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비인터뷰] 이상원 뉴스민 편집장
단비뉴스는 지난 1월 12일, 대구광역시 남구에 있는 뉴스민 사무실에서 이상원 편집장을 만났다. 김여진 기자
2012년 5월 1일 창간한 <뉴스민>은 대구·경북의 독립언론이다. ‘대구·경북에도 다양한 지역 의제를 다루는 언론이 필요하다’는 문제의식에서 출발해, 지난 10여 년간 풀뿌리 언론의 역할을 해냈다. 자본과 권력으로부터 자유롭기 위해 독자 후원을 중심으로 운영한다. 운영비에서 후원회비가 차지하는 비율은 약 65%다. 기사에 영향을 미칠 만한 ‘큰 광고’는 받지 않는다. 메인페이지 광고 배너 하나에 붙는 최고 가격은 월 30만 원이다.
2023년, 뉴스민은 ‘제2창간’을 맞았다. 제2창간엔 두 가지 뜻이 담겨 있다. 첫 번째는 망할 고비를 넘겼다는 뜻이다. 독립언론 운영은 쉽지 않다. 재정 문제가 계속 따라다닌다. 뉴스민이 2023년에 겪은 위기는 창간 이래 가장 큰 위기였다. 폐간 직전까지 갔다가 간신히 위기를 넘겼다. 두 번째는 리더가 바뀌었다는 의미다. 제2창간 이듬해인 2024년, 당시까지 대표를 맡았던 천용길은 뉴스민을 떠나 경북대학교에서 사회학 박사 과정을 시작했다. 평소 입버릇처럼 “마흔이 되면 뉴스민을 떠나겠다”고 말한 그는 실제로 그 나이에 뉴스민을 떠났다.
천용길 전 대표가 떠난 이후부터 이상원 편집장이 뉴스민을 이끈다. 이 편집장은 2012년 천 전 대표와 함께 뉴스민을 만든 두 명의 창간 멤버 중 한 사람이다. 이 편집장은 뉴스민 뉴스룸을 이끌고, 대표직은 경영 지식이 있는 강수영 변호사가 맡았다. 강 변호사는 뉴스민과 유튜브 콘텐츠 ‘강수영의 이바구’를 촬영하면서 이 편집장과 인연을 맺었다.
이제 이상원 편집장은 뉴스민에 남은 유일한 창립 멤버가 됐다. 단비뉴스는 지난 1월 12일 대구광역시 남구 대명동에 위치한 뉴스민 사무실을 찾아 이 편집장을 인터뷰했다. 뉴스민의 안부를 묻고, 독립언론과 함께해온 이 편집장의 삶을 되짚었다.
교지 동아리에서 바뀐 삶
이상원 편집장은 대구 토박이다. 대구 북구 노곡동에서 학창 시절을 보냈다. 어린 그의 꿈은 ‘평범하게 살기’였다. 고등학생 때부터 글쓰기를 좋아했지만 기자를 꿈꾸지는 않았다. 이른바 ‘진보 언론’을 접해본 적도 없었다. 어른들이 ‘존경하는 인물이 누구냐’ 물으면 ‘박정희 전 대통령’이라고 답했다. “그땐 그게 그냥 평범한 대답이었다”고 이 편집장은 말했다.
2006년, 이 편집장은 경북대학교에 입학했다. 어디든 취업이 가능하다는 말에 경영학과를 택했다. 새내기 때는 남들처럼 실컷 놀았다. 그러다 문득 ‘고등학생 때처럼 다시 글을 써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주변에서 학보사를 추천했지만, 그는 교지 동아리 <복현>을 택했다. “뭔가 자유롭게 글을 쓸 수 있을 것 같아 학보사보다 좋아 보였다”고 이 편집장은 말했다.
복현은 경북대 유일의 독립언론이었다. 대학 본부의 지원을 받는 학보사와 달리 학생회 예산으로 운영되는 학생 자치 조직이기도 했다. 교지 복현에선 다양한 주제를 다룰 수 있었다. 학생자치, 총학생회, 총장 직선제 등 학교 이야기부터 길고양이와 대학생 투표의식, 노동자에 관한 글까지 자유롭게 썼다. 분기마다 그런 글을 모아 책을 냈다. 복현에서 쓴 글이 이 편집장에게 새로운 효능감을 일깨웠다. 글쓰기가 현실의 문제를 바꾸는 데 기여할 수 있다는 믿음이 생겼다. “글을 쓰면서 기질적으로 나도 약간 반골 기질이 있었구나, 그걸 알게 됐다”고 이 편집장은 말했다.
천용길 전 대표도 복현에서 만났다. 이 편집장보다 두 학년 선배였던 천 전 대표는 당시 복현의 편집장이었다. 그는 세상을 더 나은 곳으로 바꾸는 일에 관심이 많았다. 소수자들에 관심을 갖고, 진보를 지향했다. 이 편집장은 그런 선배 천용길을 잘 따랐다. 약자의 목소리를 기록하는 기자를 꿈꾸게 됐다. “그 양반 때문에 내가 지금 이렇게 힘들게 기자로 산다”며 이 편집장은 웃었다.
2012년의 어느 날, 모교인 경북대학교 교정에서 천용길 뉴스민 전 대표(왼쪽)와 이상원 뉴스민 편집장(오른쪽)이 환하게 웃고 있다. 뉴스민 제공
교지를 닮은 언론을 만들다
그 인연을 이어 두 사람이 뉴스민을 만들었다. 2012년 5월이었다. “지역 언론이 다양한 여론을 담지 못하고 있다는 게 문제”라고 느낀 그들은 “대구·경북에서 소수자 이야기를 담는 언론을 만들어 보자”고 마음먹었다. 학교를 먼저 졸업한 천용길이 대표를 맡았고, 학교를 미처 못 마친 이 편집장은 그를 도왔다. 이 편집장은 “학교 졸업도 못 한 상태였지만 (뉴스민이) 잘 되면 졸업장은 필요 없을 것 같았다”며 당시를 회상했다.
호기롭게 시작한 독립언론 운영은 쉽지 않았다. 창간을 준비하며 학교 선배와 언론노동조합, 시민단체들을 찾아가 손을 벌렸지만 큰돈을 모을 수는 없었다. “당초 1억 원 정도를 계획했는데, 반의 반도 모으지 못했다”고 이 편집장은 말했다.
약 50명의 후원자가 모여 후원금으로 한 달에 150만 원 정도가 들어왔다. 이 편집장과 천용길 전 대표는 당시 월급으로 한 달에 50만 원씩 가져갔다. 천 전 대표는 먹고살기 위해 주 2회 가스 배달을 해야 했다. “뉴스민만 잘 되면 대학 졸업장 필요 없다”는 이 편집장의 자신감은 창간 1년 만에 “이러다 큰일 나겠다”는 위기감으로 바뀌었다. 대학을 졸업하기로 결심한 그는 2013년 다시 학교로 돌아갔다.
원래 그는 제대로 배우는 일에 흥미가 많기도 했다. 뉴스민을 만들기 1년 전인 2011년, 그는 한겨레 탐사보도팀에서 한 학기동안 인턴기자 생활을 했다. 세명대 저널리즘대학원의 안수찬 교수가 당시 한겨레 탐사보도팀장이었다. 서울 가리봉동의 한 조선족 쉼터에서 며칠간 먹고 자며 취재한 그는 “취재가 쉽지 않다”는 것을 느꼈다. 대학을 졸업한 뒤인 2014년엔 울산의 독립언론 <울산저널>에 들어갔다. 이듬해엔 뉴스민과 같은 해 탄생한 독립언론인 <뉴스타파>의 도움도 받았다. ‘뉴스타파 탐사보도 전문 언론인 육성사업’에 선정된 그는 약 10개월간 탐사보도와 데이터저널리즘 교육을 이수했다. 교육 과정에서 현대중공업 노동자들을 취재한 ‘노동개악’ 시리즈를 울산저널과 뉴스타파에 동시에 보도했다.
이상원 뉴스민 편집장은 2016년 뉴스민에 돌아와 첫 기획기사로 ‘네이버해외연수’ 시리즈를 썼다. 해당 기사는 대구 지방의원들의 해외 연수 실태를 파헤쳐, 총 11편에 걸쳐 보도했다. 뉴스민 홈페이지 갈무리
대구 지방의원들의 해외연수를 파헤치다
2016년, 다양한 경험을 마친 이 편집장은 뉴스민으로 돌아왔다. 약 200명의 후원자를 모은 뉴스민의 재정 상황은 조금 나아져 있었다. 여전히 최저임금에 미치지 못한 월급을 받아야 했지만, 그 사이 뉴스민 식구는 모두 4명으로 늘었다. 천용길, 이상원, 박중엽, 김규현 기자가 당시 뉴스민에서 일했다.
뉴스민에 돌아온 그는 공공 데이터를 들여다보는 기사를 써보고 싶었다. 뉴스타파에서 공부한 것을 실전에 적용할 기회라고 여겼다. 첫 기획 기사 ‘네이버해외연수’에 착수했다.
이 편집장은 2014년 7월부터 2016년 5월까지 대구 지역의회 의원들이 다녀온 60건의 연수 중 자료를 확인할 수 있는 54건의 실체를 샅샅이 뒤졌다. 의원들의 누적 연수 비용은 얼마인지, 해외 연수를 가장 많이 다녀온 의원은 누구인지 조사했다.
또한, 인터넷 표절 검증 사이트를 활용해 연수 보고서 대부분이 표절이라는 사실도 밝혀냈다. 네이버와 다음 등 포털 백과사전이나 블로그, 다른 의회나 공공기관의 보고서 등 표절 대상은 다양했다. 취재 결과를 모두 11편에 걸쳐 집중 보도했다. 이 보도를 계기로 뉴스민의 존재와 가치가 대구·경북 지역에 널리 알려졌다.
2018년엔 지방선거를 앞둔 경북 13개 시군을 찾아 지역 민심을 듣고 기록했다. 이를 담아 보도한 ‘지방선거 경북 민심번역기’ 시리즈는 민주언론시민연합의 ‘2018년 5월 이달의 좋은 온라인 보도’로 선정됐다. 뉴스민이 외부 단체로부터 처음 상을 받은 기사였다. “찻잔 속의 돌풍처럼 보였던 뉴스민의 저널리즘이 처음으로 외부로부터 인정받은 순간이었다”고 이 편집장은 당시를 회상했다.
지난 1월 12일 찾은 뉴스민 사무실 벽에는 ‘제2창간을 위한 후원의 밤’ 포스터가 붙어 있었다. 2023년 3월 31일 열린 이 행사로 뉴스민은 약 1000명의 후원자를 모았다. 김여진 기자
독립언론의 위기는 계속된다
2020년 무렵, 뉴스민은 안정적인 조직으로 발전해 나갔다. 코로나 팬데믹으로 ‘비대면’이 일상화된 시기였다. 뉴스민은 대구·경북에서 열리는 행사를 영상으로 생중계하는 사업을 펼쳤다. 덕분에 회사 운영비를 보다 안정적으로 마련할 수 있었다. 후원자도 크게 늘었다. 창간 초기 50명이었던 후원자가 400명으로 늘었다.
새로운 식구도 맞이했다. 2021년, 여종찬 PD와 장은미 기자가 뉴스민에 신입으로 들어왔다. 이전까진 알음알음으로 기자를 뽑았지만, 이때부터 공개 채용이 시작됐다. 특히 여 PD는 뉴스민이 맞이한 첫 PD였다. 2023년엔 첫 경력 기자 공채를 통해 김보현 기자가 입사했다. 당시 대표 천용길을 포함해, 모두 6명이 뉴스민 식구가 됐다.
위기는 사세를 키워나가던 와중에 찾아왔다. 2023년 1월, 기자들이 월급을 받을 수 없을 정도로 재정 상황이 나빠졌다. 창간 이후 가장 큰 위기였다. 비대면 일상이 끝나가면서 각종 행사에 대한 중계 수입원이 사라진 게 원인이었다.
2023년 3월 31일 열린 ‘제2창간을 위한 후원의 밤’ 행사는 뉴스민이 존폐의 기로에서시도한 마지막 선택지였다. 대구 중구의 한 맥주집에서 행사를 열어, 후원금으로 소정의 금액을 받고 입장권을 판매했다. 몇 명이 올지, 그 기금으로 과연 뉴스민을 되살릴 수 있을지 알 수 없었다.
행사가 시작되자 약 1000명의 후원자가 맥주집에 모였다. “그날 내가 직접 서빙했다”는 이상원 편집장은 “대체 어떻게 그 많은 사람이 왔는지 진짜 미스테리”라며 그날의 감격을 떠올렸다.
특히 이 편집장은 후원행사에 참여한 아사히글라스 노동자들을 잊을 수 없다. 그들이 노조를 결성하고, 도급계약 해지를 통보받고, 그에 맞서 투쟁하다가, 끝내 공장으로 돌아갈 때까지, 뉴스민은 2015년 이후 거의 10년 동안 관련 기사를 보도해왔다. “열심히 취재한 기사의 취재원이 다시 후원자로 돌아왔다는 게 뿌듯했다”고 이 편집장은 말했다.
이날 행사 이후, 적어도 3년에서 4년간 뉴스민을 안정적으로 이끌 수 있는 재원이 마련됐다. 후원 회원도 약 400명에서 800명으로 두 배 정도 늘었다.
지난해 6월 4일 경주로 워크숍을 떠난 뉴스민 기자들이 향후 계획을 논의하는 모습이다. 맨 오른쪽에 이상원 편집장이 앉았고, 반시계방향으로 김보현 기자, 장은미 기자, 여종찬 PD, 박중엽 기자가 앉아 있다. 뉴스민 제공
이상원 편집장이 꿈꾸는 제2창간 이후
그 후원을 받아 뉴스민의 제2창간 이후를 이끄는 이상원 편집장은 “언론의 본래 역할에 더 충실하고 싶다”고 말했다. “언론으로 존재하기 위해선 ‘소수자 대변’과 ‘저널리즘’ 둘 사이의 균형도 중요하다”는 그는 “뉴스민이 단순히 진보 언론으로 기억되기보다 지역 언론으로서 권력을 감시하고 약자의 목소리를 기록하는, 저널리즘의 본질적 역할을 잘 해내는 매체로 알려졌으면 한다”고 말했다.
다큐멘터리 제작은 그런 뉴스민을 위한 이 편집장의 새로운 도전이다. 지난해 10월, 뉴스민은 취재 초기부터 다큐멘터리 제작을 염두에 두고 기획 취재를 시작했다. 박중엽 기자가 보도한 ‘씬로이 뚜안’ 시리즈다. 대구 성서공단 일대에서 미등록 이주노동자 단속을 피하다 숨진 베트남 이주노동자 고 뚜안 씨의 이야기를 담았다. 박 기자는 여종찬 PD와 함께 뚜안 씨의 장례식과 그의 유족 이야기를 펜과 카메라로 기록했다. 그 이야기를 잘 간추려, 지난 3월 12일 ‘한국의 미워서’라는 제목의 미니 다큐멘터리를 뉴스민 유튜브에 게시했다. 풀 버전 다큐멘터리는 올해 하반기 공개될 예정이다. 그 성과에 힘입어 오는 4월에는 PD를 한 명 더 채용하고, 본격적인 다큐멘터리 제작 시스템을 구축할 예정이다.
이 편집장은 기후위기 문제에도 관심을 갖고 있다. “원래 기후위기 문제는 뉴스민의 주 관심사는 아니었다”는 그는 2024년 ‘기후로운 투표생활’ 시리즈를 보도한 이후, 대구·경북 지역의 기후위기 문제를 더 많이, 더 깊게 다뤄야 할 필요가 있다고 절감했다. “뉴스민 보도의 중심에 기후위기를 두지 않으면, (다른 지역 언론의 무관심으로 인해) 이 지역에서는 기후위기 의제가 사라질지도 모르겠다는 위기의식도 있다”고 이 편집장은 말했다.
이상원 편집장은 올해 한국 나이로 마흔 살이 됐다. 그를 뉴스민으로 이끈 천용길 전 대표가 뉴스민을 떠났던 나이이기도 하다. “내가 이 조직에 고여 있다는 걸 느끼면 나도 뉴스민을 떠날 생각”이라고 이 편집장은 말했다. 다만, 나이를 실감할 겨를이 아직 없다. “여전히 바쁘다. 너무 바빠서 ‘내가 마흔이다’ 이런 생각도 못해봤다”라며 그는 웃었다. 다가오는 6·3 지방선거를 어찌 보도할지 궁리하는 일, 그리고 지난해 태어난 딸을 돌보는 일 등이 그를 바쁘게 만든다.
복현부터 뉴스민까지, 인생의 절반인 20년을 그는 독립언론에 매달렸다. 가끔 위기가 와도 그는 놀라지 않는다. “올 것이 왔구나”하고 담담하게 받아들인다. 대신 담대하게 그 위기를 극복할 뿐이다. “매 순간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면, 앞으로도 하고 싶은 일을 계속할 수 있지 않을까 한다”고 이 편집장은 말했다.
단비뉴스 팩트체크부, 유튜쁘랜딩팀 김여진입니다.
용감하게 누비고, 섬세하게 쓰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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