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서울 을지로 중부시장을 방문한 배우 최불암.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29일 작고한 배우 최불암은 67년 연기 인생 동안 시대와 장르를 넘나들며 폭넓은 연기 스펙트럼을 보여줬다. 정의감 넘치는 형사부터 한 마을의 어른이자 가족의 든든한 가장, 능청스러운 중년의 로맨티스트까지. 그가 연기한 인물은 각기 다른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모두 한국인의 삶과 정서를 관통하며 시청자들의 기억 속에 남았다.
최불암은 1959년 연극 ‘햄릿’으로 무대에 오르며 연기를 시작했다. 1967년에는 서울중앙방송(현 KBS) 6기 탤런트로 선발돼 드라마 ‘수양대군’에서 김종서 역을 맡으며 TV 연기에 입문했다. 이후 영화와 드라마를 오가며 다양한 작품에 출연, 자신만의 연기 세계를 구축해왔다.
2024년 명예 국가수사본부장(명예 치안정감)으로 위촉된 배우 최불암의 모습. [사진 뉴스1]
그의 대표작을 꼽을 때 빼놓을 수 없는 작품은 MBC ‘수사반장’(1971~1989)이다. 최불암은 극 중 박영한 반장으로 출연해 범죄를 추적하는 정의로운 형사의 모습을 그렸다. 그는 단순히 범인을 잡는 데 그치지 않고 사건에 얽힌 사람들의 사연과 인간적인 고뇌까지 헤아리는 형사의 모습을 보여줬다. 이 작품으로 1977년 MBC 연예대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최불암은 1997년 한 인터뷰에서 “‘수사반장’에 출연하면서 술 취미가 사라졌다. 난 인생을 다시 배웠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그 드라마에서 배운 게 많았다”며 “치안을 책임지는 안방의 보안관이자 사회를 계도하는 큰 어른 역할의 연기자가 매번 술에 취해 비틀거릴 수는 없었다”고 털어놓기도 했다.
30일 서울 송파구 서울아산병원 장례식장에 차려진 배우 최불암의 빈소. [사진 공동취재단]
그를 한국인의 아버지로 각인시킨 작품은 단연 MBC ‘전원일기’(1980~2002)다. 최불암은 극 중 양촌리 김 회장(김민재) 역을 맡아 마을 공동체의 중심을 지키는 어른이자 가족을 보듬는 가장으로 활약했다. 김 회장은 농촌 마을인 양촌리에서 노모를 모시며 양자까지 세 아들 내외와 손주들을 거느린 대가족의 가장이었다. 집안에선 근엄하면서도 자애로운 아버지였고, 마을에선 사람들이 집안일, 벼농사 등 대소사를 모두 의논하는 사려 깊은 어른이었다.
MBC ‘개구리 남편’(1969)부터 인연을 맺은 배우 김혜자와 다시 호흡을 맞추며 현실감 넘치는 부부의 모습을 보여줬다. 총 1088회에 걸쳐 방영된 ‘전원일기’는 농촌의 일상과 가족의 희노애락을 담아내며 국민 드라마로 자리 잡았다.
최불암은 2007년 낸 에세이 『인생은 연극이고 인간은 배우라는 오래된 대사에 관하여』에서 “‘전원일기’에서 ‘그늘 넓은 느티나무’ 같은 아버지를 보여 주고 싶었다. 명절이면 온 동네 사람들 세배를 받고, 먼 길을 돌아 고단한 심신으로 고향을 찾은 마을 청년들의 어깨를 두드려주고, 크고 작은 일에 용기와 지혜를 빌려주던 어른의 모습을 드라마에서라도 그려 내고 싶었다”고 했다.
2024년 '수사반장 1958' 대본리딩 현장에서 만난 배우 이재훈과 최불암. [사진 MBC]
그렇다고 최불암의 연기 세계가 한 가지 이미지에 갇혀 있지는 않았다. MBC ‘그대 그리고 나’(1997~1998)에서는 ‘캡틴 박’(박재천) 역을 맡아 중년의 바람둥이이자 낭만적인 남성의 모습을 선보였다. 배우 이경진, 박원숙과 함께 연기한 중년의 삼각관계는 결말을 두고 시청자 투표가 벌어질 만큼 인기도 뜨거웠다.
동료 배우 오지명이 영화 ‘까불지마’(2004)로 처음 메가폰을 잡자 20여년 넘게 멀리하던 영화에 다시 도전하기도 했다. 이 작품에서 그는 친근함과 유쾌함을 더한 노년의 코믹 액션 연기로 변신을 시도했다. SBS 드라마 ‘식객’(2008)에선 아홉 달 동안 이발도 포기하며 만든 꽁지머리, 간드러진 하이톤의 목소리, 섬세한 손동작으로 궁중요리 권위자 오숙수를 파격적으로 소화했다.
그가 마지막으로 연기를 선보인 작품은 ‘수사반장 1958’(2024)이다. 이 드라마는 ‘수사반장’의 프리퀄(시간상 앞선 이야기를 다룬 속편)로, 최불암이 ‘수사반장’ 속 박영한으로 특별 출연했다. 이제훈이 박영한의 손자 박 형사와, 박영한이 반장이 되기 전인 청년 시절을 모두 연기했다. 그는 정의로운 경찰이 된 손자와 후배 경찰들을 격려하고, 이미 고인이 된 동료들의 무덤을 찾아가 경례와 함께 눈물로 안녕을 고하는 모습을 보여줬다.
최민지 기자 choi.minji3@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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