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 시대, 지혜의 인상주의를 향하여
최근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열린 〈인상주의에서 초기 모더니즘까지: 빛을 수집한 사람들〉 전시장을 다녀왔다. 이 전시를 찾은 목적은 따로 있었다. 카메라라는 미지의 기술이 출현했을 때 화가들이 느꼈을 당혹감, 상실감, 그리고 체념과 수용을 거쳐 끝내 인상주의라는 새로운 길을 찾아낸 그 여정이, 지금 인공지능(AI) 시대를 맞이한 우리와 너무나 닮아 있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글 내용에 맞춰 챗GPT가 그려낸 이미지. (자료=뉴스버스)
당시 화가들에게 카메라는 재앙 그 자체였다. 성경의 가르침을 정교하게 옮기거나 눈앞의 사물을 똑같이 복제하는 것이 업(業)이자 신성한 소명이던 시절, 셔터 한 번에 실물을 박제해버리는 기계의 등장은 화가라는 존재 자체에 대한 근원적 물음을 던졌다. 수십 시간 공들여 캔버스를 채우던 노력을 단 몇 초 만에 압도하는 기술 앞에서, 화가들은 자신의 존재 이유가 뿌리째 흔들리는 실존적 위기를 맛보았다. 처음에는 모두가 길을 잃었을 것이고, 무엇을 그려야 할지, 아니 그보다 더 근원적으로 '왜 그려야 하는지'에 대한 답을 잃어버린 채 방황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절망의 끝에서 역설적으로 '인상주의'라는 찬란한 꽃이 피어났다. 그들이 질문을 바꾸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기계와 똑같이 그려서 이길 수 없다면, "카메라가 결코 침범할 수 없는 인간, 화가만의 영역은 무엇인가?"를 묻기 시작한 것이다.
그 질문이 닿은 곳은 바로 인간의 '심상(心象)'이었다. 카메라는 인간의 눈과 마음을 통과하며 굴절된 감정의 결은 찍을 수 없다. 카메라는 찰나의 순간을 고정하지만, 온종일 풍경을 바라보며 내면화된 시간의 흐름과 그 변화가 주는 감동을 한 폭에 응축할 수는 없다. 결국 화가들은 대상을 '객관적으로 재현'하던 시선에서, 자신의 '주관적인 감정'을 표현하는 시선으로 과감히 방향을 틀었다.
클로드 모네는 물이라는 피사체 자체를 그리지 않았다. 그는 물 위에 부서지는 찰나의 빛과 그 빛이 만들어내는 생명의 떨림을 포착했다. 조르주 쇠라는 견고한 선을 버리고 무수한 점으로 세계를 해체하고 다시 조립했다. 그들은 대상을 보는 방식 자체를 혁명적으로 바꾸어 그리기 시작했다. 관습과 표준이라는 감옥을 탈출해 ‘나라는 필터’를 거친 이미지를 창조하기 시작하자, 폴 시냐크 처럼 화가들은 말하기 시작한다. “관점을 바꾸니 세상에 그릴 소재가 넘쳐난다!”
예술가들의 여정은 멈추지 않고 더 깊은 본질과 뜨거운 감정으로 나아갔다. 폴 세잔은 변화무쌍한 현상 너머에 있는 '변하지 않는 본질'을 응시하며 이렇게 말했다.
"우리 눈에 닿은 모든 것은 허물어지고 사라지지 않는가? 자연은 늘 같은 자리에 있지만, 우리에게 비치는 모습은 단 한 순간도 머무르지 않는다. 그래서 우리의 예술은 끊임없이 변화하는 모습 너머에 있는 자연의 영원함을 전율로 담아내야 한다."
세잔이 본질의 견고함을 추구했다면, 빈센트 반 고흐는 기술이 흉내 낼 수 없는 인간의 뜨거운 생명력을 폭발시켰다. 그는 동생에게 쓴 편지에 이렇게 적었다.
"나는 사진처럼 꼭 닮게 그리려는 것이 아니다. 대신 우리의 뜨거운 감정을 표현해, 다시 말해 우리가 알고 있는 색채에 대한 지식과 현대적 감각으로 그 사람의 성격을 표현하고 더 강렬하게 드러내려는 것이다."
이 위대한 거장들의 통찰은 오늘날 우리에게 깊은 울림을 준다. AI가 쏟아내는 정보는 매 순간 변하고 흩어지며 파편적이다. 그 방대한 데이터의 숲에서 우리가 찾아야 할 것은 단순한 지식의 나열이 아니라, 그 너머에 도도히 흐르는 본질이며, 동시에 기계는 가질 수 없는 인간만의 '뜨거운 감정'이다.
그랑드자트섬의 일요일 오후, 조르주 쇠라 (자료=국립중앙 박물관)
오늘날 우리도 19세기의 그 화가들과 똑같은 평행이론 위에 서 있다. 인공지능(AI)이라는 거대한 파도가 인간의 고유한 영토라 믿었던 지적 영역을 빠르게 잠식하고 있다. 정보를 검색하고 요약하며 논리적인 답을 내놓는 일에서 인간은 이미 AI의 상대가 되지 않는다. 한때 인간만의 전유물이라 믿었던 지적 노동이 너무나 쉽고 정교하게 대체되는 광경을 보며, 우리 사회 곳곳에서 상실감 섞인 좌절과 비관이 터져 나오는 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그러나 인상주의의 역사는 우리에게 희망의 이정표를 제시한다. AI가 '팩트'와 '데이터'의 영역을 가져갔다면, 인간은 이제 '의미'와 '해석'의 영역으로 더 깊이 전진하는 것이다. AI가 방대한 백과사전적 지식으로 우리를 압도할 때, 우리는 그 데이터 너머에 숨겨진 시대의 공기를 읽어내고 나만의 고유한 통찰을 덧입혀야 한다. 카메라에게 실물을 재현하는 일을 맡겼듯이, 표준화된 정답은 AI에게 기꺼이 넘겨주자. 대신 우리는 세잔이 추구했던 '영원한 본질'을 꿰뚫고, 고흐가 갈망했던 '인간의 뜨거운 감정'을 담아내는 시선, 즉 '지혜의 인상주의'를 구현해야 할 시점에 도달한 것이다.
물론 AI는 날로 정교해지고 있다. 감정을 모방하고, 공감을 흉내 내는 수준도 빠르게 높아진다. 그러나 AI가 감정을 정교하게 모방할수록, 역설적으로 그것이 '모방'임을 아는 인간만이 진짜 감정의 무게를 다룰 수 있다. 타인의 미세한 아픔을 알아채고, 데이터 수치 너머에 존재하는 인간적 갈망을 감지하며, 우리 마음의 심연이라는 광활한 우주를 관찰하는 일. 지식의 시대를 지나 지혜의 시대로 나아가는 인간의 새로운 역할이다.
카메라 덕분에 회화가 평면의 한계를 넘어 입체와 추상이라는 드넓은 세계를 발견했 듯, AI 덕분에 인간은 지식의 축적을 넘어 '지혜'를 향한 더 크고 인간적인 세상을 만나게 될 것이다. 기술 환경은 시대를 따라 변하지만, 폭풍우를 헤쳐나가는 인간의 태도와 생명력은 언제나 같다. 두려움을 거두고 인상파 화가들처럼 우리도 관점을 살짝 틀어보자.
“뜨거운 감정으로 인간의 본질을 드러내라.” (빈센트 반 고흐)
어쩌면 우리는 지금 인상주의가 막 태동하던 그 찬란하고도 혼란스러운 새벽녘에 서 있는지도 모른다. 조금은 불안하고, 또 조금은 설레는 채로. 아직 이름 붙이지 못한 새로운 세계를 처음으로 목격하고 명명해야 하는, 이 시대의 예술가들처럼 말이다.
김희연
은 기업전략 컨설턴트다. 씨티은행과 유수 증권사의 IT애널리스트를 거쳐 LG디스플레이 최고전략책임자(CSO)에 올랐다. 금융·증권·IT·제조 분야를 아우르는 경험을 바탕으로 전략· MI·신사업 발굴·IR을 총괄했다. 퇴임 후엔 AI를 통해 현자·석학들과 대화하며 차별화 전략·리더십 해법을 탐색하는 <AI스토밍(AI-Storming) 방식> 을 창안, 관련 저작권을 갖고 있다. 현재는 이 독창적 AI활용 방법론을 기반으로 기업과 기관에 <전략 컨설팅> 및 <AI 강의> 등을 하고, 뉴스버스에 'AI시대 인(人)사이트'를 연재하고 있다. 저서로는 <공감지능시대>와 최근 출간된 <리더는 AI에게 질문하지 않는다>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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