말도 일상의 언어로 자리 잡았다.
굳이 상세한 주소를 설명하지 않아도 ‘전방 앞’, ‘일신방직 앞’이라고 하면 서로가 장소를 알아들을 수 있었다. 산업시설의 명칭이 생활공간의 지명이 된 것이다. 공장의 정문과 담장, 굴뚝은 노동자들에게 일터의 일부였지만 주민들에게는 동네를 설명하고 기억하는 생활 속 이정표였다.
이렇게 전방과 일신방직은 생산시설의 이름을 넘어 광주 시민들의 일상과 기억 속에 남은 장소가 됐다.
초창기 서림교회 모습. 1949년 촬영. 출처:서림교회 60년사
임동 방직공장은 농촌에서 올라온 젊은 여성들에게 새로운 삶의 기회를 제공한 일터이기도 했다.
1960~1970년대 산업화 과정에서 전남 각지의 10대 소녀들과 젊은 여성들이 일자리를 찾아 광주로 향했다. 농촌에서 선택할 수 있는 취업 기회가 제한적이었던 시절, 매달 일정한 임금을 받을 수 있는 방직공장은 선호도가 높은 직장이었다.
광주 북구에 거주하는 이영순(68)씨도 그중 한 사람이었다.
이씨는 1975년 중학교를 졸업한 뒤 고향 함평을 떠나 광주로 왔다. 전방에 취업한 그는 공장에서 3교대로 일하며 청춘을 보냈다.
낯선 도시에서 시작한 공장생활은 결코 쉽지 않았다. 근무시간에 맞춰 밤낮이 바뀌었고 하루 종일 돌아가는 기계 앞에서 일해야 했다. 그러나 이씨는 각종 수당을 포함한 당시 임금이 다른 일자리에 비해 나쁘지 않았다고 기억했다.
기숙사에서 생활하면서 별도의 숙식비 부담을 줄일 수 있었고, 월급의 상당 부분을 모을 수 있었다. 그렇게 모은 돈으로 가족의 생계를 돕고 자신의 결혼자금도 마련했다.
그에게 방직공장은 힘든 노동의 현장이면서 동시에 경제적으로 자립할 수 있는 기회를 준 곳이었다.
당시 여성 노동자들의 월급은 개인의 소득에만 그치지 않았다. 농촌에 있는 부모와 형제자매의 생계를 돕고, 동생들의 학비를 마련하거나 가계에 보탬이 되는 중요한 수입원이었다.
노동자들의 취업 과정에도 지역사회 특유의 관계망이 작용했다. 회사 모집원의 홍보와 친척·지인의 소개, 학교 교사의 추천 등이 주요한 통로였다. 먼저 공장에 들어간 사람이 고향의 동생이나 친구에게 취업을 권유하는 경우도 있었다.
‘우리 집 딸도 전방에 다닌다’는 말은 당시 전남 농촌에서 낯설지 않은 표현이었다.
그 말에는 자식의 취업과 도시 이주, 가족의 생계, 매달 받는 월급, 결혼 전 직장생활과 미래에 대한 기대가 함께 담겨 있었다.
서로 모르는 사람들도 딸이나 친척이 같은 방직공장에 다닌다는 사실만으로 친근감을 느낄 수 있었다. 공장은 일자리를 넘어 광주와 전남의 사람들을 연결하는 사회적 관계망이었던 것이다.
방직산업의 호황은 임동의 인구와 도시공간에도 변화를 가져왔다.
전남 농촌에서 일자리를 찾아온 노동자들은 기숙사에 들어가거나 공장 주변에 거처를 마련했다. 결혼 이후에도 익숙한 생활권을 떠나지 않고 임동과 인근 지역에 가정을 꾸리는 사람들도 많았다.
이렇게 임동은 사람들이 떠나는 곳이 아니라 취업과 정착을 위해 모여드는 곳이었다.
당시 임동의 풍경은 거대한 공장 담장과 낮은 주택가가 맞붙어 있는 모습이었다. 한쪽에는 길게 이어지는 공장 지붕과 높은 굴뚝이 서 있었다. 담장 밖에는 노동자와 주민들이 생활하는 단층집과 골목, 크고 작은 상점들이 촘촘하게 자리했다.
노동자들의 일상은 공장과 기숙사를 비롯한 숙소, 구내식당을 오가는 제한된 생활권에서 이뤄지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그 안에서도 같은 고향 출신이나 같은 작업반 동료들이 서로 의지하면서 새로운 인간관계를 만들어갔다.
임동의 방직공장 공동체는 같은 직장에서 일한다는 의미의 노동 공동체에만 머물지 않았다. 고향을 떠나 도시에서 삶을 시작한 젊은 여성들이 서로의 일상을 나누는 생활공동체이기도 했다.
1970년대 전방공장 모습. 출처:전방 30년사
노동자들의 생활권은 광주천을 넘어 발산마을과 광천동 일대까지 이어졌다. 서림초등학교시절 광천동에서 살았다는 노기욱 남도이순신연구소장은 "집에서 학교를 걸어가다 양동 발산다리나 남선연탄공장 인근에서 나오는 방직공장에 출근하는 하얀 옷을 입은 200~300명의 누나들을 만나는데, 그 모습이 그렇게 아름다웠다"고 기억했다.
노동자들이 벌어들인 월급은 다시 임동 일대에서 소비됐다. 공장이 임금을 지급하고, 그 임금이 상점과 음식점의 매출로 이어지는 지역경제의 순환구조가 형성된 것이다.
1975년 광주지역 제조업 종사자는 2만1천848명이었으며, 이 가운데 섬유업 종사자는 8천773명으로 전체의 40%가량을 차지했다. 두 방직공장을 중심으로 한 섬유산업이 광주지역 제조업과 고용에 얼마나 큰 비중을 차지했는지 보여주는 수치다.
방직공장을 중심으로 형성된 공동체는 경제활동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노동자들의 교육과 종교, 사회적 교류 역시 공장 주변 생활권에서 이뤄졌다.
그 대표적인 장소가 서림교회다.
일신방직 창업자인 김형남은 1946년 공장 노동자들을 위한 예배와 교육의 공간으로 교회를 설립했다. 초창기 전방교회로 불렸던 이곳은 이후 서림교회로 발전하며 노동자들과 지역 주민들의 종교적·사회적 생활에 깊이 관여했다.
교회는 노동자들에게 단순히 예배를 드리는 장소 이상의 의미를 지녔다.
임동 방직공장 기숙사는 일제 강점기에 지어진 목조 건물을 개조해 사용해오다 1970년대 철근 콘크리트 건물을 새로 짓는다. 전방에서는 1971년 1동을 우선 건립하고 이후 1984년과 1994년 기숙사 2,3동을 신설해 2천명이 넘는 직원을 수용했다. 출처: 전방30년사
고향을 떠나온 여성 노동자들에게는 타향생활의 외로움과 어려움을 나누는 공간이었고, 지역 주민들에게는 일상적인 만남과 교류가 이뤄지는 생활공동체의 거점이었다.
서림교회 최용희 목사는 "교회가 반세기 넘게 임동의 근현대 산업·노동 역사와 함께하며 공장 노동자와 지역 서민들의 삶과 애환을 어루만지는 교류의 장이자 안식처 역할을 해왔다"고 설명했다.
1970년대 후반부터 광주지역에서 확산된 야학과 노동자 교육활동 역시 당시 산업화의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다.
들불야학을 비롯한 야학운동은 노동자들에게 배움의 기회를 제공하는 한편 노동 현실과 사회문제에 대한 인식을 넓히는 역할을 했다.
이러한 흐름은 1980년대 광주지역 노동운동과 시민사회운동의 성장으로 이어졌다.
전방과 일신방직은 단순히 실과 옷감을 생산한 공장이 아니라 수많은 사람의 삶이 교차하고 공동체의 기억이 축적된 공간이었다.
‘전방 앞에서 만나자’, ‘우리 집 딸도 전방에 다녔다.’
한때 임동사람들에게 평범했던 일상의 말에는 공장이 멈춘 뒤에도 그곳에서 형성된 공동체의 기억은 남아있다.
이용규기자 hpcyglee@mdilbo.com·김현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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