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3월 10일 개정 노조법이 시행되면서 하청노동자가 원청을 상대로 교섭을 요구할 길이 열렸다. 그러나 법이 바뀌었다고 해서 교섭이 즉각 이뤄지는 것은 아니다. 〈노동과세계〉는 원청교섭 투쟁에 나서는 현장을 찾아 교섭을 준비하는 과정과 진행 중인 투쟁 소식을 나누고자 한다.
최근 금융권 콜센터는 유례 없는 격변기를 맞았다. 코로나19를 거치며 스마트폰 앱을 통한 비대면 금융거래가 일상이 되자 콜센터노동자의 업무는 ‘단순 안내’에서 ‘전문 금융상담’으로 확장됐다. 그러나 상담사의 처우는 20년 전 ‘위탁 구조’에 갇힌 채 그대로다. 설상가상으로 AI 상담사 도입은 상담노동자를 집단해고의 벼랑 끝으로 내몰기도 한다.
이런 위기 속에서 2024년 1월 1일, 국민은행・하나은행・현대해상 등 금융권 콜센터노동자들이 모여 ‘든든한콜센터지부’를 출범했다. 지부는 지난달 10일 개정 노조법 시행에 맞춰 가장 먼저 원청교섭을 요구하며 투쟁에 나섰다. 〈노동과세계〉는 김현주 지부장을 만나 원청교섭 투쟁에 나선 이야기를 들었다. [편집자주]
김현주 공공운수노조 든든한콜센터지부장. 사진=민주노총
“3월 10일 0시 1분에 맞춰서 보냈습니다. 우리는 오랜 기간 준비해왔거든요. (저희 지부가) 가장 먼저 넣고 싶었어요. 원청은 하청 핑계를 대고, 하청은 권한이 없다고 말하는 과정을 끝내야 했습니다. 화장실도 제때 못 가고 상담사가 스스로 목숨을 끊는 열악한 환경의 근본 원인은 원청과 하청이 맺은 ‘계약서’에 있어요.”
하청 뒤에 숨은 ‘진짜 사장’… 서비스 레벨(SL)의 족쇄
공공운수노조 든든한콜센터지부는 원청인 국민은행과 하나은행, 국민카드, 현대해상을 상대로 원청교섭 요구에 나섰다. 이들이 교섭을 요구한 근거는 명확하다. 콜센터노동자를 실질적으로 지배하고 통제하는 주체가 이들 원청사기 때문이다.
김현주 지부장은 이를 증명하는 지표로 ‘서비스 레벨’(SL)을 꼽았다. 원청은 하청업체와 계약하면서 ‘처리해야 할 목표 콜 수’를 지정한다. 인력이 부족하거나 상담사가 연차를 쓰덜라도 목표치는 바뀌지 않는다. 결국 현장에서는 화장실조차 제때가지 못하고 콜을 받아내야 하는 비인간적이 노동환경이 고착화됐다.
여기에 상담사의 숨소리 하나까지 점수화하는 품질 관리(QA)와 업무 매뉴얼, 고객 정보 시스템 권한까지 원청이 독점하고 있어 하청업체는 단순 근태 관리자에 불과하다.
“100명이 하던 일을 육아휴직이나 연차로 80명이 하게 돼도 목표량은 줄지 않아요. 결국 남은 사람들이 화장실도 가지 못한 채 콜을 받아내야 하는 구조죠. 품질 관리라는 이름으로 상담사의 숨소리 하나까지 원청이 점수화합니다. 하청은 그저 ‘바지 사장’에 불과합니다.”
‘단순 안내’에서 ‘전문 금융’으로… 하지만 처우는 ‘거꾸로’
지난 10여 년 사이 금융 환경은 급변했다. 스마트폰 앱을 통한 업무가 시작되고 코로나19 시기에 비대면 거래가 일상이 되면서 콜센터 업무 난이도는 기하급수적으로 높아졌다. 지점 거래는 중지됐고 전문적인 금융업무가 앱 안으로 들어왔다. 이를 안내하고 해결하는 콜센터노동자는 사실상 은행의 핵심 기능을 수행하게 됐다. 지점 직원들이 콜센터로 문의하는 일도 비일비재하다. 이러다간 ‘숨이 멎을 것 같았’다.
문제는 거꾸로 가는 처우다. 업무의 전문성이 강화됐지만, 상담사의 처우는 여전히 최저임금 수준에 머무른다. 산업구조는 고도화됐지만 인건비 절감을 위해 설계된 위탁구조는 요지부동이기 때문이다.
“제가 처음 입사했던 2005년과 지금은 완전히 다른 상황이예요. 대출, 외환, 퇴직연금 등 모든 업무가 스마트폰 앱 안에서 이뤄집니다. 지점 직원들이 업무를 몰라 콜센터로 전화하는 경우도 많아요. ‘어떻게 처리하느냐’라는 거죠. 주객이 전도된 겁니다. 그런데도 상담사 처우는 최하위 수준이예요. 여전히 최저임금입니다. 산업구조가 바뀌었는데도 20년 전 단순위탁구조를 그대로 유지하면서 비용만 아끼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2022년 4월 20일 대전지역 콜센터 노동자 결의대회에서 발언하는 김현주 지부장. 당시 공공운수노조 대전지역일반지부 국민은행고객센터 그린씨에스지회장을 맡고 있었다. 노동과세계 자료사진
AI 도입과 집단 해고, “더는 물러설 곳이 없다”
최근 콜센터노동자를 더욱 긴장하게 만든 건 AI 도입에 따른 고용위기다. 2023년 국민은행이 3개 용역과의 계약을 해지하면서 상담사 240명이 집단해고를 당한 경험이 위기를 직감하게 했다. 고도로 발달하는 AI 구조 안에서 콜센터노동자들은 ‘언제든 잘릴 수밖에 없’는 상황에 놓였다. 원청은 용역회사와의 계약을 해지하는 것 뿐이지만, 콜센터노동자에게 계약해지는 해고다. 김현주 지부장은 이를 단순한 업무 교체가 아닌 원청의 AI 도입 전략에 따른 인원 감축으로 규정했다.
“저희가 해고를 당한 건 원청이 인원감축을 결정했고 AI를 도입했기 때문이란 게 선명했어요. 원청과 직접 교섭하지 않으면 해답이 없어요. 해고를 결정하고 AI 도입을 주도하는 원청이 직접 고용안정에 대한 답을 내놔야 합니다.”
철저한 수집과 ‘0시 1분’의 승부수… 든든콜의 필승 전략
든든한콜센터지부의 원청교섭 요구는 법 시행에 맞춘 일시적인 움직임만은 아니었다. 하청이라는 벽을 뚫기 위해 법리적 증거 수집과 현장 조직화라는 두 가지 길을 걸어왔다. 2020년 대전 국민은행 용역회사 가운데 한 곳으로 시작한 콜센터 노동조합은 하나은행, 중기부, 현대해상 그리고 대전을 넘어 서울과 부산, 세종까지 조직화가 이어지면서 지금의 든든한콜센터지부로 독립했다.
지부가 가장 공을 들인 건 원청의 사용자성을 입증할 실무 데이터였다. 원청이 하청 노동자에게 직접 업무를 지시하고 통제한다는 사실을 입증하기 위한 방대한 자료를 수집했다. 시스템 권한이 원청에 종속됐다는 점과 원청이 실시간으로 지휘하고 감독한 흔적, 콜센터가 은행의 핵심 본질 업무 수행의 근거다. 김현주 지부장은 “이 날을 위해 수년간 영혼을 갈아넣었다”라고 돌아봤다.
“원청사 노동자와 같은 시스템을 사용하고 있어요. 원청에서 별도의 아이디를 부여해주지 않으면 시스템 접속이 불가능합니다. 감정노동자보호법에 따라 악성 민원인을 차단해야 하는데, 하청인 용역회사는 그럴 권한이 없어요. 원청에 있거든요. 시스템에 대한 권한은 100% 원청이 쥐고 있어요. 왜냐면 이게 금융업무라서 그래요. 고객의 정보를 보호해야 할 의무가 금융권에게 있기 때문입니다.”
2024년 6월 5일 악성민원에 시달리는 콜센터 노동자 실태 조사 및 정부대책 촉구 기자회견에서 발언하는 김현주 든든한콜센터지부장. 노동과세계 자료사진
시행령 변화에도 굴하지 않은 선제적 대응
개정법 시행을 앞두고 고용노동부는 수시로 시행령을 바꾸며 혼선을 줬다. 그러나 든든한콜센터지부는 “시행령이 어떻게 바뀌든 우리가 수집한 원청의 실질적 사용자성 증거는 변하지 않는다”라는 확신이 있었다. 내부적으로 법률 검토도 수 차례 거치며 만반의 준비를 했다.
개정법 시행 당일, 든든한콜센터지부는 “우리가 가장 먼저”라는 목표로 대기했다. 0시가 지나자마자 1분, 2분, 3분 간격으로 준비된 교섭요구 공문을 원청에 보냈다. 신중을 기하며 주춤할 수도 있었지만, 지부가 행동으로 나설 수 있던 원동력은 현장에서 쌓아올린 자신감이었다.
수십 년간 현장을 지켜온 콜센터노동자들은 자신들이 없으면 금융시스템이 마비된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콜센터노동자가 파업할 때 업무 이행률이 한 자릿수 대로 떨어져 원청이 곤혹을 치른 일은 조합원들에게 강력한 자부심으로 남았다.
“콜센터노동자가 하루만 파업을 해도 용역회사가 곤란해져요. 계약사항이 일그러지고 이걸 복구하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리거든요. 현대해상 계약 이행률이 보통 91~98% 정도 되는데요, 콜센터가 파업을 하면 이게 3%로 떨어져요. 엄청난 손해는 물론이고 고객의 불편도 상당하죠. 지점은 파업을 해도 만들어낼 수 없는 타격을 콜센터는 만들 수 있다는 걸 조합원들은 이미 확인했어요.”
전략적 분류와 맞춤형 교섭 설계
든든한콜센터지부는 당초 모든 사업장에 원청교섭을 요구할 생각이었으나, 준비 과정에서 전략을 바꿨다. 국민은행, 하나은행, 국민카드 등 대형 금융지주사의 하청구조가 복잡하기 때문이다.
국민카드는 11개 용역사가 콜센터 업무를 나눠 위탁하고 있다. 민주노총 뿐 아니라 한국노총 소속 복수노조가 존재한다. 법적 안정성을 확보하기 위해 교섭단위 분리를 결정했다. 콜센터노동자의 특수한 노동조건을 반영할 수 있는 독립된 교섭구조를 먼저 만든다는 취지다.
반면 현대해상에 대해서는 원청교섭 요구서를 바로 보냈다. 현대해상 자회사인 현대해상C&R의 경우 든든한콜센터지부 조합원이 절대다수를 차지하고 있어 교섭창구 단일화 절차에서 유리한 측면이 있기 때문이다.
지난 9일 서울지방노동위원회는 든든한콜센터지부가 국민은행과 국민카드, 하나은행 원청에 대해 신청한 교섭단위 분리를 인정한다는 결정을 내렸다. 원청인 금융기관의 사용자성을 인정했다는 뜻이다.
서울지노위 심판위원회는 ‘해당 원청이 고객센터에서 반복적으로 발생하는 악성 민원을 사전 차단, 통제하는 등의 감정노동자 보호 조치의 개선에 관한 교섭의제에 대해 원청 금융기관이 실질적인 지배력을 가진다는 점을 고려했다’라는 설명을 내놨다.
민주노총 콜센터 노동자들이 24일 오전 10시30분 서울 중구 민주노총 교육장에서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간접고용 구조로 인한 고용불안과 저임금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진짜 사장’ 원청사가 직접 교섭에 나서야 한다고 주장했다. 민주노총에 따르면 콜센터 노동자 약 40만 명 가운데 78.2%가 간접고용 형태로 일하는 것으로 드러났다. 사진=민주노총
“우리는 원청과 싸울 준비가 됐다”
김현주 지부장은 원청교섭 요구 준비해온 과정을 ‘조합원의 마음을 하나로 묶는 일’이라고 돌아봤다. 지부장의 독단적 결정이 아닌 조합원과의 끊임없는 소통과 교육을 통해 ‘우리가 왜 원청을 만나야 하는가’를 공유했다. 하청구조에 대한 분노를 전략으로 바꾸는 시간이기도 했다.
노조가 수집한 사용자성 증거와 조합원의 단결된 힘은 결국 원청을 교섭장으로 불러낼 것이라고 자신했다. AI라는 거대한 파도 앞에서도 콜센터노동자들이 당당할 수 있는 이유는 지난 3년간 쉼 없이 쌓아온 ‘준비된 투쟁’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요구는 첫째도 둘째도 고용안정입니다. ‘잘리면 끝’이라며 숨죽여 살던 하청구조 20년 세월을 끝내고 싶습니다. 우리가 원청교섭의 물꼬를 틀면 아직 조직되지 않은 다른 금융지주사나 보험사, 카드사 콜센터노동자도 우리와 함께할 거라고 확신해요.
나아가 금융권의 엄청난 임금 격차를 해소하고 은행, 카드, 보험사별 산별교섭을 완성하고 싶어요. 난이도 높은 업무를 하면서도 열악한 상황을 겪던 현실을 산별교섭으로 풀어내고 싶습니다.”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